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여기까지 와 줘서”
“아니야, 담에 꼭 다시 올게”

머리에 깃털을 꽂고 말에 올라 창을 휘두르며 버팔로(들소)를 사냥하는 전사들, 천막들이 옹기종기 모인 가운데 추장님 곁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그러나 실제 우리가 가서 본 인디언 마을은 그동안 동화나 영화로만 보던 것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엔 서로가 서로를 낯설어했지만, 이젠 다시 만날 날을 꿈꾸는 소중한 친구 사이가 됐다.

오타와에서 사귄 원주민 친구 존 트래퍼와 함께. 무기력증에 빠져 사는 어머니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다. 원주민 가정들 중에는 이처럼 부모님 대신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많다. 특히 할머니는 ‘존이 마약에 빠지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낼까 걱정했는데, 봉사단 여러분이 친구가 되어주어 참 고맙다’고 하셨다.
오타와에서 사귄 원주민 친구 존 트래퍼와 함께. 무기력증에 빠져 사는 어머니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다. 원주민 가정들 중에는 이처럼 부모님 대신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많다. 특히 할머니는 ‘존이 마약에 빠지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낼까 걱정했는데, 봉사단 여러분이 친구가 되어주어 참 고맙다’고 하셨다.

지난 2016년 나는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으로 캐나다를 다녀왔다. ‘캐나다처럼 잘사는 나라에 무슨 해외봉사야?’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봉사활동이 꼭 물질적으로 가난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했던 봉사활동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우리가 했던 봉사활동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이티나 멕시코 청소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인 영어캠프와 아카데미 등 ‘교육봉사’, 캠프와 카운슬링으로 청소년을 선도하는 ‘선교봉사’,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북미 칸타타 투어 등 문화행사를 돕는 ‘행사지원’ 그리고 한글과 태권도를 가르치는 ‘문화교류’가 그것이다.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한 첫날, 김지헌 지부장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여기에 있는 동안, ‘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정말 행복한 1년이 될 거야.” 지부장님의 그 말씀은 내가 캐나다에서 지내며 봉사를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우리는 캐나다인들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댄스와 합창 등 문화공연도 하고 아이티 영어캠프에서 함께 일할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도 진행했다.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는 현지인들 앞에서 사회를 보거나 영어로 행사를 소개하다보면 알던 단어도 생각 안 나 당황한 적도 있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뒷정리에 다음 날 행사 의논까지 하다보면 자정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시는 지부장님과 사모님의 도움과 격려 덕분에 그런 일들은 힘들다기보다 보람찬 기억으로 내 마음에 남았다.

원주민 캠프를 하기 2주 전쯤, 오타와에서각 지역의 원주민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원주민페스티벌이 있었다. 우리 캠프를 홍보하고 원주민문화를 체험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원주민 캠프를 하기 2주 전쯤, 오타와에서각 지역의 원주민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원주민페스티벌이 있었다. 우리 캠프를 홍보하고 원주민문화를 체험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부장님께서 캐나다 원주민 마을에 가서 그곳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캠프를 열기로 했다고 하셨다. 캐나다 원주민이란 우리가 흔히 ‘아메리칸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토론토 지부에서 캠프가 열리는 웨민지 Wemindji라는 도시까지는 무려 1,222킬로미터, 자동차로는 24시간이 넘게 걸린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캠프에 필요한 각종 물품과 프로그램들, 자원봉사자 모집 및 교육, 심지어 행사기간 동안 먹을 음식까지 모든 것을 빠짐없이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태권도 아카데미를 위해 인근 태권도장을 방문해 도복과 보호구를, 식료품 도매점을 찾아가 식품을 후원받기도 했다. 모두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분들을 만날 때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인터넷 펀딩사이트를 이용해 후원금도 모금하고, 페이스북으로도 캠프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캐나다 원주민 마을로 떠나던 날, 내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찼다. 그곳 사람들은 무슨 옷을 입고, 뭘 먹고 살까? 텐트 안은 또 어떻게 생겼을까?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 하는 노래도 생각났다. 어쩌면 멋진 깃털 모자를 쓴 추장과 기념사진을 찍게 되는 건 아닐까?

“어, 우리가 진짜 제대로 찾아온 것 맞아!?”

우리가 실제로 가서 본 원주민 마을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흔히 ‘인디언 텐트’라고 부르는 티피teepee 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우리가 사는 양옥과 비슷했고, 입고 있는 옷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웬만한 집은 차를 한 대씩 갖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동양인과 닮은 얼굴이 많아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이런 원주민 마을이 캐나다 전역에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간 웨민지라는 곳은 다른 마을에 비해 건물이나 도로 등이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특히 청소년센터와 체육복합시설도 상당히 잘되어 있어 놀랐다. 같은 원주민 마을이라도 외부의 문화와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곳은 변화와 발전이 빠르다고 했다.

태권도장을 방문해서 캠프 때 쓸 태권도 도복과보호구를 후원받았다.
태권도장을 방문해서 캠프 때 쓸 태권도 도복과보호구를 후원받았다.
원주민 마을로 가는 길에는 주유소가 없어 이렇게 휘발유를 따로 실어가서 중간중간 급유해야 한다.
원주민 마을로 가는 길에는 주유소가 없어 이렇게 휘발유를 따로 실어가서 중간중간 급유해야 한다.

캠프 시작을 이틀 앞두고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행사장을 마련하고 집집마다 찾아가 캠프 전단지를 나눠주며 초청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오는 학생들 중에는 눈이 빨개진 채로 나오는 청년들이 있었다. 알고 보니 마약인 마리화나를 피고나면 그런 증세가 나타난다고들 했다. 나중에 캠프를 하면서도 눈이 빨개진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직접 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술과 마약에 빠져 지내는 청소년들이 많아 문제라고 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원주민 마을에는 즐길 만한 문화시설도,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다. 어려서부터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과 주택에 기대 살아온 원주민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살다 술과 마약에 손을 댄다. 어쩌다 아이를 낳아도 관심을 갖지 않고 방치해 버린다. 청소년들 역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다시 술과 마약에 빠진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목동이 없는 양떼처럼 그들을 잡아주거나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슴 아팠다.

‘나 역시 가족의 사랑과 가르침, 간섭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저렇게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2016년 6월 27일, 한 달 동안 준비했던 원주민 캠프의 막이 올랐다. 지부장님은 마인드강연을 진행하셨고, 우리 단원들은 요리·종이접기·댄스·서예·체조 등 아카데미를 맡았다. 나는 태권도 아카데미 담당이었다. 진행을 도울 원주민 자원봉사자들도 이미 선발해 품새와 발차기도 가르쳐 두는 등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한 상태였다.

우리가 간 웨민지는 다른 원주민 마을에 비해 스포츠센터와 도로 등이 잘 갖춰진 곳이었다.
우리가 간 웨민지는 다른 원주민 마을에 비해 스포츠센터와 도로 등이 잘 갖춰진 곳이었다.
내가 맡은 태권도 아카데미 아이들과 함께.
내가 맡은 태권도 아카데미 아이들과 함께.

하지만 아카데미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원래 아이들은 무엇이든 쉽게 흥미를 잃는 법이다. 게다가 원주민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다스림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사는 삶이 몸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나 역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것보다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을 것 같은 내용들로 수업을 짰다. 프로그램 진행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아, 어쩌지? 이게 아닌데….’ 다른 아카데미들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가 있었다. 우리 단원들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공연도 준비해야 했다. 인원이 많지 않아 모두가 함께 준비해야 했는데, 몇몇 봉사자들은 “우리가 공연까지 해야 되냐?” 며 불만을 터뜨렸다. ‘아, 이런 상태로 더 이상 캠프를 진행할 수 있을까?’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첫날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가진 피드백 시간, 지부장님은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 우리는 원주민 학생들을 바꾸러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얘들은 안 바뀔 거야’ 하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싸우러 온 겁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엽시다.”

지부장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을 돌이켜보았다. 우리 마음에는 원주민 학생들을 향한 부정적인 고정관념들로 꽉 차 있었다. 다른 마을로 간 봉사단원들로부터 안 좋은 이야기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행사장에 학생들을 불러모았더니 “우릴 여기다 가둬 두려는 거냐?”고 항의하더라는 이야기, “왜 모르는 학생과 같이 자게 하느냐?”며 방을 물과 세제 범벅으로 해 놓은 채 방문을 부수고 달아났다는 이야기.

결국 우리는 생각을 바꾸었다. 원주민 학생들이 바뀌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 당장은 원주민 학생들이 캠프 스케줄을 잘 따라주지 않지만, 우리가 다시 ‘이 친구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마음을 열고 행사를 진행하면, 모두가 기쁘게 캠프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맙게도 자원봉사자들도 우리와 함께 다시 캠프를 진행하기로 했다. 캠프 스케줄도 약간 여유있게 조절하고, 레크리에이션도 원주민 학생들의 실정에 맞게 프로그램을 대폭 수정했다. 마인드강연도 강사들을 바꿔가면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진행했다.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자 원주민 친구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주민 마을에서도 수영 등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시간만 되면 몇몇 학생들은 ‘수영하러 가겠다’며 캠프에서 빠지려고 했다. 그런데 사흘 정도 지난 뒤에는 계속 캠프에 참가했다. 우린 함께 즐거워했고 어느 새 마음이 하나로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단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원주민 아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기로 하자, 신기하게도 캠프에 질서가 잡히고 분위기도 진지해졌다.
우리 단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원주민 아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기로 하자, 신기하게도 캠프에 질서가 잡히고 분위기도 진지해졌다.

행사기간인 7월 1일은 캐나다의 건국기념일이었다. 그날 캠프는 공연도 여러 가지를 준비해서마을 사람들을 초청해 마을 축제처럼 성대하게 치렀다. 7월 4일 폐회식 날에는 참가자들로 팀을 짜서 댄스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무대에 오른 학생들도, 그 학생들의 부모님들도, 무대를지켜본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감격한 공연이었다. 그 중에서도 ‘릴리아’라는 여학생은 친구들과 다투다 욕설을 듣고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런 릴리아가 밝게 웃고 춤추는 걸 보면서 릴리아를 걱정하던 부모님은 ‘우리 릴리아가 바뀌었다’며 너무 기뻐하셨다. 원주민 친구들과 함께한 그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눈부신 추억으로 남아 있다.

8일 간의 원주민 캠프는 그렇게 보람과 행복 가운데 막을 내렸다. 처음에는 우리를 경계하던 아이들이 마지막 날이 되자 먼저 우리에게 달려와 끌어안으며 “내년에도 꼭 와달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나는 다시 웨민지 마을로 가서 원주민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우리가 한 달 전에 가르쳐준 댄스를 기억하면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낯선 동양인에 불과하던 내가 그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통역과 함께 마인드강연을 하고 계신 굿뉴스코 토론토 지부의 김지헌 지부장님(왼쪽).
통역과 함께 마인드강연을 하고 계신 굿뉴스코 토론토 지부의 김지헌 지부장님(왼쪽).
우리는 원주민 아이들이 낯설었고, 원주민 아이들은외지에서 온 우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해져서 함께 어울렸다.
우리는 원주민 아이들이 낯설었고, 원주민 아이들은외지에서 온 우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해져서 함께 어울렸다.
우리는 원주민 아이들이 낯설었고, 원주민 아이들은 외지에서 온 우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해져서 함께 어울렸다.
우리는 원주민 아이들이 낯설었고, 원주민 아이들은 외지에서 온 우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며칠 안 되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친해져서 함께 어울렸다.

원주민 마을에서 얻은 추억은 지금도 내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갔던 그 원주민 마을에 또 가고 싶다. 다시 한 번 캠프를 열어 원주민 친구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면서 원주민의 전통과 문화를 배우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삶 어딘가에 남아 있을, 한때 북미 대륙을 호령했던 그들의 강인한 정신을 경험하고 싶다.

해외에 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나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더 넓은 세계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내 좁은 식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법을 배웠다. 원주민 친구들도 이제는 그런 마음의 세계를 배웠으면 한다.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얻어 더 넓은 시야와 깊은 사고를 갖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글|조영진(굿뉴스코 15기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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