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명문 조지메이슨대학교 최고 교수로 선정된 정유선 교수. 장애 없는 일반인도 이루기 힘든 성취를 거둔 그녀를, 사람들은 인간승리의 표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내가 숱한 시련을 넘고 여기까지 온 건 늘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분들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조지메이슨대 특수교육과 교수 정유선입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말이 어눌하고 거동도 불편하지요? 어렸을 때 뇌성마비라는 병을 앓아서입니다. 뇌성마비는 어려서 뇌가 성숙되기 전에 바이러스 감염, 물리적 충격 등으로 손상을 받아 생기는 병인데요. 감각 및 지각장애, 언어장애, 지체장애 등의 후유증을 남깁니다. 저도 언어장애와 지체장애가 있지만, 극복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건 저 혼자만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지쳐 쓰러지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손을 내밀고 일으켜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 등에서.
초등학생 때 아버지 등에서.

둥지 밖 세상에 맞서라고 가르쳐주신 부모님

태어난 지 9일째 되던 날 저는 심한 황달과 고열로 한 달이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다행히 열은 떨어지고 황달기도 사라졌지만, 그때부터 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말도 걸음마도 늦었습니다. 두 돌이 지났을 무렵 부모님은 저를 데리고 소아과로 가셨고, 의사는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부모님은 눈앞이 캄캄해지셨지만, 슬픔에 빠져 있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대로 절 재활원에 보내야 했으니까요. 평일은 재활원에서 훈련하며 주사와 약물치료를 받고,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나날이 시작됐습니다. 퇴근하고 딸이 없는 집 현관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당대의 인기가수였던 어머니는 딸의 뒷바라지에 전념하고자 가수의 꿈을 접으셨습니다. 좋은 약, 용한 의원이 있다면 아무리 먼 곳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유선이 뒷바라지한 돈 다 모았으면 63빌딩을 세웠겠다”고 하셨을 정도이니 참으로 지극정성이었지요.

꾸준히 치료를 받고 재활훈련을 한 덕에 저는 웬만큼 바른 자세로 앉고 반듯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일반학교에 보낼까, 특수학교에 보낼까 한참 고심하신 끝에 일반학교에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유선이를 언제까지나 우리 품에끼고 살 수만은 없다. 세상에 나가서 홀로 서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부모님의 생각이었습니다. 무엇이 진정으로 딸을 위하는 길인지 아셨던 거지요.

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첫날부터 저는 장애인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편견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자기소개 시간, 멋모르고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가 휘청대는 걸음, 어눌한 말투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거든요. 저를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하며 킥킥대는 친구들 때문에 운동장으로 달려가 울음을 터뜨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저는 더 이상 어머니 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면 어머니는 그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으신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도 그런 제 마음을 아시고 딸 앞에서는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칠순이 넘은 지금도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요청이 들어올 만큼 끼가 넘치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딸을 위해 꿈을 포기한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해 봅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박사학위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받으며

마음을 옭아맨 멍에를 벗겨주신 선생님들

초등학교 첫날의 사건을 계기로 저는 ‘열외학생’이 되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교과서를 읽거나 발표를 할 때면 선생님들은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셨습니다. 어쩌다 제 출석번호가 호명되면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선생님도 그 뜻을 알아채고 다른 학생을 시키셨습니다. 그럴 때면 온갖 생각이 제 마음을 드나들었습니다. ‘나도 멋있게 발표하고 싶다’는 욕심, 아무리 연습해도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내 어눌한 답변을 기다려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야속함까지….

체육시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구나 달리기를 할 때면 선생님들은 늘 “넌 안 해도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때면 내심 섭섭했습니다. 저도 친구들처럼 공놀이도 하고 싶고, 맘껏 뛰고 구르고 싶었거든요. 단 하루라도 남들처럼 자연스럽게 말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바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편견에 부딪히는 동안 저는 저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멍에로 제 마음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 멍에를 벗겨주신 분이 고1 때 국어선생님인 신현숙 선생님입니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제게 시를 낭송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발표라면 늘 열외이던 저는 순간 당황하면서도 더듬더듬 시 읽기를 마쳤습니다. 꿈에서라도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게 해 주신 선생님이 고마워서였을까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저는 펑펑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뒤, 선생님이 보내주신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선아, 나는 다만 너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자신감과 기쁨을 주고 싶었다. 누가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당당히 하거라.”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장애란 신체의 불편이나 결함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에 ‘나는 이것밖에 못해’라고 한계를 긋고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선생님의 편지를 꺼내 읽으며 마음에 힘을 얻곤 합니다.

 

최고 교수수상식 가족과 함께
최고 교수수상식 가족과 함께

가족, 내가 오늘을 사는 이유

1990년 1월,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전공은 컴퓨터공학이었는데, 수업을 따라가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미국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배워 능숙했지만, 저는 자판 치는 법도 몰라 쩔쩔맸습니다. 가뜩이나 말도 어눌한데, 남의 나라 말인 영어로 대화하자니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어요. 친구들이 “I can’t hear you네 말 못 알아듣겠어”를 연발하며 멸시 어린 시선을 보낼 때면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 제 일기장을 펴보면 ‘답답하다. 울고 싶다. 한국에 돌아갈까?’ 등의 글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마음을 돌이키고 힘을 낼 수 있었던 건 부모님과 저 사이에 이어진 마음의 끈 때문이었습니다.

‘이대로 공부를 포기하고 돌아가면, 두 분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몸도 성치 않은 딸을 미국에 보내놓고 가슴 졸이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지금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

마음을 다잡고 새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두세 시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것도 모자라 씻고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에 매달리니 차츰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학기에 A 하나, C 하나에 대부분 B를 받았던 저는 다음 학기에 올 A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미국에서였습니다. 물론 결혼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사랑으로 커가면서, 저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엄마, 저 좋다는 남자가 있어요.”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남자 나이가 너무 많구나. 교포라는 점도 마음에 걸리고.” 물론 부모님의 마음을 제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혹 시댁의 반대로 마음에 상처를 받진 않을까. 결혼한다해도 몸이 불편한 애가 결혼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시부모님 될 분도 제가 장애인임을 알고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그런 여자랑 결혼하려는 거야?”하고 남편을 호되게 나무라셨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저를 향해 믿음을 갖고 ‘유선이가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것이다’라며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을 꾸준히 설득했습니다. 일반인이 장애인과 결혼하려면 세상의 편견과도, 내면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합니다. 남편은 저를 향한 믿음 하나로 그 모든 싸움을 이겨낸 것입니다.

3년이 지난 뒤, 저희 집에 새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아들 하빈이였는데요. 하빈이를 가졌을 때 기쁨도 컸지만, 두려움도 컸습니다. ‘지체장애가 있으면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열 달 동안 배 속에 아이를 품기 힘들고 자연분만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언어장애가 있는 엄마 밑에서 말을 제때 못 배우는 건 아닐까? 뇌성마비는 유전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곁에서 “당신이 못하는 일은 내가 다 해줄게”라며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마침내 열 달 뒤, 하빈이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열 개씩 달린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 주었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하빈이가 작은 입으로 하품을 하거나 꼬물거리며 엄마 품에 안길 때면 제 마음에는 희망이 솟았습니다. 그때까지 컴퓨터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나면, 프로그래머로 취직하겠다는 것이 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빈이를 보며 ‘이 아이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새 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같은 장애인을 돕는 삶을 살기로 하고 보조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빈이를 낳으면서 아이를 하나 더 낳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둘째 예빈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빈이는 제게큰 선물을 많이 준, 보석 같은 아들입니다.

저는 보완대체의사소통기기AAC라는 도구를 써서 수업을 진행합니다. 미리 텍스트를 입력하면 그대로 읽어주는 기기인데요. 수업할 내용을 빠짐없이 입력해야 하기 때문에 2시간 40분 강의를 준비하려면 꼬박 이틀을 투자해야 합니다. 리허설도 여러 번 합니다. 시간이 부족할 때는 ‘한 번쯤 리허설을 하지 않고 대충 넘어갈까?’ 하는 유혹에 찾아오지만, 저는 그 유혹을 뿌리칩니다. 그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나중에는 습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학생들한테 “교수님 수업은 종일 들어도 재미있다” “교수님께 배운 걸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적용하니 효과가 좋다” 등의 피드백을 받을 때면 제 입에는 절로 미소가 번집니다.

지금까지 제 인생에는 숱한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선생님, 친구들, 학생들….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과 응원을 보내준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과 함께였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잊고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힘들 때면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세요. 그리고 여러분을 걱정하고 사랑해주는 분들을 찾아보세요. 언제든 여러분이 손 내밀면 도움을 줄 마음의 지원군이 틀림없이 가까이에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편집자 주: 본 칼럼은 정 교수가 IYF 월드캠프에서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교수의 자서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를 참고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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