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가까이 2017 TOMORROW CAMPAIGN

글 | 이영은

 

나는 뉴질랜드에서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에 ‘아버지와 가까이’를 주제로 <투머로우>에서 진행한 북콘서트에 참석했는데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 나도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닫고 살았다. 아버지가 두려운 존재였고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가 싫었다.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는데, 그토록 미워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나는 때릴 테니 너는 숫자를 세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좀 독특했다. 높은 곳을 좋아해서 주로 베란다에서 놀고 창문틀에 자주 앉아있는 등 위험한 곳에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요즘도 높은 곳에 올라가면 심장이 뻥 뚫리는 것 같고 짜릿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기분을 즐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집은 5층 건물에 있었다. 하루는 옥상에 올라가 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다가 제법 큰 돌 두 개를 건물 밑으로 떨어뜨리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돌이 거슬려서 한쪽으로 치운다는 게 그만 옥상 밖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이다.

건물 옆에는 동네에서 유명한 식당이 있었다. 돌이 식당의 식자재를 보관하는 장소에 떨어졌고,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음식을 가지러 오셨다가 하마터면 다칠 뻔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주인아저씨는 덩치가 아주 컸고 아주머니는 성격이 깐깐해 보였는데, 우리 부모님께 화를 내며 손해를 봤으니 물어내라고 소리쳤다. 아버지는 그분들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하셨다.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돌아간 후에 아버지가 나와 동생을 부르셨다. 아버지가 매를 드실까봐 떨며 갔는데 동생은 조금 혼내고 나에게는 “엎드려뻗쳐!” 하시더니 “지금부터 때릴 테니 너는 숫자를 세라!” 하셨다. 그날 나는 아버지께 무척 많이 맞고 침대에 가서 쓰러졌다. 아버지가 화가 난 것은 이해가 가지만 딸을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아파하는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시는 아버지가 너무 밉고 싫었다. 매를 맞은 후 두 주 동안 앉기가 힘들었다. 엄마는 저녁마다 멍들고 상처가 난 곳에 연고를 발라주시며 한숨을 쉬셨지만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은 ‘괜찮냐’가 다였다. ‘죽을 만큼 아팠던 딸에게 아버지로서 할수 있는 말이 저 말밖에 없나’ 하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났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에 수영선수셨다. 곰처럼 뚱뚱하지만 요즘도 물에만 들어가면 물개로 변신한다. 어렸을 때 수영장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등에 태우고 온 수영장을 헤엄쳐 다니셨는데, 배를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등 위에서 노는 게 무척 신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아버지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았다. 생각할수록 아버지가 미워서 비뚤고 어긋나게 행동했다. 한편으로는 괴로웠지만 상처 받은 마음이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면 점점 더 두려워지고 같이 있으면 숨이 막혔다. ‘또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피할 정도였다. 밥도 한자리에서 먹기 싫었다.

사춘기를 보내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향해 욕을 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아버지를 죽인 죄로 교도소에 있어야 할 사람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옆에서 통역도 하는 나를 대견하다고 칭찬하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키도 크고 일도 잘하는 딸을 둬서 든든하겠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얀 이를 다 드러내시며 웃으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저는 아버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 맞은 일로 증오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미워하게 됐는데, 그 생각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내가 심각한 정신병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20년 세월 동안 아버지는 나에게 괴물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볼 눈이 없었을 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공부도 하고 앞으로 할 일을 준비하려고 한국에 와서 지내는데, 여러 부분으로 나를 지도해 주시고 상담도 해주시는 어느 목사님과 이야기하다가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을 더 이상 참거나 숨기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라는 목사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정말 오랜만에 마음속 이야기를 울면서 털어놓았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내 마음의 모양이 보였다. 막연하게 아버지가 밉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정리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사실 그동안 아버지만 미워한 게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아버지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주위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영은아, 너 그거 아니? 아버지가 지금까지 너를 위해 ‘싸움’을 해 오신 것 같구나. 네 생각들과 싸우는 싸움. 아버지가 너를 때리고 무섭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한 걸까? 아버지가 엄해도 그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단다. 아버지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싫고 미운 게 아니라 네 마음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간 거야. 아버지의 진짜 마음을 알면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 수가 있어.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는 너를 향한 사랑이 있어. 그걸 볼 만한 눈이 네게 없었던 거야. 아버지께 전화해서 이야기를 해봐. 아버지는 네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 때로는 무섭게 혼내면서 그렇게 기르신 거야.”라고 하셨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데 처음으로 아버지께 죄송했다. 맞아서 아프고 속상하다고 모두 아버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지는 않는다. 더한 일이 있어도 아버지를 따르고 고민을 이야기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속으로 온갖 욕을 하며 긴 시간 아버지를 증오해 온 것이다. 무언가에 속았다는 생각과 함께 ‘아버지가 나를 볼 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하게 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었고, 아버지께 너무 부끄럽고 죄송했다.

그날 저녁, 망설임 없이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서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적인 대화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너무 싫고 미워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감사한 아버지’가 된 사연을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느껴지는 게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나를 향한 미움이 전혀 없었다.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원망하거나 쫓아낸 적이 없고 내가 잘못한 모든 것을 품어주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와 전혀 달랐다. ‘아, 내가 아버지를 너무 몰랐구나. 아버지는 마음이 바다같이 넓구나.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계셨구나.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나를 태우고 재미있게 놀아주셨던 아버지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아버지와 통화를 마쳤는데 마음이 너무 편안했다.

 

아버지, 길이 없을 때 의지하는 디딤돌이 되셨다

아버지와 전화로 통화한 때가 작년 9월이었는데, 아버지는 자주 아침이면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신다. ‘밥 먹었니?’, ‘뭐해?’, ‘건강하지?’, ‘잘 자래이~’ 바쁘게 생활하다 보면 아버지의 문자메시지에 답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메시지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요즘은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사랑을 품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구나’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모두 깜짝 놀란다. 아버지 말을 잘 듣는 딸처럼 행동하면서 사람들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고 또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소개 할 수 있다.

아버지를 내 인생의 걸림돌로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디딤돌이셨다. 갈 수 없는 곳, 어려움과 문제가 가득한 곳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부끄러운 일까지 말하고 의논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한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아버지에게 ‘최고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붙여드리고 싶다.

 

나도 아버지를 알기까지 20년이 걸렸단다

 

글 | 이현배

 

 

딸이 자라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딸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나와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아버지는 농부셨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농사만 지으셨다. 부모님이 안 계신 집에서 나는 내 멋대로 하며 자랐다. 망아지 같았다고 해야 할까.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살았다. 어린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잘못한 것만 많았다. 운동을 했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못된 짓을 많이 했고 농사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안타까우셨을 텐데도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그냥 내버려 두셨다.

초등학생 시절의 어느 겨울날, 술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가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형님과 수레를 끌고 갔는데 아버지가 술에 잔뜩 취해 계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시더니 웃으시면서 사람들에게 자식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이 수영선수여!”라고 소리를 치시는데 너무 짜증스럽고 싫었다. 아버지를 수레에 태워 형은 앞에서 끌고 나는 뒤에서 밀며 집까지 가는 길에 ‘아버지가 너무 싫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한번은 인삼밭에 약을 뿌려야 했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도와달라고 하셨다. 너무 바쁘고 일이 많아 아버지가 애원하듯 부탁하셨는데,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음에도 도와드리지 않고 방에 그냥 있었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를 간섭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불평하면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원망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떨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오로지 나, 내 기분만 중요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가 하셨던 행동들이나 지난 일들을 떠올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는 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었다. 술에서 깨어나도 쉬지 못하고 다시 밭에 나가 아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고 희생하신 분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다른 눈으로 보기까지 20년이 걸렸다.

한번은 어머니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가 우셨다. 아버지를 향한 내 관념이 버려지고 난 뒤에야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면서 아버지의 사랑이 내 마음 속으로 쑥 들어왔다.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딸은 여러 면에서 나를 많이 닮았다. 외모도 그렇지만 노는 것 좋아하고 욱하는 성격이 닮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품도 나와 너무 비슷했다. 딸이 그렇게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를 자주 들면서 엄하게 키웠다. 또 기회가 되는대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딸은 내가 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어리고 마음도 깊지 않아서 그러리라 생각했다.

무섭게 혼내는 나를 미워하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리라 믿었기에 큰 염려는 하지 않았다.

딸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데, 한국에 가기 전에 남태평양 어느 섬나라를 방문할 일이 있어서 뉴질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딸과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행복했다. 딸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년 가을에는 딸이 나에게 전화해서 솔직한 마음의 이야기를 했다. 나를 다른 눈으로 봐주는 딸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딸을 생각하면 아버지 생각이 나고 이어 고집스러웠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딸이 나에게 다가와 이야기하듯 나도 아버지께 다가가 가족을 위해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술도 사드리고, 신발을 벗겨서 발도 씻어드리고, 어깨도 주물러드리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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