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진의 In 아프리카, 아프리카人.

8월 8일, 케냐에서는 대통령 선거 및 총선거가 실시됐다. 대통령을 비롯해 주지사와 상원의원, 하원의원 등 굵직한 일꾼을 뽑는 큰 선거였다.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선거를 준비하며 지난 몇 달 간 들썩거린 케냐. 아프리카에서는 어떻게 선거를 치르는지,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케냐의 선거 문화를 들여다보자.

선거가 익숙하지 않은 아프리카 전통 사회

익히 알고 있듯 선거는 국민의 대표를뽑기 위한 제도다.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들이 주인이 된 근대 유럽에서는 다수결의 원칙과 선거제도를 기반으로 지도자를 선출했다. 이후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서구사회에서는 시민이 직접 지도자를 뽑는 행동이 자리 잡혀갔다. 시민들은 자기 뜻에 맞는 정당과 후보에게 표를 던지며 각자의 의견을 표현한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다수의 뜻을 인정하고, 선발된 일꾼에게 힘을 실어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 국회의원은 물론 아파트 부녀회장 선출과 마피아게임의 범인 뽑기까지 다수결 원칙과 선거는 민주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유용한 제도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 전통사회에서 선거와 다수결 원칙은 익숙하지 않은 의사 결정 방식이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오랫동안 혈연으로 맺어진 부족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마사이, 줄루, 아산티 등 각 부족을 이끄는 추장과 원로들은 존경받는 가문의 어른들이었다. 부족민들은 지도자를 정하기 위해 선거를 하지 않았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식들이 부모의 말에 순응하듯 부족 어르신의 결정을 따를 뿐이었다. 간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지구상 다른 곳에서도 그렇듯, 부족 단위로 생활하는 아프리카의 전통 사회에서는 원로 및 부족 구성원 다수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부족사회에서는 의견이 대립될 때 다수결 원칙을 적용해 결정하지 않았다. 난해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에 관련된 사람들과 부족의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이해할 때까지 토론을 진행했다. 51%의 횡포를 방지하며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에 이르기까지 몇 날 며칠이 걸리기도 했지만, 부족사회는 크고 작은 목소리를 모두 수렴하여 지혜로운 결론을 만들어내곤 했다. 추장과 원로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과격한 고집쟁이가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관대한 지도자들이었다.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나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같은, 아프리카 사회를 다룬 수기에서도 부족 지도자들의 길고 긴 토론과 거기에 순응하는 부족민들의 모습이 꽤나 비중 있게 다뤄진다.

 

선거철만 되면 케냐의 모든 벽은 선거용 포스터로 도배된다
선거철만 되면 케냐의 모든 벽은 선거용 포스터로 도배된다

얼굴 알리기로 승부를 보는 케냐의 선거

물론 오늘날 아프리카 국가들은 부족의 추장이 아닌 정치인과 관료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사회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언어와 문화, 사고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은 부족의 전통을 따른다. 1992년 다당제 민주주의가 도입된 이후 케냐의 43개 부족들은 각자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서 승리를 노렸다. 그러다보니 케냐의 정당은 이념이나 정치적인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각 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부족에서 밀어주는 정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다. 후보자가 어떤 사람인지, 공약이 무엇인지보다는 부족에서 지명한 정당 출신인지 아닌지가 표를 주기 위한 중요한 이유로 작용한다. 따라서 케냐에서 선거는 나라를 위해 바르게 일할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를 뽑으려는 목적보다는 자기 부족의 대표자를 정치계에 진출시키기 위한 ‘부족 간의 총성 없는 전쟁’과 같은 모습을 띤다. 다른 부족 후보가 당선되면 자신의 부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결하여 자기 부족 후보를 밀어주게 만든다. 일견 한국의 지역주의 정치와도 유사하게 보이지만, 혈연 정당이 주관하는 아프리카의 부족주의 정치는 그 정도와 영향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러한 선거 풍토 속에서 유권자에게는 자기 부족 정당 후보가 누구인지 알아두는 게 중요한 일이다. 선거가 가까워지면 케냐에는 눈길 닿는 모든 곳에서 정치인 포스터를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늘 좋은 공약들을 제시하지만 후보자나 유권자나 그것이 이뤄질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얼굴을 알리는 것이다. 도로변의 거대한 빌보드 광고판, 버스 뒤 유리창, 공원의 나무 그루터기 등등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지 선거 홍보물이 비집고 들어와 있다. 심지어 집 안에도 정치인 달력, 정당 노트 등 다양한 홍보 물품이 들어와 있다. 발랄한 10대 소녀의 방을 장식하는 연예인 브로마이드처럼 케냐의 거실에는 가족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포스터가 붙어 있곤 한다. 그런 현상은 빈곤층 일수록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벽에 난 균열을 가리는 데 포스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포스터처럼 크고 질 좋은 종이도 없다. 게다가 공짜이기까지.

케냐 선거 후보자들이 유독 홍보물을 많이 붙이는 이유가 재미있다. 케냐의 투표용지에 후보자의 얼굴이 인쇄되기 때문이다. 케냐는 문맹률이 높아서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문맹에게도 선거권은 있다. 그들을 위해 케냐의 투표용지에는 후보의 이름과 정당 로고와 함께 얼굴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더라도 후보자의 얼굴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투표지의 사진을 보고 투표하면 된다. 후보의 사진이 함께 인쇄되다 보니 케냐의 투표용지는 한국 투표용지에 비해 훨씬 커다랗다는 점도 재미있다.

 

케냐의 투표용지.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도록사진이 컬러로 인쇄되며, 후보자가 많을 때는 용지 크기가 A4보다 더 길게 내려간다.
케냐의 투표용지.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도록사진이 컬러로 인쇄되며, 후보자가 많을 때는 용지 크기가 A4보다 더 길게 내려간다.

선거철이면 반복되는 폭력 사태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하지만 아프리카, 최소한 케냐의 선거는 그다지 축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보다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태풍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이다. 태풍이 가져오는 좋은 점도 있지만 피해 또한 적지 않다. 케냐 사람들은 선거가 가까워오면 식료품을 비축하고 현금을 챙겨 놓으며 선거 후 찾아올지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한다.

안타깝게도 케냐에서는 올해 선거 이후에도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야권 연합의 라일라 오딩가 후보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시하며 대선 불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해커가 선거관리위원회 서버에 침입해 선거 결과를 조작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에 따라 야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해 수십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갓 열 살된 어린 소녀도 있어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 외신들은 1,100여 명의 사망자와 60만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2007년의 사례를 떠올리며 이번선거 폭동이 전국적인 유혈 사태로 번지는 게 아닌지 우려했다.

그렇지만 그간 선거철마다 폭동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경험한 케냐인들은 이제는 평화로운 선거를 치르기를 희망하고 있다. 선거를 일주일 앞둔 7월 31일, 케냐 47개 도 청년들이 모인 ‘IYF 국가평화청년대표단’이 평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각 도의 청년대표 47명은 이번 선거이후 발생하는 어떠한 폭력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선서를 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위클리프 아요키 청년 의장은 ‘케냐에 평화가 자리 잡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마음의 변화가 시급하며 이러한 일에 청년들이 앞장 서겠다’고 발표하며 선거 이후 케냐가 폭력으로 물드는 일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일반 국민들 역시 이번 선거 이후 폭력 사태가 발생하길 바라지 않는 눈치다. 여당 지지자인 나이로비 시민 알란 가레샤 씨는 ‘이번 선거는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정하게 치러졌으며 야권은 이를 인정하고 폭력 행위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고, 야당 지지자 에반스 오몬디 씨는 ‘선거철마다 폭동이 주기적으로 일어나서는 케냐가 발전할 수 없으며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 부족간에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2007년 폭동을 직접 경험한 짐 부루키 씨는 ‘대다수 케냐 국민들은 폭력에 가담하기 원치 않으며 2007년과 같은 끔찍한 사건은 케냐에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전국 청년대표 47명이 모여 평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거 후 어떤 폭력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결의는 케냐 시민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전국 청년대표 47명이 모여 평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거 후 어떤 폭력행위에도 가담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결의는 케냐 시민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부족 갈등을 넘어 발전할 케냐의 미래

케냐는 선거철에 부족 간의 싸움이 치열하지만,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는 부족간 갈등이 드물다. 직장에서 마사이 부족과 스와힐리 부족은 함께 일을 하고, 학교에서는 소수 부족 학생이 다수 부족 학생에게 따돌림 당하지 않는다. 캄바족 개그맨이 TV에서 라일라 오딩가 흉내를 내면 키쿠유와 루오가 함께 웃는다. 그들은 선거철 폭력사태가 일어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케냐 국민들이 지닌 놀라운 회복력이다.

케냐는 독립한 지 이제 막 50여 년이 지난 신생 국가다. 여전히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과거 부족 사회와 식민지배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냐는 2010년 이후 지속적으로 5~8% 가량의 빠른 경제 성장을 보여 왔다. 전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국민 대다수에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게 된 나라이기도 하다. 케냐 국민들은 더욱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에 차 있고, 나라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극복해 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 및 경제 발전의 측면에서 아직 케냐의 앞에 놓인 과제는 많다. 그러나 케냐 국민이 지닌 회복력과 포용력은 그들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부족 간의 상처를 치유하며, 결국 더 아름다운 미래를 케냐에 선물할 것이다. 과거 부족 사회에서 몇 날 며칠이고 토론과 대화를 나누던 케냐 조상들의 열린 정신이 그들에게 희망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이번 2017년 대선의 결과가 어떻든지 케냐인들은 다시 평화를 찾고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원래부터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케냐의 국민은 그날이 다시 오길 기다리고 있다.

 

IYF 국가평화청년대표단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케냐의 폭력사태를 멈추기 위한 IYF 청년대표들의 모임. 케냐 47개 도 대표와 국가 의장, 부의장, 여성대표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부족과 정치, 문화를 초월해 평화를 지키려는 움직임으로 선거에 앞서 케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슬로건은 ‘I choose nothing but peace 평화 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겠다’이다.

 

2008년 부룬디로 1년간 해외봉사를 다녀온 그는 아프리카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꿈을 품은 맹랑한 공상가다. 2015년 12월부터 아프리카 케냐 GBS TV방송국에서 청소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느낀 경험들을 그의 따뜻한 필치로 소개한다. 쏭태의 생생한 아프리카 이야기 블로그 http://blog.naver.com/impo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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