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씨가 일 년 동안 해외봉사를 다녀왔다고 해서 눈에 띄게 말수가 늘어나고, 갑자기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부모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위하시는지. 상훈 씨는 이제 아버지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나에겐 세 명의 어머니가 계시다. 낳아주신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마지막으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어머니. 어렸을 적,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 게임에 빠져 학교를 빠지는 날도 빈번했고, 내 마음대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그곳은 바로 새어머니의 집이었다. 갑자기 만난 이 상황은 어린 나에겐 너무나 낯설고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활은 계모를 만나 갖은 구박과 수모를 견디는 어느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나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 걸까?

새어머니의 이중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잘해주셨지만, 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옷을 벗겨 밖으로 내쫓았고 나는 풀밭에서 잠들곤 했다. 또 군대 조교 출신의 아버지는 나를 강하게 키우신다며 매사에 엄격하셨다. 그런 아버지는 나에게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 당시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매일 매일 어두운 두려움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나의 상황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도 없었다.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왕따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쌓인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ADHD(주의력결핍 또는 과잉행동장애)라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한번은 사촌누나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내가 새어머니에게 매맞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바로 이혼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그 후 세 번째 어머니가 오셨다.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새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와 대화를 나누려고 애를 쓰셨다. 그런 새어머니의 행동은 가식 같아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초등학생 때였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오락게임을 하고 집에 들어갔을 때 새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라며 울면서 나를 안아주셨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라는 품을 느껴볼 새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그 순간 새어머니의 품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과 포근함을 처음으로 느꼈다.

나는 항상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새어머니를 통해 링컨하우스스쿨이라는 대안학교를 알게 되었고 거기에 입학했다.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나를 이해해주는 친구들과 사귀면서 내 마음은 조금씩 밝아져 갔다.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해외봉사를 가고 싶었다. 그러던 중 굿뉴스코 해외봉사 포스터를 보고 지원하게 됐다. 휴학해야 하는 장기 봉사라서 아버지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웃을 수 없었던 어두운 과거를 딛고 피해의식을 극복한 것만으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아버지는 나에게 무서운 존재였지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는 정말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안학교에서 친구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면서 조그마한 행복을 맛보았는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해외봉사에 가서 좀 더 넓은 세계를 배우고 오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허락해 주셨고 나는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지원했다. 지금껏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나보다 훨씬 불행하고 열악한 형편 속에서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는지 그것이 매우 궁금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런 마음을 품고 남부아프리카 스와질란드로 떠났다.

 

IYF 스와질란드 홍보영상을 만들던 중 만지니 지부 앞에서 동료 단원들과 함께 찰칵!(가운데 파란 티셔츠에안경 쓴 이가 필자)
IYF 스와질란드 홍보영상을 만들던 중 만지니 지부 앞에서 동료 단원들과 함께 찰칵!(가운데 파란 티셔츠에안경 쓴 이가 필자)

인생의 자동문

스와질란드에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은 대통령이 아닌 국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를 포함한 열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가 이렇게 먼 나라 아프리카까지 왔는데 스와질란드에서 왕이라도 만나 악수는 해야 하지 않겠냐며 우리 단원들끼리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IYF 홍보를 하던 중 대학교 졸업식 행사에 국왕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우리 단원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다같이 그 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그라시아스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단원들이 있어서 우리가 졸업축하 기념행사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요청했더니 처음엔 탐탁지 않게 보다가 리허설 무대에 오르게 해주었다. 그런데 관객들의 반응이 정말 대단했다. 외국인이 그 나라 말로 노래를 부르는 데다 현지인처럼 발음도 좋다며 우리의 노래를 듣고 관객들은 기뻐하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오는 순간, 왕과 정부관계자들이 도착해 들어오고 있었다. 행사 진행팀에서 다시 노래해 달라고 부탁해서 왕과 부총리 앞에서 다시 노래를 불렀다. 스와질란드 국왕께서는 “누가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냐” 하시며 우리를 반겨주셨고 악수를 청했다. 정말 꿈같은 순간이었다. 그전에 그냥 했던 말이었는데, 우리 앞에 현실로 바로 이루어졌다.

자동문은 멀리서 보면 굳게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동문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을 때 자동으로 열리는 것처럼 내 인생의 관문 또한 자동문과 같았다. 단지 그 한 걸음을 내딛지 않았을 뿐. 나에게 도전은 너무 막연하고 무모해 보였지만, 스와질란드 국왕을 만난 것을 계기로 도전하는 법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보다는 먼저 무슨 일이든 일단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다.

 

왕비궁에 초대받은 굿뉴스코 단원들이 스와질란드 왕비 앞에서 댄스를 선보이고 있다.
왕비궁에 초대받은 굿뉴스코 단원들이 스와질란드 왕비 앞에서 댄스를 선보이고 있다.

스와질란드에서 만난 아버지

처음 나의 아프리카 생활은 설렘과 기대로 시작했다. 해외봉사를 온 만큼 ‘지부장님 말씀도 잘 듣고 최선을 다해보자’는 마음으로 초기에 내 나름대로 많은 계획들을 세웠다. 그중에 하나가 언어습득이었다. 그래서 넉 달 동안 다른 단원들은 잘 때 나는 혼자 일어나서 영어공부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인 과 영어로 대화하거나 캠프진행을 준비하면서 영어에 대한 부담은 계속 늘어갔고 심지어는 현지인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실수하고 문제를 일으키면서 한국에서는 몰랐던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매일 지부장님께 야단을 맞았다. 지부장님께 혼날 때마다 주눅이 들기도 하고 너무 속상했다. 지부장님이 나를 책망하실 때마다 늘 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일을 못하면 배우면 돼. 그런데 배울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지적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닫으니까 배우지 못하는 거야. 그럼 더 이상 발전은 기대할 수 없어!”

지부장님의 말을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하던 내게 그 말씀은 충격적이었고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부장님과 이야기를 하게 됐다.

“지부장님이 우리를 보고 이 세상의 리더라고 말씀하실 때는 희망이 생기고 힘이 났는데, 생각 안하고 이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책망하실 때는 어떤 일을 해도 기운도 안 나고 주눅만 들어요. 너무 나무라기만 하시는 것 같아요. 솔직히 지부장님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그래 너는 답답하고 부족한 사람이야. 그런 실수와 부족함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 너를 책망하는 것은 너를 넘어뜨리려는 게 아니야. 그런 네 모습을 솔직히 인정하고 배워서 다시 리더의 마음을 가지면 되는 거야. 그래서 꾸중을 들어도 너는 여전히 장래의 훌륭한 리더가 맞아. 내가 무뚝뚝한 사람이라서 너희에게 자세하게 표현하지 못한 부분은 미안하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지부장님을 보면서 한없이 딱딱할 것만 같던 지부장님의 속마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지부장님의 행동 하나, 말 한 마디에서 지부장님이 우리를 얼마나 아껴주시는지에 대한 사랑과 마음이 느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부장님도 군대시절 조교 출신이셨다. 그래서 성격이나 말투가 아버지와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어보게 됐다. ‘나 같은 문제아를 지금까지 사랑으로 키워주셨구나. 이런 나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겉으로만 보이는 무섭고 두려운 모습이 아버지의 전부가 아니라 그 내면의 마음속에는 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 가까이 있을 때는 전혀 몰랐다가 먼 낯선 땅, 남부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 와서야 아버지의 진짜 마음을 만났다. 사람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된 내 인생에 앞으로 어떤 변화가 펼쳐질지 기대된다.

함께 활동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동료들과 나미비아 사막에서
함께 활동하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동료들과 나미비아 사막에서

이상훈
15기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으로 스와질란드에 다녀온 이상훈은 현재 경남대학교 기계공학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버지와 깊은 갈등을 겪었지만, 해외봉사를 다녀온 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그는, 요즘 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워진 것이 느껴져서 행복하단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부르는 테너가 되고 싶다는 그는 오늘도 밝고 활기찬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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