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불화와 아버지와의 관계 악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 등 내 인생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아무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해외봉사단으로 날아간 인도에서, 어려운 문제는 나눌수록 가벼워지고 부딪힐수록 성장한다는 걸 배웠다.

 

밝게 웃으며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어린 시절부터 내 마음 속에 품어왔던 소망이 있다.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불화가 있었다.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오랜 시간 배를 타고 돌아와 집에 머물 때면 어머니를 괴롭히고, 때리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내 마음을 뒤덮었지만 어린 내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결국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셨고, 어머니는 홀로 형과 나를 키우셔야만 했다. 그런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방법은 돈을 많이 벌어 여유 있는 삶을 살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 또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도를 했고 대학 4년 동안에도 검도에 열정을 불태웠다. 남들보다 두 배로 연습하고, 두 배로 성실하게 생활했다. 그 결과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부원이 나를 인정했고, 주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졸업 이후 군청 소속의 선수가 되어 안정적인 보수를 받으며 활동했다. 이런 삶을 살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내 마음은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왜 운동을 하는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마음 한 켠에 자리 잡은 답답함과 공허함은 술, 담배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1년 만에 나는 팀을 나왔고,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검도도 그만두었다.

내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검도를 그만둔 이후, 삶에서 행복을 찾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혼자 사시던 아버지가 자살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기초수급대상자로서, 다른 소득 없이 지원 받는 돈으로만 생활하고 계셨다. 그런데 함께 살지는 않지만 호적상 아들이었던 내가 돈을 벌면서 아버지는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고,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살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나도 큰 죄책감과 충격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고, 술을 마셔도 잠들 수 없는 나날이 많았다. 나도 언젠가 아버지처럼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학교 때부터 함께 운동을 해온 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나는 더 큰 충격에 빠졌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아프리카에 있는 형이 떠올랐다. 해외봉사를 다녀온 뒤 달라진 형, 행복하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던 형. 당시에는 관심도 없고 이해도 할 수 없었지만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던 형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형이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 형이 굿뉴스코 활동을 하고 있는 아프리카 잠비아로 갔다.

20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아프리카는 행복하다고 말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더운 날씨에 더러운 환경, 부족한 물과 전기, 그리고 맛없는 음식.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을 단 한 가지도 찾을 수 없었고, 형이 이 곳에서 어떻게 그렇게 밝게 웃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고 형과 나눠본 적 없던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형이 정말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은 정말 행복해했고, 내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형이 느끼는 행복이 진짜인 것을 경험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내 현실에 매여 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뤘던 군 입대와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심각한 어깨통증을 느껴 병원을 찾았고, 어깨와 발목에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을 받은 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군 입대와 대학원 입학은 물론 가벼운 운동마저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내 모습에 삶이 더욱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 때 형이 겪은 변화를 나도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형처럼 밝게 웃으며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인도로 떠났다.

 

첸나이 월드캠프 때 자원봉사자들이 사준 아이스크림으로 마음이 활짝 열렸다.
첸나이 월드캠프 때 자원봉사자들이 사준 아이스크림으로 마음이 활짝 열렸다.

무시했던 인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그러나 나를 변화시켜줄 것이라 믿었던 인도는 첫날부터 나를 실망시켰다. 덥고, 더럽고, 시끄럽고, 물도 잘 나오지 않는 인도. 게다가 나는 인도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길거리에 누워 있는 모습이 더럽게 느껴졌고, 이상한 신들을 섬기는 모습을 볼 때면 이들은 ‘나와 다르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인도라는 나라에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뭄바이 월드캠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팀 내의 연장자로서 단원들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몸이 으슬으슬하니 몸살 기운이 찾아왔다. 피곤한 일정에 몸살 감기가 왔나 싶어 약을 먹고 쉬었지만 며칠이 지나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진통제도 듣지 않고, 구토 증세까지 나타났다. 단순한 몸살감기가 아닌 것 같다는 지부장님의 말씀에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A형 간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한 구토 증세와 고열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준비했던 월드캠프 프로그램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했고, 난 그저 누워서 간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그때,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캠프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와서 걱정해주고, 챙겨주고, 죽까지 끓여주는 지부장님과 단원들. 인도 사람들 또한 내게 감동을 주었다. 나는 다른 지부의 단원이기에 뭄바이 지부 사람들은 나와 얼굴을 보고 지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에 좋다는 사탕수수와 온갖 과일 등을 사왔다. 아픈 내 손을 잡고 걱정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늘 무시했던 인도 사람들. 그러나 아픈 나는 그들보다 훨씬 쓸모없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그들이 베풀어주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캠프를 앞두고 병치레를 하면서 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단원들을 이끌어 나가기는커녕 도움만 받는 내 모습, 내가 하던 일을 나보다 훨씬 잘해 나가고 있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니 내 스스로 잘난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이끌어나가려 했던 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질 지경이었다. 또한 항상 나보다 못나다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인도 사람들이 아픈 내게 베풀어 준 사랑은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동생들에게 묻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혼자 생각하고, 혼자 해결하려고 할 때는 너무나도 컸던 문제들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마음은 전에 없이 편안했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기쁨이 내 마음을 채워나갔다.

 

어려움 속에서 보물처럼 찾아낸 행복

인도에 지내는 동안 자주 아팠다. 숨이 막힐 듯한 습한 날씨와 전기가 나가서 선풍기 없이 폭염 속에서 잠을 설치던 밤, 기차를 타고 인도 내 다른 지부까지 혼자 몇십 시간 이동하는 등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나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환경 등 내 인생 또한 힘든 일이 많았다. 난 그게 참 싫었다. 아무 어려움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부장님은 내게 그건 나쁜 게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당시에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었고, 한 걸음씩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어려운 상황 앞에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만나는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성장하게 만들었다. 분명 내일도 많은 어려움이 나를 찾아오겠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이겨낼 것이다. 한 걸음 성장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이 두렵지 않다.

인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한국에 돌아온 지금,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 방식은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 나는 많은 돈을 벌어 어머니께 좋은 것을 드리고 싶었고, 그게 행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인도에서 배운 대로 많이 표현하고, 많이 다가가는 아들이 되었다. 생전 해본 적 없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놀랐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씀해주셨다. 활짝 웃는 어머니의 모습에 ‘어쩌면 이게 행복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게 물질적 풍요로움은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내 가족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이 순간,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최진석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13기로 인도에 다녀온 그는 교육자가 되기 위해 현재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나라가 발전하고 교육여건이 좋아져도 성적 때문에 자살하고, 목적 없이 사는 학생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 인도에서 봉사하며 그 답을 찾은 그는, 학생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길러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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