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부룬디 청소년체육문화부 장관 이티마나 장 보스코

거듭된 내전으로 오랫동안 정체기를 겪어온 나라, 부룬디. 하지만 조국과 청년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며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리더들이 있어 부룬디의 내일은 희망차다. 청소년체육문화부 장 보스코 장관도 그 중 한 명이다.

 

부룬디도 예외는 아니다. 부룬디 인구의 85%를 차지한 것은 후투족이지만, 1962년 독립 후 1993년까지 부룬디를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은 인구의 15%에 불과한 투치족이었다. 두 민족 간의 다툼으로 부룬디에는 1965, 1969, 1972, 1988, 1991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대학살이 벌어졌다. 보스코 장관도 1972년 대학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나라나라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은 대부분 기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대항해 시대로 불린 15~18세기, 유럽 열강들은 앞다투어 배를 타고 아프리카로 건너와 상아, 황금 등 자원을 약탈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1880년대부터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4년까지 아프리카는 유럽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다수의 나라들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를 기점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은 하나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60년 넘게 지난 지금도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은 부족 간 갈등, 낙후된 경제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제 나이가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댁에 맡겨져 자랐지요. 아버지 없이 크는 설움을 겪으면서 제게는 두 가지 꿈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것, 또 하나는 장관이 되어 민족 간의 다툼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야무진 꿈에도 불구하고 부룬디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1993년 멜키오르 은다다예가 후투족 최초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투치족 군인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를 계기로 25만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이웃국가로 탈출하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2000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두 부족 간 갈등은 어느 정도 수습되었지만, 내전이 남긴 상처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한국처럼 과거 부룬디에도 노인이 버스를 타면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기본예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내전을 거치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어지면서 그런 풍속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문화센터를 짓고 인성교육을 실시해서 잃어버린 옛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장관으로서 제 꿈입니다.”

장 보스코 장관은 지난 7월, 한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참석해 19개국의 장관들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는 길에 대해 모색했다.
장 보스코 장관은 지난 7월, 한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참석해 19개국의 장관들과 함께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는 길에 대해 모색했다.

보스코 장관은 현재 청소년체육문화부를 이끄는 수장이다. 담당하는 업무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 보스코 장관의 지인이나 선배공무원들은 그를 ‘체육부 장관’으로만 기억하고, ‘남는 축구공 있으면 하나만 달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마음을 쏟는 분야는 단연 청소년 관련 업무다. 부룬디의 청소년 인구 비율 역시 전체 인구의 약 65% 정도로 높은 편이다. “국가예산 중 체육 분야에 투입되는 예산이 상당합니다. 하지만 저는 청소년 관련 분야에 더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과거 부룬디는 부족간 갈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지만,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평화로운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요. 그런 부룬디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훌륭한 아버지, 그리고 장관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던 일곱 살 소년은 어느덧 꿈을 이룬 쉰둘의 중년 신사가 되었다. 하지만 안주하지 않고 행복한 나라를 후 손에게 넘겨주겠다는 새로운 꿈을 품고 전진하고 있다. 그 행보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크든 작든 분명 아름다운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부룬디에서 귀화한 한국인이 있다?

부룬디 국가대표 마라토너 출신인 '부징고 도나티엔Buzingo Donatien'이 그 주인공이다. 2003년 8월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그는 조국에서 터진 내전 때문에 오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UN으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후 국내외에서 열린 30여 차례의 마라톤에서 우승. 2010년 귀화시험에 합격해 현재 창원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 이름은 김창원이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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