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해외에 봉사하러 가는 것은 나의 로망이었다.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함께 봉사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친구가 꼭 되고 싶었다.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 ‘기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기로 10위 안에 드는 나라’라는 타이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기왕 봉사하러 가는 건데 어려운 나라로 가자!’ 싶어서 기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로 24시간을 꼬박 날아서 도착한 기니. 그곳에서 현지 사람들보다 먼저 나를 반겨준 것은 숨이 턱턱 막히는 습기 가득한 공기였다. 온 몸을 뒤덮는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습기 때문에 오 분도 안 돼서 땀에 흠뻑 젖었다.

‘내가 생각한 봉사는 이게 아닌데’

기니에서의 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됐다. 굿뉴스코 기니지부는 수도 코나크리에 있었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하루에 여섯 시간 정도만 들어오고, 그마저도 공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끊기는 전기 때문에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녁에 불을 켜고 머리를 감다가 ‘틱’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면 새까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듬더듬 수건을 찾으면서 전기 걱정 없이 살던 한국을 그리워했다. 전기뿐만 아니라 물도 고민이 었다. 기니는 ‘물의 왕국’으로 불리지만, 정부에서 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하루에 여섯 시간만 물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매일 ‘어떻게 하면 물을 아껴 쓸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언어였다. 기니는 프랑스어를 쓴다. 살면서 프랑스어를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나에게 현지인들은 열심히 프랑스어를 프랑스어로 알려주었다. 네다섯 살 꼬마들보다 말을 못하는 나 자신을 볼 때면 너무 한심하고 답답했다. 분명 나는 현지인들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데 대화를 할 수 없다니…. 언어 때문에 해외봉사 생활을 망친 것만 같았다.

와이셔츠는 여자, 블라우스는 남자?

마음을 고쳐먹고 배우려 해도 명사 하나하나마다 성별性別이 있는 프랑스어 단어가 가득한 책만 펴면 현기증이 났다. “도대체 왜 와이셔츠가 여성이고 블라우스가 남성이지? 이걸 어떻게 다 외우냐… 난 못해!”

시간이 흘러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안녕하세요, 배고파요, 더워요, 감사해요’ 뿐이었다. 전기가 없어도 적응하며 살겠고, 멀리서 물을 떠다 나르는 것도 하겠는데, 언어는 도저히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인드강연을 하기 위해 기니에서도 시골인 ‘제레꼬레’ 지방으로 갔다. 한국에서는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 길어봐야 대여섯 시간이 걸리지만, 기니에서의 이동과정은 한국과 차원이 달랐다. 제레꼬레는 택시(세단형 승용차) 한 대에 운전수 두 명을 포함한 열명이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서 쉬지 않고 24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비좁은 차 안에서 꼬박 하루를 달려 제레꼬레에 도착해서 내가 처음으로 본 모습은 우리를 백인이라며 신기하게 쳐다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외국인이 많은 수도 코나크리와 달리, 제레꼬레 사람들은 관심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제레꼬레에서 만난 그 녀석, 앙쥐

제레꼬레가 워낙 시골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낼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여섯 시간씩 들어왔던 전기도 없고 물동이를 옮길 수레도 없었다. 아침에는 양동이를 한 개씩 머리에 이고 우물이 있는 집에 찾아가 직접 물을 길었다.

점심때에는 마인드 강연회를 홍보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제레꼬레에는 프랑스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신 자신들의 부족어인 ‘게르제어’를 사용했다. ‘프랑스어도 어려운데 현지어라니…. 나는 이 먼 시골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가겠구나…’ 싶어서 울적해지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 양동이를 들고 단원들과 물을 기르러 나가는데 한 현지인이 따라 나왔다. 제레꼬레 IYF 지부에 사는 앙쥐라는 청년이었다. 앙쥐는 해맑게 웃으면서 나에게 ‘옹 바 퓌제 드 로(우리 물 길으러 가자)’ 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앙쥐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물을 기를 때도, 쉴 때도 앙쥐는 계속 말을 걸었다. 밥을 먹을 때면 꼭 내 옆에 앉아서 “이거 맛있지 않아?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야”라며 음식 설명도 해주고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사전을 뒤져 버벅거리며 말을 해도 늘 웃으면서 기다려 주고 알아들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 앙쥐의 모습에 나는 차츰 마음이 열렸다. 점심을 먹고 딱 강연회 홍보에 필요한 말만 달달 외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발음도 안 좋고 문법도 엉망인 내 말을 들어주려 노력했고, 내가 대화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를 좋아해줬다.

내가 레게 머리를 하자, 진짜 아프리카 사람이되었다고 좋아해 주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내가 레게 머리를 하자, 진짜 아프리카 사람이되었다고 좋아해 주는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엉터리 선생님에게 건넨 500원

조금씩 현지인들과의 대화에 자신이 붙어갈 때쯤, 지부장님이 “성욱아, 내일부터 한글 아카데미 좀 해봐라”고 하셨다. 나는 ‘이제야 말 좀 붙여보고 있는 중인데 뭘 하라고요? 한글을 가르치라고요?’ 하며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 울며 겨자 먹기로 부랴부랴 한글 아카데미를 준비했다. 준비하는 내내 ‘프랑스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러 오겠어? 그리고 사람들이 와도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카데미 장소에 도착한 나는 깜짝 놀랐다. 30, 40명 가량의 사람들이 한글을 배우겠다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버벅거리며 전날 준비했던 대로 “자, 저를 따라하세요”라고 말을 하고 그때부터 쭉 프랑스어 설명도 없이 한글만 계속 읽었다. 정말 엉터리 수업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나를 따라하며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메르시 보꾸, 프로페숴(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라면서 인사를 했다.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유창한 프랑스어 설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무엇을 알려준다는 것, 그리고 자신들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의 그런 모습과는 상반 되게 프랑스어를 프랑스어로 알려 줘서 못 배우겠다고 포기해버린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때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언어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졌다.

이제는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 듣건 못 알아듣건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가르쳤다. 그렇게 신나게 홍보를 다니다가 친해진 한 꼬마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게르제어밖에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그 아이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내가 웃으면 따라 웃고, 말을 걸면 수줍게 웃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나를 보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그 아이의 밝은 웃음이 너무 좋았다. 그 웃음은 말 그대로 세상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웃음이었다.

아카데미 마지막 날, 그날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 그 아이에게 나는 손짓, 몸짓으로 “나 오늘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명했다.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면서 뜻을 해석하는 것 같던 아이가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후, 마인드 강연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다가오더니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줬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씨익 웃더니 손을 흔들고 후다닥 뛰어가 버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을 펴봤다. 내 손에는 꼬깃꼬깃한 5백원이 쥐어져 있었다. 이곳 아이들에게 5백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꾸겨진 5백원이 그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인가?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고 내가 해준 거라고는 같이 웃는것 밖에 없었는데….’

기니 학생들은 카메라만 보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다.
기니 학생들은 카메라만 보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다.

제레꼬레, 다시 돌아올게!

마인드 강연이 끝난 날, 코나크리로 돌아가기 위해 정신없이 장비를 정리하고 있는 내게 앙쥐가 다가왔다. 인사를 하려고 멀리서 달려오는 모습만 봐도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앙쥐가 굉장히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욱, 꼭 다시 한 번 제레꼬레에 와!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같이 물을 뜨고, 가끔 멋쩍게 웃은 것뿐인데 내가 뭘 해줬다고 그리 고마워하는 건지…. ‘해 준 것 하나 없는데 내가 간다고 이렇게 아쉬워하는구나’ 싶었다. 나는 앙쥐에게 “다시 제레꼬레에 꼭 올게. 그리고 내가 더 고마웠어”라고 말했다. 내가 차를 타고 그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앙쥐는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앙쥐와 함께 찍었던 사진, 한글 아카데미를 준비했던 노트와 구겨진 5백원을 다시금 꺼내보며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던 제레꼬레에서의 시간을 회상했다. 언어가 안 통하면 마음을 나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착각을 완전히 바꿔 준 제레꼬레. 그곳에서의 시간을 생각하다보니 괴롭게 느껴졌던 차 안에서의 24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지금은 이곳 코나크리에서도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바짐, 가미, 땜가, 오귀스땡, 로드릭, 베카….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이유는 더 이상 내게 핑곗거리가 될 수 없었다. 지금도 종종 앙쥐에게 전화가 온다. ‘얼마 전 우물이 있는 곳으로 지부사무실이 이전해서 이제는 물 뜨러 멀리가지 않아도 되니까 다시 오라’고 말한다. 장난 같은 말이지만 그 말에 담긴 앙쥐의 마음을 알기에, 나도 진심으로 언젠가 꼭 가겠다고 대답한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고, 알바를 하면서 느낀 건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면 ‘왜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해주지? 나도 뭘 해줘야 하나? 분명 뭘 바라고 저러는 걸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하지만 제레꼬레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부족하든 부족하지 않든,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다가와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었다. 과분한 사랑으로 언제나 나를 품어주었던 기니, 그리고 기니에서 만난 친구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지금, 벌써 기니가 그립다.

신성욱
굿뉴스코 16기로 기니에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귀국 전날 현지인 친구들이 파티를 열어주면서 그에게 기니로 꼭 다시 돌아오라고 한 것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 된 기니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며 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 앙쥐와 물을 길어 오는 중에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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