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 북경대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의 탄탄대로에 진입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느끼는 학업과 경쟁의 압박감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정상적인 생활에서 엇나가고 말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 다니며 밝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 내 인생 변화의 시점, 그 결정적인 순간을 이야기하고 싶다.

 

칭찬의 달콤함이 좋아서

나는 10살 때 어머니를 따라서 중국에서 살게 되었다. 중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북경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입학과 동시에 꿈이 생겼는데 ‘중국 최고의 인재들에게 인정받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꿈을 이루려고 모든 수업을 열심히 준비했고, 중국 학생들 앞에서 과제발표를 잘해서 교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나는 그 달콤한 칭찬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나는 여기 있는 다른 한국 학생들과 달라. 그 어떤 중국 학생들보다 잘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멀리했다. 나 자신을 주위의 다른 학생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며, 고독한 대학생활을 보내기 시작했다.

 

100점 만점에 7점이 나의 본실력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수강신청 기간이 되었다. 나는 그때 북경대학교 내에서도 어렵다고 소문이 난 ‘영문학’ 수업을 신청했다. 그때 내 머리 속에는 ‘나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소문대로 영문학 수업은 정말 어려웠고, 중간고사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충격적인 점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100점 만점에 7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점수를 받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기말고사에서도 이런 점수를 받는다면 낙제할 테고, 그럼 한국에서 매년 받는 장학금도 못 받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그 점수가 객관적이고도 정확한 나의 영어실력이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낙제를 피할 방법을 찾았다.

고민을 하던 중 휴학이 생각났다. 북경대학교는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한 휴학을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휴학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휴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심리체크 설문지를 작성하는데 ‘아침에 기분이 좋은지, 밤에 기분이 좋은지’처럼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라서 그냥 마음에 있는 그대로 체크했다.

결과는 우울증. 휴학을 할 방법으로 찾은 병원에서 나는 병을 알게 되었고, 우울증 진단서를 학교에 내고 휴학을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떤 날은 8일 동안이나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알 수 없는 떨림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찾아왔다

다음 학기가 되어 복학을 하고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몸과 얼굴근육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심할 때는 온몸이 떨려 잠을 잘 수 없었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심한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에게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혼자 이 문제가 왜 생겼는지 생각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 몸이 떨리지?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공안들일까, 아니면 조직?’

얼굴근육이 떨릴 때면 마치 모스 부호처럼 나에게 신호를 보내 메시지를 전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하고 더 이상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학교를 다닐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아진 나는 201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 몸이 떨릴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해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했다. 내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고, 불안감에 밤새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의사가 말라리아 환자라고 하면 말라리아 환자예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평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 내 이야기를 하셔서 나는 그분과 상담을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목사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인철아, 내 이야기를 잘 들어봐. 만약 네가 네 자신이 암 환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런데 의사는 네가 말라리아 환자라고 한다면, 너는 암 환자일까, 말라리아 환자일까?”

“의사가 말라리아 환자라고 하면 말라리아 환자예요.”

“그래, 네 생각에 아무리 암 환자 같아도 의사가 말라리아 환자라고 한다면 너는 말라리아 환자야. 너는 의사의 말을 100% 믿어야 해. 의사의 말을 100% 믿는다면 내가 느끼는 감각과 내 생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렇게 상담을 받는 동안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은 말라리아 약을 먹으면 금방 낫는 것처럼, 내가 목사님 말씀을 100% 믿으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도 내 속에는 끊임없이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지만, 목사님과만나 상담을 하면서 내 생각보다 목사님의 말씀을 믿었다.

참 신기하게도 목사님과 상담을 나누다 보면 내게는 없던 평안한 마음이 내 속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는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어디로 가든 엄마를 믿고 안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사랑을 내 삶 속에서도 발견했다.

내게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을 때도 부모님만큼은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셨다. 나를 진정으로 위하고 사랑하는 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사님의 말씀은 나를 위하고 사랑해주는 말씀이었고 쉼터였다. 그렇게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행복

나는 현재 밝고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직장을 다니는 등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목사님을 찾아뵙고 의논했다. “저는 아직도 부족한 점들이 많은데 결혼을 해도 될까요?”

“그럼, 지금은 아무 문제 없잖아? 사람이 살다보면 감기에 걸릴 때도 있는 것처럼, 마음도 병에 걸릴 때가 있어. 하지만 나으면 아무 문제 안 돼.”

그리고 우리 부부의 결혼식 때 목사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식이 끝나고 목사님과 우리 부부가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내가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이 사진 찍을 때 제 옆에 오셔서 인철이 참 좋은 아이야, 인철이 참 좋은 아이야. 이 말씀을 두 번 하셨어요. 아버지께서 해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 북경대학교를 다닐때는 행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나의 경쟁상대로 여겼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나는 존재처럼 보였고, 끝이 없는 경주 속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군중 속에서 외롭게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가까이에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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