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8일부터 12월 23일까지 국내 22개 도시를 돌며 43회의 공연을 펼친 그라시아스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 100여 명에 이르는 출연진들 가운데 관객들의 이목을 끄는 이가 있다. 외국인 배우 드렐 존스다. 그라시아스합창단 전속 배우이자 단원들의 연기 코치인 그는 어떻게 미국을 떠나 먼 한국까지 와서 칸타타의 대장정에 함께하고 있는 걸까?

 

 

배우 드렐 존스

미국 디트로이트 주의 웨인 주립대에서 연기와 무용을 공부했다. ‘아라비안 나이트’ ‘헤어스프레이’ 등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했으며, 2013년부터 그라시아스합창단의 연기를 지도하는 한편, 부활절 칸타타와 크리스마스 칸타타에 배우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드렐은 100여 명의 그라시아스합창단(이하 그라시아스) 단원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배우다. 단순히 외국인이어서만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1막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연했다가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헤롯 왕궁의 무용수로 등장해 날렵한 춤솜씨를 선보인다. 2막에서는 말괄량이 소녀 안나의 장난에 골탕을 먹는 동네 경찰관으로 등장해 관객의 폭소를 자아낸다. 중간중간 한국어 대사 처리도 눈을 감고 들으면 원어민과 구분이 안 될 만큼 매끄럽다.

‘저런 배우는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걸까?’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케줄이 너무도 빡빡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는 26일 동안 22개 도시를 순회하는 강행군이다. 공연이 끝나면 바로 짐을 싸서 다음 공연지로 이동한다. 잠도 버스 안에서 쪽잠으로 해결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먹고 자며 싸워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기병이 떠오른다. 다행히 지난 12월 17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사흘 연속 공연이 잡히면서 스케줄에 여유가 생겨 그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2017년 7월 한국 월드캠프에서 댄스공연 ‘행복’을 선보이는 드렐.
2017년 7월 한국 월드캠프에서 댄스공연 ‘행복’을 선보이는 드렐.

원하던 연기도 하고 돈도 벌었지만 공허했던 마음

드렐은 어려서부터 연기를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를 외워 두었다가 따라하면서 놀았고, 때로는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가족들 앞에서 연기를 펼쳐 웃음을 선사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트럼펫에 푹 빠졌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묻어둘 수는 없었다.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때 연주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늘 무대 위를 향해 있었다.

‘아, 나도 저기 무대에 올라가서 저 사람들이랑 같이 공연하고 싶다.’

고3 때 그는 선택과목으로 아동연극children’s theatre을 골랐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연극을 통해 ‘남을 괴롭히지 마라’ ‘부모님께 솔직해야 한다’와 같은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수업이다. 한번은 ‘잭과 콩나무’를 공연했는데 황금알을 낳는 암탉 역을 맡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악단에서 트럼펫 연주를 하면 장학금을 주겠다는 대학들이 많았지만, 더 이상 트럼펫은 연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대학에서 수학과 공학을 전공했다. 1학년을 마치고 캠퍼스를 걷다 그는 문득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내가 정말 공학자가 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고속도로나 다리를 건설하거나 수학을 가르치는 삶이 내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니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그는 연극영화과 사무실로 달려가 전공을 연극영화로 바꾸었다. 2년 동안 연기의 전반을 배우고, 2년 동안 실제 공연팀에 들어가 실제 연기를 익히는 게 연극영화과의 과정이었다. 2년 공부를 마치고 드렐은 공연팀에 들어갔다. 공연팀에 들어간 학생들은 모두 어릴 때부터 연기를 배워온 학생들이었다. 드렐은 열아홉 살 무렵에야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으니 아주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실력이 늘기 시작했고, 각종 공연 오디션에도 합격해 여러 연극에 출연했다. 대학에서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기도 했고, 돈도 많이 벌면서 쇼핑도 하고 친구들과도 만나 어울렸지만 그의 마음에는 뭔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늘 있었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2막에서 꼬마들에게 골탕먹는 경찰관으로 등장한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2막에서 꼬마들에게 골탕먹는 경찰관으로 등장한다.
2016년 베냉 영어캠프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2016년 베냉 영어캠프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나는 다만 그들의 마음속 기름에 불을 지펴줄 뿐이다

그렇게 지내던 2011년의 어느 날, 그는 국제청소년연합 IYF 디트로이트 지부장을 만났다가 뉴욕에서 열리는 월드캠프에 참석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 뉴욕 월드캠프에서 그는 생전처음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공연을 보았다.

“칸타타 공연은 굉장히 아름다웠어요. 마치 천사가 노래하는 것 같았지요.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놀라고 감격스러웠어요. 2막에서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도 감동적이었어요.”

캠프를 마치고 디트로이트로 돌아온 그는 IYF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아이티 영어캠프와 멕시코 영어캠프에도 교사로 참석해 현지인들에게 영어와 노래, 춤을 가르쳤다. 졸업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고민에 빠졌다. 미국의 배우지망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 진출을 꿈꾼다. 드렐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내가 배우로 성공할 수 있을까?’ 확신은 없었지만 도전이라도 해 볼 작정으로 뉴욕으로 갔다.

“한번은 IYF 뉴욕 지부장님을 만났는데 ‘그라시아스에서 연기 선생님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깜짝 놀랐지요. ‘왜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하시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었거든요. 결국 2013년 여름에 디트로이트에서 뉴욕으로 이사 와서 그라시아스와 함께 일을 시작했습니다.”

2015 독일 마르크트오버도르프 국제합창제에서 최고상을 차지하는 등 세계 최정상의 기량을 갖춘 그라시아스합창단. 부활절 칸타타 리허설을 앞둔 단원들 앞에서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환희와 감동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이후 드렐은 그라시아스의 크리스마스 칸타타 미국 순회공연을 따라다니며 연기를 지도했고, 한국 칸타타 공연도 함께 준비했다. 세계 최고의 합창단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고, 공연도 매일같이 볼 수 있어 기뻤다고 한다.

“단원들의 연기 코치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제가 단원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습니다. 그라시아스와 함께하면서 감동받은 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공연이 끝나면 단원들이 스태프와 함께 무대를 해체하고 소품과 의상을 포장하는 걸 보며 놀랐습니다. 제가 봤던 배우들은 공연이 끝나면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가거든요. 둘째, 그라시아스는 가수와 배우, 스태프가 모두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기량을 갈고닦습니다. 마지막으로 계속 큰 무대에 서면서도 겸비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그런 합창단과 한마음으로 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칸타타 1막에서는 궁중 무용수로 출연해 날렵한 춤솜씨를 선보인다.
칸타타 1막에서는 궁중 무용수로 출연해 날렵한 춤솜씨를 선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그라시아스 단원들의 연기를 어떻게 지도할까? 드렐은 단원들이 저마다 내면에 품고 있는 진실된 연기를 밖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라시아스는 가수와 배우, 스태프가 모두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 합창단과 한마음으로 일할 수 있어 기쁩니다.”

“연기에 있어서 중요한 건, 테크닉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걸작은 마음에서 만들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상상력이나 감정과 같은 마음의 기름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것은 그 기름에 불을 붙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불은 에너지가 되고, 배우는 그 에너지로 자신을 태우고 무대를 채워야 합니다. 그 에너지가 전해질 때 관객은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O. 헨리의 소설을 각색한 칸타타 2막 ‘크리스마스 선물’에서는 출판사 사장으로 익살스런 연기를 펼친다.
O. 헨리의 소설을 각색한 칸타타 2막 ‘크리스마스 선물’에서는 출판사 사장으로 익살스런 연기를 펼친다.
“경찰아저씨!” 칸타타 2막이 끝날 즈음에는 말썽쟁이 동네 꼬마들과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된다.
“경찰아저씨!” 칸타타 2막이 끝날 즈음에는 말썽쟁이 동네 꼬마들과 다정한 친구 사이가 된다.
형과 어머니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
형과 어머니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

그라시아스가 아니었다면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

인터뷰 내내 그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라시아스가 아닌, 원래 자신의 목표대로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그런 큰 무대에 가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배우로서 커리어도 쌓을 수 있고, 돈과 명성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라시아스와 함께 공연하면 사람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라시아스의 공연장르는 클래식에서부터 민요, 팝송까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탄생을 소재로 한 크리스마스 칸타타는 그라시아스를 대표하는 공연이다. 그가 한번은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제작자를 칸타타에 초청한 적이 있다. 관람을 마친 그는 “브로드웨이에도 대작 쇼나 공연이 많지만 이렇게 깊이 있고 풍요로운 이야기는 아주 드물다”는 소감을 남겼다.

2017년 북미 크리스마스 칸타타 투어는 드웰이나 그라시아스 단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특히 공연을 2주 정도 남겨놓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총기난사로 59명이 죽고 53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공공장소에서 하는 칸타타를 보러 올까?’ 하고 모두들 걱정하는 분위기였지만, 4,500명의 시민들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그라시아스의 음악에 눈물과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칸타타가 총기난사 사건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라시아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연기를 했다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 연기가 만든 결과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감동을 주진 못했을 거예요.”

“내게 있는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 그래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지요.”
“내게 있는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 그래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지요.”

물론 드웰이 공연이나 연기 지도만 한 것은 아니다. 베냉, 자메이카, 아이티, 멕시코, 토고, 가나, 코트디부아르 등 여러 나라의 영어캠프와 청소년캠프에 가서 영어와 노래, 춤을 가르치고 마인드강연도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가 가장 자주 쓴 단어는 바로 ‘행복’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이란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게 있는 뭔가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 그래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지요.”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온갖 표정과 제스처를 섞어가며 막힘없이 술술 풀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점심도 거른 채 촬영을 끝낸 그는 ‘이제 공연장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모처럼 생긴 두 시간의 자유를 그는 기자들을 위해 할애해 주었다. 아낌없이 나눠주는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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