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외교관협회 부회장 로살린다 티로나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여성이란 이유로 숱한 차별을 겪은 티로나 여사. 그러나 여성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신념과 업무에 대한 애착으로 그 모든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잊지 못할 스승으로 꼽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소개한다.

 

로살린다 티로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7살에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은 끝없는 배움의 연속’이라는 지론을 갖고 공직생활 틈틈이 태국의 출라롱콘대, 미국 조지타운대, 독일 공공정책연구소 등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졸업식 연설을 위해 모교를 찾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잊지 못할 세 교수님들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언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의 <투머로우>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현재 필리핀외교관협회 부회장으로 있는 로살린다 티로나입니다. 저의 조국 필리핀과 필리핀 사람들에게 한국은 특별한 나라입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필리핀에서는 7천 명이 넘는 군인을 파병되어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지금도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그 사실을 기억하며 자랑스러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희 시숙부님도 11년 동안이나 주한 필리핀 대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교수에서 최연소 대사가 되기까지

태국,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미국, 스위스, 부룬디, 에티오피아, 말라위…. 제가 예순다섯에 은퇴할 때까지 38년 동안 필리핀 외교부 소속으로 일하면서 근무했던 나라들입니다. 그 중 23년은 대사로 무려 26개 나라에서 근무했으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지요. 그 경험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요즘은 젊어서부터 일찌감치 외교관이 되겠다는 인생의 목표를 품고 공부하는 청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외교관이 되기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부터 했습니다. 교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직업이라는 게 저의 생각이었거든요. 정치학이 주전공, 영문학이 부전공이었던 저는 마닐라의 여러 대학에서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쳤습니다. 시험 때면 저는 절대 객관식이나 OX 문제를 내지 않았습니다. 주제에 맞춰 에세이를 쓰는 서술형 문제만을 출제했습니다. 학생들이 쓴 답안지를 모두 모으면 가방 2개가 가득 찰 정도였습니다. 자가용이 없어 항상 그 답안지 가방을 들고 버스로 출퇴근을 해야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탄 버스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시험지는 사방팔방으로 흩날리고 저 역시 거의 죽을 뻔했지요. 그 사실을 안 남편은 제게 당장 일을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간지에 실린 외교관 시험 광고를 오려다가 저한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차라리 이 시험에 응시해 외교관이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기본적으로 힘들지는 않으니 말이야.” 외교관이 힘든 직업이 아니라는 건 남편의 오판이었습니다. 다양한 국가와 문화권 출신으로 제각기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외교관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외교관은 평범한 직업이 아닙니다.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일입니다. 27살에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저는 이후 순조롭게 진급해 대사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42살, 필리핀 외교부 내 최연소 대사였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도 많이 받았지만, 여성도 남성만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외교관의 첫째 덕목은 신속함

외교관은 흔히 생각하듯 화려하기만 한 직업은 아닙니다.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요구되는 역량은 바로 ‘신속함’입니다. 업무처리도, 상황파악도 빨라야 하고 갑자기 출장명령이 떨어지면 10분 안에 준비를 마치고 바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교관 중에서도 특히 대사는 국가 원수를 대신하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대사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에는 무거운 책임이 뒤따릅니다. 본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결정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어야 하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외교관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저는 ‘외교관이란 군인보다 더 힘든 직업이다’라는 조언을 하곤 합니다.

제가 외교관으로 성장하기까지 도움을 준 선배들도 많습니다. 특히 지난 3월 작고한 레티시아 라모스-샤하니Leticia Ramos-Shahani 여사는 제게 훌륭한 롤모델이었습니다. 호주 대사와 UN 사무차장을 역임한 샤하니 여사는 고故 피델 라모스Fidel Ramos 대통령의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함께 중요한 회의를 할 때면 그녀는 늘 차이코프스키나 베토벤, 쇼팽 같은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제가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하도록 하려는 그녀만의 훈련법이었던 것이지요.

새로운 나라로 파견되기 전, 저는 반드시 그 나라에 대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야 그 나라에 갔을 때 쉽게 적응할 수 있으니까요. 무작정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수영하는 법을 충분히 알고 물속에 뛰어든 셈이지요. 책은 제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나라 국민들에게 기여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와 그 나라 사이에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며 두 나라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습니다.

 

네팔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네팔 대사로 근무하던 시절

한마디에 전쟁이 터지는 일촉즉발 상황에서

인생의 절반을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겪은 우여곡절도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이 베트남의 배타적 경제수역(자국 연안에서부터 200해리 내의 모든 자원에 대해 독점적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국제법 상의 구역)에 석유 굴착기를 설치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베트남은 ‘이곳은 우리 구역인데, 왜 굴착기를 설치했느냐?’며 즉각 항의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내의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 대사들을 모두 불러 모았는데, 제가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같은 지역공동체에 소속된 만큼 베트남 측은 다른 회원국들이 소설 <삼총사>의 주인공들처럼 ‘All for One, One for All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를 외치며 베트남을 옹호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저마다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베트남의 국익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회원국들의 입장이었습니다. 베트남은 회원국 대사들에게 지지를 요청하는 한편, 중국을 협상테이블로 불러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들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이, 베트남 외교부 건물 밖에서는 162명이나 되는 기자들이 ‘아세안에서 어떤 성명을 내놓을까?’를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지시사항도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에 베트남 편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중국 편을 들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확률은 50 대 50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과 중국 간에 우호와 안정이 유지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 협상이 공정한 것이라면 중국은 즉각 베트남 수역에서 석유 굴착기를 철수시켜야 합니다.”

제 성명은 ‘뉴욕 타임즈’ ‘헤럴드 트리뷰트’ ‘뉴스위크’ ‘타임’ 등 세계적인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이에 중국은 결국 굴착기를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 필리핀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외교관의 언행은 자칫 큰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본국 정부에 ‘상황이 이러저러한데,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냐?’고 물으면 ‘알아서 결정하라’는 답변이 올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는 늘 제가 믿는 하나님께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외교부에서 비서관으로 일하던 지난 2000년, 경복궁과 판문점을 방문한 티로나 여사.
외교부에서 비서관으로 일하던 지난 2000년, 경복궁과 판문점을 방문한 티로나 여사.

내 생에 가장 큰 보람은 리더를 길러낸 일

65살의 나이로 은퇴한 뒤, 저는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필리핀의 15대 대통령인 베니그노 S. 아키노 3세는 재임기간인 2010~2016년에 모두 17명의 대사를 새로 임명했는데요. 그 중 14명이 제가 가르친 제자들이었습니다. 스승으로서 참으로 뿌듯한 일이었지요. 두테르테 대통령도 50여 년 전 제가 대학에서 가르쳤던 학생입니다. 저는 그에게 ‘겁쟁이로 사느니 영웅으로 죽는 게 낫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려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자신과 남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리더는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바로 신뢰입니다. 리더라면 아무리 큰 권력이나 많은 재물을 준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필리핀 국민은 같은 필리핀 국민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필리핀 국민들은 필리핀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잘되면 더 잘되도록 도와주고 밀어주기보다 서로 발목을 잡고 끌어내리기에 바쁩니다. 이를 가리켜 영어로는 ‘게 같은 정신상태crab mentality’라고 부릅니다.

바닷게들을 잡아서 통에 담아두면 한 마리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한 마리가 빠져나가려고 하면 다른 바닷게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쉽사리 남에게 의지하며 조금만 힘들면 포기해 버리는 식민지근성이 여전히 필리핀 문화에 깊숙이 남아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어떤 마인드를 가졌느냐에 따라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범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성공한 지도자가 되길 바랍니다.

외교관으로서의 인생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저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똑같이 그대로 걷고 싶습니다.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상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큰 부를 쌓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이 성장해 외교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입니다.

마지막으로 <투머로우> 독자들에게 이 한마디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제는 지나간 꿈일 따름이고, 내일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사십시오. 여러분의 어제는 행복한 꿈이 될 것이고, 내일은 희망 찬 환상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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