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에 엔진이 있어서 페달을 밟으면 속도가 빨라지듯이, 사람의 마음에도 욕구가 있어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 빨리 달려가곤 한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을지 궁리하고,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피나는 연습과 훈련을 계속한다. 이처럼 몸과 마음에 있는 욕구가 우리를 이끌고 가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원래 젊은이는 호기심도 많고 열정도 넘쳐서 뭐든 하고 싶어 한다. 꿈을 이뤄보려는 욕구가 내면에서 솟구치면 놀고 싶어도 참고 공부를 하는데, 이것은 마치 엔진의 힘이 자동차를 달리게 하듯이 욕구가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욕구를 조절해 줄 수 있는 브레이크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계속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설 수도 있어야 한다. 가끔 컴퓨터게임에 빠질 때가 있지만, 그러다가도 ‘내가 게임을 너무 오래 했어. 이제 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면서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던 것을 멈추고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마음의 브레이크, 즉 절제가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

늘 먹는 밥이지만 밥상에서 손이 잘 가지 않는 반찬이 있다. 내 입맛에 그 반찬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입이 교만해졌구나’ 싶어서, 일부러 내 입맛에 잘 맞지 않은 반찬만 골라서 밥을 먹는다. 높아진 입맛을 낮추어 놓아야 다른 음식을 먹을 때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더 좋은 옷,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자동차를 예로 들자면, 좋은 차를 타다가 그보다 못한 차를 타면 불편함을 느낀다. 지금보다 더 좋은 차를 타는 것은 괜찮지만 지금보다 못한 차를 타는 것은 나를 힘들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젊어서부터 아주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그 사람이 살면서 차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나 즐거움은 아주 적어진다.

나는 음식에 대해서만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면 몸도 그렇게 대한다. 매우 추운 겨울날, 아침에 적당히 운동을 한 후 찬물에 샤워를 하고 집에서 사무실까지 20~30분 걸리는 거리를 걸어서 간다. 따뜻하게만 지내면 몸이 추운 것을 불편하게 여겨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평소에 몸을 다스려 주어야 어떤 환경에서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다.

옛날 내가 자랄 때에는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특별히 배가 많이 고팠다. 배가 고프면 자기 마음을 꺾는 것이 무척 쉽다. 내가 잘났다는 마음도, 내가 옳다는 마음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마음도,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쉽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요즘 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때는 음식 같지 않은 것들도 감사히 먹으며 견뎠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의 소원이 ‘우리는 굶주리고 살았지만 자식 세대는 배불리 먹이자’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생들의 30퍼센트 정도가 고아였다. 6.25전쟁 중에 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어 도시마다 고아원들이 생겨났다. 남편을 잃은 여자들도 많았는데, 농사를 지어야 먹고살 수 있었기에 그 여자들이 소를 몰며 쟁기질을 했고, 어린아이들도 밭일을 해야 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고된 수고를 기꺼이 감내했던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려운 상황을 견디는 것이 일상이었고, 어떤 어려움이든지 이겨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불편을 끼쳐도 크게 불평하지 않았고 어지간한 실수나 잘못은 문제로 여기지도 않았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며 살았던 것이다.

부유하고 풍성하게 살면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자식들에게 배고픔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부모 세대의 희생과 노력으로 요즘 우리는 잘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음식을 ‘맛있고 맛없고’로 구분하지, 먹을 음식이 ‘있고 없고’의 차원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이렇게 잘 먹고 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배고픔이라는 어려움을 해결한 이후 편하게 살아온 젊은이들은 작은 문제도 이기지 못하고 작은 불편도 견디지 못하는 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날카롭고 인색해졌다. 편하게만 살았기 때문에 누군가로부터 불편한 일을 당하면 용납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곧바로 공격한다. 작은 어려움도 이기지 못해 피하려고 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여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고, 상상 외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내가 1965년에 입대했을 때, 훈련병 대부분은 훈련소에서 주는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당시 훈련소에서 주는 음식은 무척 거칠어서 동료 중에는 일주일 이상 밥을 먹지 못하고 빵을 사먹으며 버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입대 첫날부터 밥을 맛있게 잘 먹었다. 밥만 맛있게 먹은 것이 아니라 군대생활 자체가 아주 편했다. 입대 하기 전에 훨씬 어렵게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열아홉 살에 예수님의 은혜로 거듭난 후, 선교 훈련을 받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경남 합천의 산골 마을에 방을 하나 얻어서 복음을 전하며 지냈고, 그 후에는 거창 읍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예배당에서 지냈다. 그런데 내가 선교 훈련을 받을 때 선교사님으로부터 ‘너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아뢰라’고 배웠기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고 기도로 필요한 것들을 간구했다. 자연히 굶을 때가 수두룩했고, 차가운 방에서 이불도 없이 지낸 날도 많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입대하니까 따뜻하게 불 때주는 내무반 생활이 편했다. 매트리스를 깔고 모포를 덮고 자면서, 하루 세 끼 밥도 꼬박꼬박 먹다니…. 다른 동료들은 배고픔과 추위, 힘든 일과를 두려워했지만, 나는 군 생활이 정말 행복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내 삶에 원하지 않았던 어려움도 많았고 고난도 있었다. 그런데 그 어려움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편한 환경에서 자라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네가 배도 좀 곯아보고 어려움도 겪어 봐야 돼.”라고 했다. 그러면 아들이 “아버지,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아들이 자라서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너, 젊어서는 고생을 좀 해야 한다.” 하며 어려운 일들을 하게 했다. 아들이 “아버지, 제가 일하는 것 고생 아닙니다.” 하며 즐겁게 일하는 것이 보기 좋았다. 아들과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고맙고, 부자간에 마음이 하나로 흐르는 것이 행복했다.

2002년에, 젊은이들이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굿뉴스코 Goodnews Corps’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대부분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신을 신고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산다. 그 학생들이 일 년 동안 휴학을 하고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의 여러 나라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나라들에서 사는 것이 고생스럽고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어렵게만 보였던 그곳의 삶에 서서히 적응한다. ‘이런 음식을 어떻게 먹지?’ 했던 현지 음식을 잘 먹고, 현지인들과도 잘 어울린다. 물이 부족하거나 먹을 것이 모자라는 것에도 잘 적응하며, 말라리아 등의 질병에 걸렸다가 이겨내기도 한다. 그렇게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지내다가 귀국하면 사는 것이 편하고, 풍요롭게 느껴진다.

자연히 불평하지 않으며, 마음도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는 배가 고프면 마트에 가서 금방 뭔가를 사다가 먹을 수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보면 서글프기도 하다. 물질적인 만족을 금방 채우지 못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 조금만 어려워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상대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해 불신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유롭게 살 수 있지만 그 여유를 다스리며 조금 어렵게 지낼 수 있다면, 풍요 속에서도 옛날처럼 서로 아끼고 위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제어할 수 있다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날카롭거나 각박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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