먹고사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숙제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누구나 두툼한 빨간 내복을 입고 지냈고 볼펜 하면 모나미 볼펜, 양치질 하면 불소치약을 제일 먼저 떠올렸던 때이므로, 자신의 취향보다 값싸고 튼튼한 제품을 사는 게 최우선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기업들이 다양한 제품 종류를 개발하지 않아도 잘 팔리는 시대였습니다.

어느 날 저는 대형마트에서 우유를 사려고 매대 앞에 섰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종류가 너무나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어떤 우유를 살지 결정하기 위해서 그 많은 상품을 일일이 비교해서 구매하기까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대해야 했습니다. 그때 ‘넓은 초원에서 싱싱한 풀을 먹여 키운 젖소에서 나온 우유’라는 문구가 눈에 가장 크게 들어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구입한 경험이 있습니다.

미래 사회를 예견한 책<드림 소사이어티>
미래 사회를 예견한 책<드림 소사이어티>

드림 소사이어티는 왜 탄생했는가?
1990년대에 미래학자 롤프 옌센Rolf Jensen은 그의 저서 <드림 소사이어티 The Dream Society>에서 지금 이 시대를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라고 명명했습니다. ‘드림 소사이어티’란 기업, 지역사회, 개인이 데이터나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새로운 사회를 지칭합니다. 농부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인류는 2차 산업혁명을 계기로 공장 노동자가 되었고 3차 정보화 혁명을 거치면서 정보사회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으면서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체력體力을 바탕으로 한 노동이 기계로 전환되고 인간의 지력知力까지도 첨단 정보 기기로 대체되면서, 우리는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머리보다 마음에 호소하는 ‘이야기’ 중심의 감성 시장이 이 시대를 규정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빠르게 성장한 우리나라 경제는 이런 시장 흐름에 맞춰서 같은 상품이라도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만드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같은 제품이라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든 스토리를 담았을 때 신뢰감과 공감이 더해지면서 날개 돋친 듯 팔리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들의 구매 기준에 변화가 생기고
한편, 생산자보다 한층 스마트한 소비자들은 다양화, 세분화, 전문화 된 취향을 상품에 적용해주길 요청하면서 소비 트렌드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럼 현재 우리가 어디에 소비의 기준을 두는지 볼까요? 먼저 상품을 구매하는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변화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산업혁명으로 급격한 사회구조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난 2차 혁명 즉, 산업화 시대에는 대규모 공장과 주거지역이 형성되면서 도시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기계를 이용하여 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하였으나 제품의 품질은 과거 주문생산에 의한 수공예시대에 비해 월등히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산업화 시대의 소비자는 제품의 기능이 우선이며 무엇보다 오래 쓸 수 있고 튼튼해야 했기에 중후장대(重厚長大: 무겁고 두텁고 길고 큰)가 제일 중요한 구매 기준이었습니다. 사회변화에 따라 산업화시대는 막을 내리고 21세기 사회는 적절한 제품의 생산보다 ‘정보’가 중요하며, 내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가에 의해 경쟁력을 가늠하는 정보화 사회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반도체와 과학기술 및 IT분야의 발달로 작고 가벼우면서도 기능적인 것이 선보이면서 소비자들은 경박단소(輕薄短小: 가볍고 얇고 짧고 작은)에 비중을 두고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팔리는 상품의 특성은 휴대하기 편리한 소형 사이즈에, 고성능이라는 점을 기본으로 합니다. 즉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제품이 얇고 작아지며, 소형의 경량 자동차, 문고판 서적, 북클렛 등의 보급이 확대되었습니다.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의 휴대 전화의 변천사 (출처:위키피디아)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의 휴대 전화의 변천사 (출처:위키피디아)

아름답고 창의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시대
그러나 넘치는 정보 시대에서 어떤 정보가 더 가치 있고 필요한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제품의 품질이 비슷할 정도로 높아짐에 따라 미유윤창(美遊贇創: 아름답고 즐거우며 예쁘고 창의적인)을 구매 기준으로 삼는 시대로 변했습니다.

휴대 전화를 예로 들어 볼까요? 90년대 초반 휴대 전화가 일반인에게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 휴대 전화는 그야말로 벽돌처럼 크고 무거웠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점점 더 얇고 점점 더 작게 만드는 기술력을 강조하여 셔츠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휴대 전화가 등장해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제품의 범용화는 좀 더 새로운 것, 좀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소비자의 요구에 의해 현재 휴대 전화는 ‘내 손안의 작은 컴퓨터’로 발전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언제 어디서든 SNS를 즐기고, 뉴스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음악을 듣기고 하며 필요한 인터넷 강의를 들을 뿐만 아니라 여행을 위한 정보수집과 기차나 비행기 티켓도 예약할 수 있을 만큼 편리한 생활을 누리게 합니다. 게다가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분야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은 쉽게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상품과 소비자가 만나는 접점, 스토어의 변화
이렇게 소비자의 요구가 변화하면서 소비자와 상품이 만나는 공간도 많이 변화되었는데 특히 온라인으로 상품구매를 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24시간 소비가 이어지고, 굳이 발품을 팔고 시간을 들여 매장으로 나오지 않아도 구매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부러 매장에 와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는 단순히 상품구매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심리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화장품의 경우 원하는 상품을 사가는 것 이상의 무엇, 즉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공간을 적극 도입해서 당장 필요하지 않더라도 발라 보는 체험을 통해서 다시 와서 구매할 수 있도록 매장 구성을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오는 간접광고 효과도 대단합니다. 인기 연예인을 광고모델로 삼는 이유는 마치 ‘저 제품을 쓰면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거야’라는 착각과 동시에 ‘저 제품을 쓰면 나도 유명인이 될 거야’ 하는 기대까지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감정경험이라고 하는데 기능이 어느 정도 충족된 현대사회에서 어떤 것을 구매할 것인가 하는 데에는 감정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1987, 바바라 크루거 작품.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1987, 바바라 크루거 작품.

이야기를 통한 소비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설치작가 바버라 크루거 Barbara Kruger가 1987년에 선보인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I shop, therefore I am.)는 현대인의 소비문화를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현대인에게 소비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시켜주는 수단의 하나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선택의 폭이 필요이상으로 넓고 깊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매일 매일 업데이트되는 신상품과 핫 플레이스, 각종 트렌드를 알리는 정보에 빠져들기 십상입니다. 유행을 따르고 유명인 따라잡기에 급급하기 전에,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는지, 즉 내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야기에 자신을 끼워 맞춰 혼란스러울 것이며 이것은 거짓정보에 속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 를 가져올 것입니다.

욕구의 정확한 정체를 알면
평범한 정보가 이야기로 만들어져 가치 있는 정보로 전환되는 꿈의 사회에서,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구매하고 싶으세요? 우리의 욕구는 종종 가면을 쓰고 나타나서 속을 수도 있고 언뜻 분별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단순히 커피 본연의 맛을 원하기보다 커피를 마시며 얻어지는 누군가와의 대화에 대한 욕구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면 커피만 마시지 말고 먼저 마음을 열고 대화할 사람을 찾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과 마시는 커피는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커피가 될 테니까요.

소비하는 지혜는 곧 살아가는 지혜
지식과 정보가 넘치는 복잡다단한 시대일수록 누구에게나 삶의 지혜가 필요하며 지혜는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면 부족함을 발견하여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듯이, 욕구의 정체를 알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인 소비 주체가 되어 그럴 듯한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성공한 누군가의 멋진 모습이 좋아 보여 진정한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는 관심도 없이 겉모습만 따라하다가 결국 모조품 같은 인생으로 남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소비를 통해 나를 표현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상품을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어떨까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소비의 거대 물결에 휩쓸려 원치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김연아
실내디자인과 건축계획을 전공한 공학박사.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일본 다카시마야 백화점 디자인실에서 실무를 담당했으며, 저서로는 <실내조형론> (김연아, 김은중 공저, 도서출판 기문당, 2002년), <디스플레이> (김연아 외 3인, 7차 교육과정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 교육인적자원부)가 있다. 현재 대안학교 링컨하우스대구스쿨 교장으로 있으면서, 경북대학교 건축공학부 외래교수, 대구예술대학교 겸임교수, 경상북도 건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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