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언제 소변을 가리는가?
어린 아이들이 옷을 입은 채로 오줌을 싸다가 가릴 때가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소변을 가리라고 가르치기 시작해서 아이가 소변을 가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데, 아이 마음에서 싸움을 하는 시간이다.

한번은 나와 가까운 어느 대학생과 절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렇게 물었다. “자려고 이불 위에 누웠는데 소변이 마려워. 그러면 그대로 소변을 보기도 해?” 그러자 그 친구가 “귀찮아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뒤처리하는 게 더 힘드니까 귀찮아도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죠.”라고 했다. 옷을 입을 채로 소변을 보았을 때 편한 점이 있고, 불편한 점이 있다. 그 두 가지 사실이 마음에서 부딪혀 더 크게 여겨지는 쪽을 근거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에서도 같은 싸움이 일어난다. ‘귀찮으니까 그냥 옷 입은 채로 오줌을 누자’는 마음과 ‘그랬다가 엄마에게 회초리로 맞아서 아팠으니까 귀찮아도 화장실에 가자’는 마음이 싸우는 것이다. 첫 번째 마음이 이기면 다섯 살이 되어도 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두 번째 마음이 이기면 두 살이어도 소변을 가린다.

미국의 TV 프로그램 <비욘드 스케어드 스트레이트Beyond Scared Straight>의 한 장면.청소년 갱생을 소재로 했으며 유튜브에서 ‘에단의 교도소 체험’으로 검색해 볼 수 있다.
미국의 TV 프로그램 <비욘드 스케어드 스트레이트Beyond Scared Straight>의 한 장면.청소년 갱생을 소재로 했으며 유튜브에서 ‘에단의 교도소 체험’으로 검색해 볼 수 있다.

마음의 기저귀를 차고 살 것인가?
아이가 소변을 가릴 능력이 없는 아주 어릴 때에는 기저귀를 채운다. 오줌을 싸도 문제가 최소화되도록 대책을 세워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저귀’는 ‘약함을 용납해 주는 도구’이다. 몸에 이상이 없는 어른들 가운데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에서는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부분을 마음에서 용납해 주면서 사는 것이다.

물을 아끼자, 전기를 아끼자, 시간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을 것이다. 사실 수돗물을 콸콸 쏟아지게 틀어놓고 사용하는 것이나 중간 정도로 나오게 틀어놓고 사용하는 것이나 수도세가 그렇게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다. 형광등을 얼마 더 켜놓았다고 해서 전기세가 아주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잘못된 마음을 꺾을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을 마음껏 쓰고 싶은 마음, 공공장소에서 불필요한 전깃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려는 마음, 약속 시간에 조금 늦으려는 마음을 다스리고 꺾는 것이 가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훈련이 된다. 이 모든 일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싸움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큰 가치를 갖는 것이다

통제인가, 자유인가?
미국에 ‘교도소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문제가 있는 학생들에게 교도소를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면 몸에 문신을 한 덩치가 큰 험상궂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철창 안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빨리 들어오라고 소란을 피운다. 학교에서는 제멋대로 사는 배짱 좋은 아이들이지만 그런 상황에 들어가면 겁을 집어먹는다. 교도관들이 그 아이들을 철창 안으로 밀어넣고는 문을 닫아버리면 아이들이 대부분 바닥에 쓰러져 울면서 제발 꺼내 달라고 애원한다고 한다.

자유에는 통제가 따른다. 즉,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다. 그 통제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통제를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자기에게 유익해 보이면 해서는 안 될 일이라도 해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교도소다.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많은 것을 통제받으면서 사는 것이다. 교도소에서도 통제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거하는 곳이 독방이다.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 만큼 점점 속박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의 제도에 의한 통제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며, 본질적인 통제와 자유는 우리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마음을 통제하며 사는 것,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사회 제도에 의해 통제를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자유롭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마음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밝고 아름다운 마음에 의해 통제를 받지 못하면 어둡고 더러운 마음에 갇혀서 살아야 한다. 하기 싫어도 미움을 품고 지내며 하고, 떨쳐내고 싶어도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야 한다.

노예로 살 것인가, 다스리며 살 것인가?
미움이나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사는 것이 좋은가, 그것들을 다스리면서 사는 것이 좋은가? 돈의 노예로 사는 것이 좋은가, 돈을 다스리면서 사는 것이 좋은가? 우리 마음에서는 언제나 어떤 일에 굴복하려는 마음과 이기려는 마음의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돈이 우리를 협박한다. “너, 나 없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내가 없으면 사는 게 어려워. 그래도 나를 따라오지 않을 거야?” 거기에 져버리면 돈의 노예가 된다. 돈이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할 때 ‘나는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너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하며 싸워서 이겨야 한다. 돈에게 사로잡히면 돈의 노예가 되고, 이기면 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저귀를 차지는 않았지만, 마음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것들을 다스리지 않고 용납해 주는 ‘마음의 기저귀’를 차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좋지 않은 욕구들에 사로잡혀서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내 자유를 왜 통제합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는데 뭐가 문제입니까?”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를 잃고 어딘가에 점점 갇히고 어떤 일에 점점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내가 다스리거나, 다른 사람의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밝게 살지 못해도, 밝은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내 마음에 있는 어두운 것들이 그 밝음에 의해 다스려진다. 세상에는 이런 지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다스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밝은 누군가를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의 힘에 의해서 태만이나 악한 욕구들을 꺾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내가 그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잘못 생각하면, 밝고 좋은 다스림을 구속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 다스림을 벗어나면 어둡고 고통스러운 세계에 갇힌다. 그렇기 때문에 다스림은 구속이 아니라 참된 자유를 지켜 주는 보호 장치다. 절제와 다스림은 자유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하며, 어떤 것에 노예가 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면서 살게 해준다.

누구나 잘못된 길을 걷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도 있다. 두 마음이 싸울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의해 삶의 모양이 결정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자유를 잃은 채 살고,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유를 누리면서 산다.

자유롭게 살겠다며 무엇인가에 사로잡혀서 그 종이 되어 사는 것보다, 그것을 다스리면서 사는 삶이 훨씬 자유롭고 행복하다.


문영준/ 월간 투머로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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