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발견’

낯선 언어,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을 보면 더욱더 초라하고 볼품없을 것입니다.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15기 단원 중 강전은, 김희연, 이제원 씨도 움츠린 가슴으로 한국을 떠나 대만, 아이티, 에티오피아에 각각 도착했는데, 신기하게도 날이 갈수록 달라져 갔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보고 느끼는 게 달라지면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들의 순위가 뒤바뀐 세 젊은이를 만나봅니다.

대만

중요한 건 연습이 아니야

글 | 강전은

 

대만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는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더 좋았다.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먼저 다가와 도와주었고, 사소한 부탁도 친절하게 들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 나였지만 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봉사하러 간 나에게 그들이 보여준 사랑이 너무 컸기에 그때 받은 감동을 글로 적어본다.

 

“연습하지 말고 이야기를 더 많이 하세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 ‘봉사자의 날’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시상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우리는 여러 가지 댄스를 준비하기로 했는데, 인원이 모자라 현지 친구들과 같이 준비했다. 중국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같이하면 현지 친구들과 더 친해질 수 있고 어학 실력도 많이 향상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 기대와 달리 연습이 재미있지 않았다. 공연 날은 다가오고 댄스의 완성도는 못 미쳐서 우리는 급한 마음에 연습에만 매진했다. 현지 친구들은 나에게 “전은아, 나는 이 댄스가 너무 어렵고 힘들어. 내가 댄스 팀에 방해만 되는 것 같아.”라고 자주 말했다. 그러면 “괜찮아, 처음 하는 것 치고 정말 잘하고 있어.”라고 일단 임기응변으로 받아 넘긴 뒤 계속 연습하기에만 급급했다. 이런 문제는 현지 친구들 뿐만 아니라 우리 단원들 사이에도 있었다. 서로 서운한 일도 많고 오해하는 부분도 있어서 자주 말다툼을 했다. 더 이상 공연 연습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평소 지부장님이 말씀하신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났다.

“전은아, 애들이 연습을 하러 오면 이야기를 많이 해라.”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시간도 없는데 왜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지?’라고 생각하며 지부장님의 말을 대충 넘겼다. 그런데 행사가 임박해 지부장님 말대로 하려니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혼자 잘하는 사람’에서 ‘흐르는 사람’으로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댄스 연습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각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댄스를 못해서 팀에 피해를 입히는 것 같아 고민인데, 그래도 너희와 같이 연습을 하면서 친해지니가 너무 좋아.”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댄스 연습을 하러 오려면 사장님께 매번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그게 부담스러워.”

현지 친구들의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늘 댄스를 빨리 끝내려고만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친구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다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마음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열심히 댄스 연습을 하지 않았어도 즐거웠고, 더 편했고, 마음이 하나로 흐르는 걸 느끼며 가까워졌다. 행사 당일에 무대 위에서 공연을 썩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공연이 너무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나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굿뉴스코 봉사단워크숍을 할 때, ‘물은 수도관을 통해 흐르고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흘러와 불이 켜지듯이 사람의 마음은 마음을 통해 흘러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서 잘하는 사람이었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바쁘시면 늘 혼자 알아서 챙기고,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공부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고, 스스로 일을 잘 처리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대만에 와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대화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진심이 말에 묻어나와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너무 신비로웠다. 겉으로 잘하는 척하며 살아온 ‘어리숙한’ 내 마음을 성장시켜 준 대만에서의 시간이 기억에 깊이 남는다.

 

아이티

잿빛 아이티 행복샐깔로 보게 한 키에라

글 | 김희연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미국 단원들은 아이티의 학생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전해 주려는 취지에서 영어캠프를 개최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티에 가기 싫었다. 아이티는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에 영어로 소통이 어렵고, ‘그런 학생들에게 내가 과연 잘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밀려오는 부담감이 컸다.

나는 아이티에 가기 전날까지도 울고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이티 사람들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겠다’ 싶어 더욱 가고 싶지 않았다. 지부장님께서는 어두운 내 얼굴을 살피시더니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은 몸이 있고 마음이 있어. 너는 지금 마음이 약해져 있어. 그래서 피하고 싶고 가기 싫은 거야. 한번 가보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어. 가보지도 않고 미리 걱정부터 하지마. 힘들면 울기도 하면서 부딪쳐 봐. 네가 할 수 없을 때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도움을 받으면 돼.”

마음에 가득했던 짐을 털어버리고 나니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가뿐해진 마음으로 아이티를 향해 떠났다.

 

아이티 영어캠프, ‘정말 쉽지만은 않구나.’

아이티는 그야말로 ‘크레이지 핫crazy hot’이었다. 도로 위를 제멋대로 다니는 자동차들, 힘없는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무너진 건물들….

2010년 대지진 후 몇 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이티 IYF 센터에 도착해 댄스연습을 하고 있는데 아이티 어린이들이 큰 눈을 반짝이며 뛰어들어왔다. 방과 후에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이 센터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동양 사람의 긴 머리카락과 일자로 찢어진 눈이 신기했는지 가까이 와서 우리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현지인 머리처럼 땋아 주기도 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간단한 율동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동작이 우스꽝스러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아이티에 정말 오기 싫었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우리를 기쁘게 맞아 주었다.

영어 캠프 행사장소에 도착해서 보니 ‘이게 학교 건물인가?’ 싶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런 건물에서 많은 아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학생들을 배정받은 반으로 데려다주고 자리에 앉히는 일부터 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순간순간이 전쟁 같았다.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가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영어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러 온 건데 왜 이렇게 우리 마음을 몰라줄까?’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기뻐하며 맞아주었던 현지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은 점점 내 마음에서 잊혀졌고 슬슬 짜증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키에라의 숨겨진 꿀단지는 바로 나였다

우리 반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키에라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특히 그 아이가 나를 정말 화나게 했다. 키에라는 수업 시간마다 들락날락 하면서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며 수업을 방해했다. 밖에서 노랫소리만 들리면 나가서 놀자고 나에게 떼를 썼다. 열네 살임에도 키에라는 힘이 무척 셌다. 하루는 키에라가 교재를 잃어버리고 다른 교실에 앉아 있는 걸 보고, 내 불쾌지수가 최고점에 다다랐다. 우리 반 학생들도 모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고, 교실에 두 명만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제멋대로 가버린 상황에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 힘든데, 자초지종을 모르는 지부장님마저 나보고 왜 아무것도 안하며 놀고 있냐면서 책망하셨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평소 모임 때마다 지부장님이 주위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순간 그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그들의 마음을 모른 채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키에라의 마음을 전혀 몰랐던 나는 키에라에게 “수업을 방해할 거면 여기 있지 말고 혼자 나가서 놀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키에라는 계속 내 수업에 왔다. 나 같으면 기분 나빠서 안왔을 텐데, 왜 계속 오는 거지? 숨겨둔 꿀단지라도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키에라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학생들의 반을 다시 나눌때도, 수업시간에도, 수업을 마친 후에도 키에라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같이 놀자고 떼를 썼다. 갑자기 전구에 불이 켜지듯, 키에라의 꿀단지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서 따라다닌 거구나!’ 나는 키에라의 마음을 몰라서 계속 짜증만 낸 것이었다.

키에라에게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어린 키에라가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거구나. 내 눈 앞에서 이렇게까지 표현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무시하고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키에라를 통해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내 자신을 보게 되어 무척 부끄러웠지만 늦게라도 키에라의 마음을 알게 되어 감사했다.

캠프 마지막 날 우리 반이었던 학생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때 키에라가 나에게 했던 말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매일 수업을 방해하고 화나게 해서 미안해. 나는 희연이를 정말 좋아해. 여기 와줘서 고마워. 내년에도 또 와줄래?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키에라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마음을 몰라서 막무가내로 혼내려고만 했던 이기적인 나를 이해해주고 기다려준 키에라. 내가 혼낼 때마다 섭섭했을 텐데 키에라는 끝까지 사랑으로 다가와 주었다. 키에라의 마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키에라 덕분에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키에라와 마음으로 만나니 그 아이가 가진 사랑이 내 마음에 얼마나 따스하게 스며들던지.... 아이티는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것을 가진 나라였다.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따뜻함이 묻어있는 나라. 언젠가 다시 돌아가 키에라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

 

에티오피아

마음 속 표창장을 내버리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글 | 이제원

 

우리 가족 중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다. 바로 지체장애 1급으로 태어난 우리 형이다. 어렸을 때는 형의 신체적 장애가 거리낄 것이 없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신경이 쓰였다. 하루는 내가 몸이 많이 아팠다. 친구들이 하교 후 우리집으로 병문안을 왔다가 형을 처음 보았다. 그날은 아무도 말을 안했지만 다음날 학교에 가니 친구들이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너네 형 장애인이더라~”

전과 달라진 친구들의 조롱 섞인 표정을 보면서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형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친구들이 형제관계에 대해 물어보면 형이 있다는 정도만 말하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만약 우리 형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면 친구들이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과 깊이 대화하기가 두려웠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형 때문인 것 같아 형이 정말 미웠다. 아무 잘못도 없는 형을 때리기도 하고 욕도 자주 했다.

 

취업 후 만끽한 자유로운 삶

나는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취업을 목표로 공부를 했고, 스무 살때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회사가 있는 수원에서 자취를 하면서 지냈는데, 드디어 나에게 자유가 찾아온 것만 같아 날아갈 듯했다. 무엇보다 형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3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반복되는 일상, 늘어만 가는 업무. 회사를 왜 다녀야 하는지, 일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생졌다.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던 중에 어머니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을 알려주면서 다녀오라고 하셨다. 어머니의 말을 듣자마자 가고 싶었지만 직장이 있는 나에게 해외봉사활동은 그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의 간절함 때문인지 자기계발을 위해 1년간 휴직할 수 있는 제도가 회사에 갑자기 생겼다. 그래서 곧바로 휴직서를 내고 커피가 유명한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능력이 무용지물인 곳, 에티오피아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때 상사가 나를 인정해 주었고 나 스스로도 ‘내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일이 잘 되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을 은연 중에 무시했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언어부터 환경, 음식 등 모든 것이 달라서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회사에서 우수사원으로 뽑혀 표창장도 받았고 기획하던 프로젝트도 완벽하게 끝내서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건만 에티오피아에서는 이런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한번은 한국에서 청소년인성교육 강사님들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할 일정이 잡혔다. 지부장님은 나에게 강사님들에게 비자에 대해 잘 알아보고 자세히 설명해 드리라고 하셨다. 강사님들은 2주간 머물 예정이었기 때문에 한 달짜리 비자면 충분했는데 나는 생각 없이 석 달 비자를 준비했다. 기간이 길수록 비자 비용이 더 많이 드는데 내가 석 달 비자를 끊었기 때문에 강사님들께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부장님은 그 일 때문에 굉장히 속상해 하셨다. 괜한 비용이 지불된 데에다 일 처리를 세심하게 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도 언짢으셨던 것이다. 나 또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어이가 없기까지 했다. ‘언제나 완벽한 나였는데....’ 무슨 일이든 실수 없이 한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베슈콤플렉스홀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마인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참석자들이 오면 이름표를 나눠줘야 했는데 이름표는 중요한 것이었다.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권이 바로 이름표였기 때문이다. 강연 장소로 가기 전 지부장님은 나에게 이름표를 꼭 챙기라고 당부하셨다. 나도 중요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머릿속에 한 번 더 새겼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이름표가 없었다. 당연히 챙긴 줄 알았는데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었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아서 빨리 뛰어가 가져왔지만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부터 쌓아온 ‘나는 잘해. 나는 완벽한 사람이야’ 하는 자신감이 계속되는 실수로 인해 하나하나 무너져갔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내 잘난 맛에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형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지부장님이, 가진 것 없고 별 도움도 안되는 현지인들에게 옷과 음식 등 많은 것을 나누어 주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를 과신했던 오만함이 점점 깨어지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현지인들의 삶을 보면 답답하고 한심하기까지 했는데, 내가 실수를 거듭하자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에티오피아에서 이러한 일들을 겪을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형을 무시하고 살아온 나의 모습이다. 형을 도와야 함에도 오히려 괴롭히고 무시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형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왜 나는 형을 이해해 주지 못했을까?’ 이기적인 동생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형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한국에 돌아와서 형을 다시 만났을 때 형과 나 사이에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여전히 대화는 통하지 않았고 형은 내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형은 더 이상 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었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앞으로 형과 대화를 많이 하고 싶다. 에티오피아에서 보고 느낀 점들도 이야기하고 한글도 가르쳐 주고 싶다. 형을 장애인으로 바라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하나밖에 없는 형이라는 걸 알고 나니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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