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춘 나라, 이집트. 그 이집트의 대사답게 셀림 대사는 한국의 문화유산에 숨은 정신적 가치를 간파할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아쉽게도 지난 10월 15일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이집트로 떠난 셀림 대사. 그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이 기다려진다.

본지 기자들이 주한 외교관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빼놓지 않는 질문이 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국민들이 부지런하고 친절한 나라’ ‘한 달만 해외에 다녀와도 몰라볼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 ‘세계적인 IT 강국’ 등의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하니 셀림 대사는 자신이 처음 한국에 와서 겪은 에피소드로 답변을 대신했다.

“저는 현재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많이 편찮으셔서 제가 대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있어 여러 번 큰 병원에 모시고 가야 했습니다. 물론 도우미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제가 직접 모시고 가고 싶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고 창피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인들은 대사가 직접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어드리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병원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부담이나 창피한 감정들이 사라졌습니다. 100명도 넘는 젊은이들이 부모님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휠체어를 밀고 있었거든요. 그 광경은 너무나 큰 감동이었고, 제 마음도 편해졌습니다. 어른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예절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셀림 대사는 여러 개발도상국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산업화 및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어른에 대한 공경, 상대를 위한 배려, 이웃 사랑 등의 가치관을 잃어버리는 점을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이런 전통적인 가치관이 지켜지는 것을 보며 내심 몹시 반가웠다고 한다.

 

‘지식의 나라’ 이집트 대사가 첫 손에 꼽은 한국문화?

셀림 대사는 한국 전통문화의 대표격인 김치에 대해서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김치는 더 이상 한국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중에는 김치에 맛을 들인 이들을 생각 외로 어렵잖게 만나볼 수 있다. 본지 10월호에 소개된 토마스 리만 덴마크 대사도 김치를 즐겨 먹는, 소문난 한국 음식 마니아다. 그런데 셀림 대사는 ‘김치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문화유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라면 단연 김치입니다. 김장을 할 때면 온 가족이나 이웃 등 모두가 한데 모이잖아요? 김장을 할 때 만든 음식들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김치는 이처럼 음식을 넘어 한국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적 장치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서울대, KAIST, 이화여대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에서 문화를 주제로 강연한 적이 있을 만큼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식견은 보통을 넘는다. 그래서인지 한국 문화에 이어 화제는 금방 이집트 문화로 넘어갔다. 주한 이집트 대사관 벽에는 ‘지식의 나라 이집트Egypt is the land of knowledg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적절한 표현이다. 이집트의 상징인 피라미드 중에서도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한 변의 길이가 365.23인치로 1년의 날 수와 같으며, 높이는 137미터로 지구-태양 거리의 10억 분의 1이 되는 등 온갖 수학적, 천문학적 비밀이 감춰져 있다. 규모도 엄청나 지금도 재현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훌륭한 치과의사이자 외과의사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미 마취제를 개발해 대수술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밖에 다른 의학기술도 뛰어났고, 약초를 이용해서 병을 치료했습니다. 세계는 고대 이집트의 의학기록을 연구해서 많은 성과를 얻었고, 그 중에는 중세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쓰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 65주년 이집트 건국기념일 행사에서 연설하는 셀림 대사.
지난 7월 23일, 65주년 이집트 건국기념일 행사에서 연설하는 셀림 대사.

한국-이집트 관계가 증진되는 것이 가장 큰 보람

‘문화야말로 나라와 나라 간의 교류를 여는 관문이며, 무역 및 산업 교류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게 셀림 대사의 지론이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고대 이집트 공예품 전시회 ·예술사진전 ·이집트 석학 초청 강연 등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대사로 일하면서 문화 교류사업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경제, 기술, 외교, 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도모했다.

 

셀림 대사가 소개하는 이집트

세계사 속의 이집트 이집트를 관통하는 나일 강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한 곳이며,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점차 국력이 쇠퇴하면서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이후로도 그리스, 로마, 에티오피아, 유럽 등의 지배를 받았다. 이는 북아프리카의 중심지이자 유럽-지중해-아프리카를 잇는 길목에 자리잡은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되었다.

수에즈 운하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는 총길이가 무려 192km에 달한다. 지중해와 홍해를 오가는 배들이 운하를 통과하면 먼 아프리카 항로를 돌아갈 필요가 없어 보름에서 한 달 가량의 이동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된다. 배 한 척당 평균통행료는 25만 달러(2억 5천만 원)에 이르며, 이 통행료는 관광수입, 재외근로자의 송금 수입과 함께 이집트의 3대 외화원이다. 2008년 통과료 수입은 총 53억 달러(5조 3천억 원)라고 한다.

 

2011년 혁명 1981년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무바라크 부통령은 이후 2011년까지 철권 통치를 유지했다.

특히 2010년 11월 치러진 총선에서는 전체 518석 중 420석을 여당이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010년 12월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 소식이 SNS를 타고 전해지면서 자극받은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무바라크는 퇴진하기에 이른다. 이후 2014년 6월 대선에서 국방장관 출신의 엘시시가 당선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 부임 전, 이집트 외교부에서 동아시아 파트를 담당했어요. 이집트에는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과 제휴해서 설립한 기술대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선 기술력을 갖춘 한국과 제휴한 과학기술대학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 관련기관에 대학 설립을 요청했고, 한국이 538만 달러, 이집트가 100만 달러를 부담해 ‘베니수에프’ 지역에 대학을 설립하기로 확정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셀림 대사는 2016년 3월 이집트 ‘압델 팟타 엘시시’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일을 지난 대사로 근무하는 동안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로 꼽았다. 외교관에게 있어 자국의 최고 지도자가 자신이 근무하는 나라를 찾는 일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영광이다. 그는 ‘엘시시 대통령의 방한은 17년 만의 이집트 대통령 방문’이라는 점 외에도 한국과의 경제교류 확대, 문화협력 증진 등 실질적인 협력 방안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뜻깊었다고 말했다. 셀림 대사는 문화로 상대와 대화의 물꼬를 트고,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의 원칙에 따라 양측의 입장과 이익을 모두 배려하는 노련한 외교관이었다.

 

해군 장교를 꿈꾸던 소년이 외교관이 되기까지

기자들이 셀림 대사를 만나러 이집트 대사관을 찾은 것은 9월 29일,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연휴 때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냐?’는 질문에 그는 ‘한국을 떠날 짐을 꾸릴 예정’이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주한 대사의 임기는 통상 4년 안팎이다. 2013년 11월 부임한 그는 10월 15일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처음 대사로 부임하면서 계획했던 문화교류 행사를 다 치르지 못해 아쉽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후회한다고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본국에 돌아가면 어떤 보직을 맡을지 결정된 건 없지만, 무엇을 하든 이집트와 이집트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원래 셀림 대사의 꿈은 해군에 입대해 장교가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11살 무렵, 뜻밖에도 심한 근시가 찾아오는 바람에 그 꿈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시력이 약한 것과 상관없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를 고민하던 그는 외교관이 되기로 했다. 고교 때부터 정치학과 진학을 목표로 삼고, 정치학과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점수를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교과서의 이름 적는 칸에도 ‘정치학과 재학생 하니 셀림’이라고 적었을 만큼 그의 꿈은 진지하고 간절했다. 결국 그는 정치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외교부에 입부해 지금까지 외교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제가 올해 54세입니다. 이집트로 돌아가면 외교부에서 2년을 근무하고, 다시 대사로 해외에 나가 4년을 더 근무한 뒤 60세에 정년 퇴임할 예정이에요. 퇴임한 뒤에는 그동안 바빠서 읽지 못한 책들을 맘껏 읽을 계획입니다. 그전까지는 열심히 일해야죠.”

아이를 많이 낳는 여느 이집트 가정들과 달리, 그는 외동아들로 태어나 외로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책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여섯 살 때부터 동화와 소설로 독서를 시작한 그는, 12~3세 때부터는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책을 읽는 데 보낸다. 그는 ‘여러분이 하는 공부나 일에 대한 지혜와 통찰을 얻고 싶다면 꼭 책을 읽으라’고 강조했다. 참고로 그는 읽을 책 여러 권을 정해놓고 요일별로 돌아가며 읽는 다소 특이한 독서벽을 갖고 있다.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내빈들과 함께한 찍은 셀림 대사와 대사 부인 니할 셀림 여사(왼쪽에서 네 번째).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내빈들과 함께한 찍은 셀림 대사와 대사 부인 니할 셀림 여사(왼쪽에서 네 번째).

인생을 걸 가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라

셀림 대사 가족이 거주하는 공관公館은 대사관 바로 윗층에 있다. 그래서 셀림 대사는 특별한 스케줄이 없을 때면 가족과 함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셀림 대사의 부인 니할 셀림 여사는 주한 외교관들 사이에서 남편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그녀는 주한외교관배우자협회 회장과 서울국제여성협회 이사로 활동한 바 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한국의 전직 외교부 장관 및 외교관들을 모아 ‘외교단 합창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여러 해 전, 저는 중국의 이집트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두 분의 대사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사모님이 함께 생활하지 않으셔서 각종 연회나 행사 때면 저희 아내가 대신 안주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방면에 달인이 되었고, 한국에 와서는 주한외교관배우자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숙명여대 명예교수로 세 학기 동안 이집트에 대해 강의하기도 했는데요. 지금은 대사인 저보다 더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셀림 대사의 아들은 유난히 한국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다. 지난 2월 연세대 글로벌 MBA 과정을 수료하고 한국에 정착할 계획인 그는 현재 취업준비에 한창이다. 덕분에 셀림 대사도 ‘비록 이번에 한국을 떠나지만 아들이 한국에 있어 한국을 다시 찾을 일이 많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셀림 대사의 부인 니할 셀림 여사가 결성한 ‘주한 외교단 합창단’의 공연모습.
셀림 대사의 부인 니할 셀림 여사가 결성한 ‘주한 외교단 합창단’의 공연모습.

“독자 여러분께 두 가지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목표를 정하기 바랍니다. 단, 여러분의 인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그 일에 영혼을 담을 수 있고 앞서갈 수 있습니다.”

하니 셀림 대사는 출국 전까지 정신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인터뷰 며칠 전까지는 방한한 이집트 국방부 장관 일행을 수행하느라 분주했고, 며칠 뒤에는 다른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자들의 질문 하나하나에 성실히 답하며, 추석선물로 이집트 초콜릿까지 건네는 등 여유를 잃지 않았다. 사려 깊고도 다정다감한 그를, 한국에서 다시 볼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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