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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씨를 심듯 꿈을 심어주려고 합니다코트디부아르 총리실 직속 교육기관 총책임자 예피판 조로 비 발로
김민영 기자 | 승인 2018.02.23 16:37

사람은 누구나 좋은 변화를 원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계기와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예피판 조로 씨는 판사였지만 정치적 망명을 하면서 원치 않는 고난을 겪었고, 극적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총리실 직속 교육기관 총책임자가 되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지 못했지만 그가 맞았던 역경의 순간순간, 무엇을 고민하고 어떻게 인생의 방향 키를 잡았는지 그의 사연을 소개한다.

코트디부아르 총리실 직속 교육기관 총책임자
예피판 조로 비 발로
국무총리 직속 교육기관 총책임자로서 국가와 민간 교육 기관의 역량 계발을 위해 애쓰고 있다. 취업난과 청소년 육성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인드 교육’ 이라고 말하며, 한국의 국제청소년연합IYF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인 1986년, 청년 예피판 조로는 희망찬 꿈을 안고 법대에 들어갔다. 당시 그가 회상하기를 대부분의 코트디부아르 법대는 ‘작은 중국’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모두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서 수업을 듣거나 창문에 붙어서 듣곤 할 정도였다. 시험 통과자가 아주 적어서 입학한 1천 명 중에 졸업생은 150여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야만 앞날의 비전이 있었다. 가끔 먹을 것이 부족하고 버스비가 없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앞만 보면서 학업에 매진했다. 검소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어떤 도움도 바랄 수 없었고, 공부를 해야한다는 한이 생겼다. 그 힘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을 구해야 했는데 저는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1년 동안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면서 판사가 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배웠던 법학과목을 복습하고 여러 실전문제와 상식문제를 계속 풀어보면서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1차 시험에 합격한 이후에는 구두 시험이 있었는데, 시험을 치를 때 입을 만한 좋은 셔츠가 없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 입고 시험을 봤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예피판 조로 씨와 일행이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조로 씨는 따뜻한 환영에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평소 학생들과 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학교에 있는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예피판조로 씨는 대덕 링컨 고등학교를 방문해 청소년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년간 교육을 받은 후 예피판 조로는 판사가 되었다. 그는 정의를 구현하고 매사에 신중히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만큼 판결이 끝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 늦은 밤, 자신이 내린 결정이 최선이었는지 곱씹어보곤 했다.

“재판이 끝나고 집에 돌아간 후에도 판결문을 읽어보는 이유는 나의 결정이 타인의 자유와 재산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판결 하나로 개인이나 가정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에, 큰 책임감이 따르는 만큼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재판 후에도 항상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범법자였지만 판결 후 감옥에 가면 교도소 시스템이 열악해서 수감자들 중에는 좋지 않은 환경으로 배를 곯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수감자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저는 훗날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법 시스템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유를 박탈하는 판결을 했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사형 선고를 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를 알지 못하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저 역시 사람들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아프리카 프랑스어권 체육대회를 담당하고 있는 조로 씨가2017년 대회에서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을 격려했다.

그는 수감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수감자를 돕는 단체를 만들었다. 교도소에서 지내는 수감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도시 사람들 중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서 쌀과 약을 기부받았고, 교도소 안에 ‘작문교실’을 만들어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펜과 노트를 제공해서 시간을 의미없이 보내지 않도록 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감옥에 들어왔는지, 꿈이 무엇인지에 대해 썼습니다.

작문교실을 통해 재소자들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 그들의 희망 등을 보았고, 그들이 범법자가 된 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 또한 사회의 의무인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저는 수감자들에게서 편지를 받습니다. 과거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이 출소해서 보낸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를 친구처럼 대해주고 우리가 스스로 되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수감자들 중에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 집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출근했는데,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그를 네덜란드에서 만났는데, 축구선수 에이전트가 되어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통할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걸 봤습니다.”

수감자 외에도 어려운 환경 까닭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는 일을 했던 예피판 조로 씨. 고아원을 설립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 중에는 지금 교사가 된 이도 있고, 역사학 박사를 준비하는 이도 있다. 또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받는 학생도 여럿이다.

서아프리카에서도 정세가 안정적이었던 코트디부아르에서 그는 1994년부터 5년간 판사로 일했다. 그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1999년에 군부 쿠데타가 터지고 그가 정부와 상반된 입장을 취하면서 판사 일을 계속하기 힘들어졌다. 결국 200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벨기에와 콩고 킨샤사에서 망명자로 지냈다.

내일을 알 수 없어서 이유 없는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다. 조로 총책임자 또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를 망명하던 시기라고 꼽는다. 특히 2004년에 벨기에에서 지냈을 당시에는 암울하고 어지러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 속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판사였던 그가 다른 나라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코트디부아르를 떠나서 여러 일을 했습니다. 먼저 프랑스에서는 ‘코트디부아르 인권운동’이라는 단체를 설립해서 인권보호를 위해 일했습니다. 군사정권 시대에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 정 Cote d’Ivoire 당, 언론 등을 대상으로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자유를 보장받는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2004년 벨기에에서 지냈을 당시에는 미래가 너무 불확실했습니다.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주장하던 가치관 때문에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안락을 다 무너뜨리는 것은 아닐까? 가치관을 계속 고수하는 것이 과연 맞는 걸까? 아니면 이제라도 그만 두어야 할까?’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 평범하게 살아가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의 꿈은 무엇이지?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때 마음이 너무 슬펐고 불안했습니다.

한번은 식당에 접시닦이 자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식당에서 제 손을 보고 “사무 일만 하던 손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 부엌에서는 일 못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사무직을 구하러 가도 ‘당신처럼 경력이 화려한 사람한테는 우리가 시킬 일이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벨기에에 있었을 때에는 가족과 함께 지냈고, 콩고 킨샤사로 이동했을 때 제 가족은 영국으로 갔습니다. 가족과 헤어지는 것도 힘들었고, 집안 형편이 아주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습니다.”

망명 시절, 예피판 조로는 판사의 직위를 내려놓고 망명시절 고뇌와 갈등에 찬 시간을 보냈다. 환경이 무너졌을 때 인간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를 발견했다. 그리고 환경이란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인생의 본질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다행히 콩고 킨샤사 망명 당시에 그는 유엔 직원으로 취직해 인권보호위원회 소속으로 불합리한 관행을 척결하는 부서에서 근무했다. 당시 콩고에도 군사 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콩고재판소에서 인권관련 범법자들이 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그가 일한 부서는 국제인권재판소와 일을 많이 하는 곳이었다.

특별히 지난날 그가 판사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중학교 3학년 연극반 경험은 훗날 그가 인권에 큰 관심을 갖게 한 작은 씨앗이 되었다. 그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큰 나무가 된 것이다.

예피판 조로 씨는 고향 생프라의 농민들을 돕기 위해 투자자들을 초청해서 농민과 직접 만나는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2015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특표율을 올리는 데 기여한 예피판조로 씨. 그는 자신이 속한 여당의 현 대통령 재임 선거에 승리한 후 생프라 주민과 기쁨을 나눴다.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저는 자녀가 13명이나 되는 다복한 가정에서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당시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생활하기가 부족해서 따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도 방학 때가 되면 아버지를 도왔지요. 아버지가 저희모두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먹고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수업을 잘 따라갔는데, 중학교 들어가서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학, 물리는 어렵고 흥미가 없어서 수업 시간에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어서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자연히 다른 과목에서도 문제가 생겼고 중학교 2학년 때는 성적이 나빠서 퇴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연극반에 들어갔고, 대중 앞에서 말하면서 소심했던 제 성격이 바뀌고 발전했습니다. 제가 열 다섯 살 때 했던 연극이 기억납니다. 제목은 ‘소웨토 학생’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친애하는 부모님, 오늘 저녁 소웨토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인종차별 정책에 반대한 어린 영웅입니다. 1976년 6월 16일, 길에는 3만명의 흑인이 있고, 경찰은 무차별 공격을 합니다. 수십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칩니다. 수천 명의 부상자 수는 흑인들이 겪는 불의와 인종차별을 말해줍니다.’

이런 발표를 시작으로 한 편의 연극이 마무리됩니다. 사실 이 연극이 후에 제가 불의와 싸우는 데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연극을 통해 문학과 언어에 대해 흥미가 더해져 과학, 수학 과목에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었고, 더 이상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목사가 되고 싶어서 1학년 때는 공부를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했고, 철학도 공부하면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접하면서 물질과 생각 너머에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저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타거나 사람들을 만나도 전도했습니다. 아버지와 의견 차이로 2년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가족들과도 어렵게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목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며, 하나님을 섬기는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법 시험을 치고 난 후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좋아졌지요.”

판사였던 그는 카테센터(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설립한 재단)의 현지 대표이기도 했다. 망명 후 콩코 킨샤사의 유엔 지부에서 사법 개혁에 기술 지원을 했고, 코트디부아르 프랑스어권 협력기구 대표로 지냈다. 현재 그는 코포니 경기 대회의 운영위원회장이기도 하다. 2016년에는 총선에 출마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총리실 직속 교육 기관 총책임자가 되었다.

“2011년에 정권이 바뀌면서 코트디부아르로 돌아갔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갔을 때 인간적인 마음 때문에 슬픔에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어려움이 스쳐지나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끝에는 목적이 있고,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픔과 희망, 이 두 가지 공존된 감정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으로 쓴 책의 제목은 <코트디부아르의 판사, 폭력을 무장해제시키다Juge en Cote d'Ivoire –Desarmer la violence>입니다. 제 학창시절의 경험과 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습니다. 두 번째 책도 출판되어 나왔는데 제가 느낀 감옥에서의 삶, 그리고 인생을 감옥에 빗대어 생각해보며 글을 썼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피판 조로 총책임자는 코트디부아르에서 시급한 문제를 청소년 교육과 취업난으로 꼽았다. 15년간 불안정한 나라 정세로 젊은이들이 삶의 목적마저 잃어버린 추세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올바른 인성을 갖추고,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청소년들에게 삶의 건전한 목표를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인드 교육의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했다. 국가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힘’이라고 말하는 예피판 조로 총책임자는 특별히 청소년들의 마인드 변화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난 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희망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린 시절 만난 그 학생들이 지금은 장성해서 사회의 요직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저를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로 씨, 당신은 저희에게 롤 모델입니다. 저희도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보람되고, 지난날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현재 저는 총리실에서 사람들이 더 나은 국민이 될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능력을 계발하는 일에 관여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일을 담당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김민영 기자  press1002@itmorro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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