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캠페인 '아버지와 가까이'

아빠는 컸다. 집안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다. 아빠가 하시는 말은 그대로 집안의 규율이 되었다. 아빠의 말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전에 믿었다. 아빠는 뭐든지 해내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아니 믿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 아빠는 그랬다.

아빠는 대단히 큰 문제도 한순간에 티끌처럼 만들어 버리는 능력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친구와 함께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기’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친구가 내 손톱을 보고 신기해 하며 물었다.

“넌 손톱이 왜 그렇게 짧고 작아? 내 손톱에 얹은 봉숭아 반만 얹어도 되겠다.”

남들과 다른 건 죽기보다 싫은 나이. 순식간에 나의 작고 짧은 손톱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창피한 손톱이 되어 버렸다. 봉숭아 물들이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온 내게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은 아빠였다. 자연스레 아빠에게 그 시절 나에게 더 이상 심각할 수 없는 고민을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랑 손톱이 다르게 생겼어, 친구는 구구단이 재미있다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 외워져, 나도 친구처럼 뜀틀을 잘 넘고 싶어….’ 원숭이의 빨간 엉덩이가 백두산까지 이어지듯, 친구와 다르게 생긴 손톱 모양이 서러운 콧물로 이어졌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궈내는 세상에서 가장 서럽고 심각한 나를, 아빠는 끌끌 웃어넘기지 않으셨다.

“넌 귤을 좋아하지? 아빠는 바나나가 좋아. 자, 세상에는 아주 많은 과일이 있고 과일마다 다 맛이 달라. 그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일도 모두 달라. 누구도 과일의 맛을 비교하지 않아. 귤은 새콤해서 맛있고 바나나는 달콤해서 맛있지. 너도 다른 아이들과 다른 너만의 맛이 있어. 아빠도 짧은 손톱인데, 짧은 손톱이 손재주가 좋대.”

아빠는 지혜로운 해결사였다. 그 순간 나의 짧은 손톱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 되었고 나는 나만의 맛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아빠는 그렇게 나를 만들었다.

 

치열했던 언니와의 싸움 후 아빠의 반응이…

이런 면도 있는가 하면 아빠는 또 굉장히 불같은 성격을 지니셔서 나는 늘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안고 아빠를 대했다. 내가 아빠의 화를 돋구는 일 중에 하나는 ‘언니와 싸우는 것’이었다.

두 살 터울 언니와는, 엄마 말을 빌리자면, ‘아침에 눈떠서 밤에 눈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싸워댔다. 어떨 땐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이지만 어떤 땐 둘도 없는 원수가 되고 마는 언니와의 싸움은 치열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서로의 머리채를 향해 손을 뻗쳤는데 언니가 2년 동안 더 먹은 밥그릇 수는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한 바퀴 돌리는 언니의 야무진 손길에서, 난 직감적으로 패배를 느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눈앞에 보이는 언니의 팔목을 물어뜯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을 사수하고자 물었는데 너무 세게 물어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팔목을 보고, 도리어 덜컥 겁을 먹은 것은 나였다. 그렇다고 놀라거나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 질 것 같아 얼른 다시 달려들어 피 튀기는 전투를 계속했다.

다음 날, 바쁜 부모님이 집에 오셔서 모처럼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았는데, 내가 식탁에 앉아있는 건지 벼랑 끝에 앉아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푸르딩딩 멍이 든 언니의 팔뚝에 아빠의 시선이 갈 때마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보이지도 않고 욱신거리는 두피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회초리와 함께 ‘둘 다 무릎 꿇어!’ 하는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생각 외로 식사시간은 평안하게 지나갔다. 양쪽에서 팽팽하게 고무줄을 잡아당기듯 숨막히던 긴장감은 서서히 풀리고 마지막 숟가락을 뜨려던 찰나, 기어코 탕! 고무줄이 끊겼다. 아빠가 나를 불렀다.

“다애야.”

반사적으로 흰자위를 가득 보이며 언니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회초리질보다 더 따끔했던 훈계

“저렇게 된 언니 팔을 보니까 네가 더 아프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그 고무줄이 끊어지며 콧등을 ‘탱!’ 하고 때리고 간 듯 콧등이 얼얼하고 시큰거렸다. 그리고 내 눈엔 어느새 아빠의 얼굴이 뿌옇게 담겼다.

“다은아, 오늘 아침에 눈뜨자마자 ‘그래도 동생인데….’ 하고 후회했지?”

조용히 눈물만 떨구는 우리 자매에게 아빠가 부탁했다.

“서로를 아껴줘. 아빠, 엄마가 없어도 이 세상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너희 둘 사이야.”

회초리질 열 번보다 훨씬 따끔한 훈계였다. 그때 내가 아빠에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미안함이었다. 아빠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절절한 부탁은 지혜롭게 나를 매질했다. 그 뒤로도 언니와 다툼이 없지는 않았지만, 언니에게 상처를 주면 결국 내가 아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빠의 말이, 언니에게 함부로 상처 주는 것을 경계하도록 한 것이다. 아빠는 그렇게 나를 만들어 가셨다.

 

‘아빠의 작은딸 역할을 하기가 힘겨워요’

아빠의 얼굴에 세월이 깊게 패이고 머리가 희끗해지는 만큼 나도 자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누구보다 지혜로웠고,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던 아빠였는데 내 입에선 점점 ‘아니요’가 나왔다. 머리가 커질수록 ‘아빠가 다 맞지는 않다’는 생각도 커졌다. 아빠가 만들어 주는 내 모습이 싫었다. 아빠는 내가 모든 과목을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랐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를 바랐고, 교복을 단정히 입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나는 수학이 싫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습이 지겨웠고, 교복은 줄여 입는 게 예뻐 보였다. 아빠는 입버릇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다 해줬는데! 바이올린도 배우게 해 주고 공부하기 좋은 환경도 만들어주고. 내가 너한테 못해준 게 뭐야!”

아빠의 말은 더 이상 내게 명쾌한 해답을 주거나 깊은 깨달음을 주지 않았다. 대신 큰 부담만 안겨주었다. 나는 언니처럼 공부를 잘하지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했기에 아빠의 작은딸 역할을 하기가 힘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내 자신의 모습이 보일수록 아빠를 피하게 됐다. 아빠가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는 생청국장이 싫었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잔소리로 들렸으며 가끔씩 내 방문을 열고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아빠는 나를 이해 못해!’라는 생각을 발판 삼아 아빠와의 거리를 더욱 넓혀갔다. 가끔씩 아빠가 나를 보고 짓는 한숨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사실은 아빠가 기대하는 대로 잘하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던 갑갑함이 중2병을 만나자 철없는 반항심으로 이어졌다. 그마저도 아빠가 무서워 드라마처럼 가출 같은 반항적 행동은 꿈도 못 꾸고 속으로 원망만 하는 정도였지만, 그 무렵의 나는 아빠의 스치는 눈빛에도 날카롭게 베였다.

알게 모르게 멀어진 거리에서 아빠를 바라보게 되었을땐, 나는 교복을 벗을 시점이었고 아빠는 낯설 만큼 작아져 있었다.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일에 괴로워하시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힘들어 하셨다. 혼내는 아빠보다 짜증내는 아빠의 모습을 보는 일이 잦았다.

아빠는 뭐든 척척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리저리 치이기도 하고 당면한 일들 앞에 끙끙 앓기도 했다. 집에서 가장 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장 큰 사람이어야만 했다.

 

대학생이 되던 날 들은 아빠의 고백

그때 아빠를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빠에 대한 부담과 원망이 안타까움으로 녹아들었다. 흔히들 겪듯이, 어느 새 작게 느껴지는 아빠의 뒷모습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대학에 들어갔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면서 오히려 가족끼리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입시 지옥에서 마음이 쉴 곳은 가족의 품밖에 없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세상으로부터 든든하게 나를 지켜주는 아빠의 넓은 등은 더 이상 없었지만, 내 옆에서 함께 헤쳐 나아갈 준비가 된 아빠의 따뜻한 손이 있었다. 나는 시험 때문에, 진로 때문에 힘들 때마다 엄마 아빠와 깊은 대화를 했고 또 같이 고민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바라고 기도했던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아빠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아빠가 어릴 땐 지금처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환경도 없었고 공부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후회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욕심이 컸어. 이것저것 가르치고 해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고. 곧이곧대로 잘하는 언니와 다르게 자꾸 삐딱하게 가는 네가 혹시 안 좋은 길로 빠질까 봐 불안했어. 아빠는 너를 잘 키우고 싶었거든.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화도 많이 냈고, 네 성향을 헤아려주지 못한 것 같다. 엇나갈까봐 매도 많이 들었지. 그런데 이렇게 부족한 아빠 밑에서 잘 커줘서 너무 고맙고 미안하네.”

 

24살인 지금, 어쩌다 어른이 되고 보니 느껴지는 게 있다. ‘나이가 들수록 솔직해지기가 어렵구나….’ 아빠는 그날 나에게 아빠로서 진솔한 고백을 하셨고 이후 나는 아빠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구나! 내가 마음처럼 잘 안 돼서 아빠가 부담스럽고 원망스러웠던 것처럼 아빠도 아빠로서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불안했겠구나.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만큼 두려웠겠구나. 나도 아빠의 딸 역할을 처음 해 보듯이 아빠도 다애 아빠 역할이 처음이니까, 우리 둘 다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서러웠겠구나.’

그제야 아빠라는 역할로 서서 외로웠을 무대가 보였다. 그때 내 마음에서 만난 아빠는 슈퍼맨도 아니고 해결사도 아닌 미숙하고 불안한 보통의 아빠였다. 어쩌다 어른이 된 나처럼 어쩌다 아빠가 된 그저 나를 사랑하는 아빠.

 

문다애
‘아버지와 가까이’ 캠페인을 평소 즐겨 읽는 애독자다. 작가를 꿈꾸는 사회 초년생이기도 한 그녀가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편지 글을 기고해 주었다.

일러스트 | 송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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