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한국장학재단 수기, UCC공모전 수상작
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저를 두고 생긴 말인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동가숙 서가식 하며 자랐습니다. 그때그때 어른들 필요에 따라 아버지에게로 갔다가, 엄마에게로 갔다가 하면서 말입니다.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은 엄마의 재혼가정이었는데 저 말고도 아이가 네 명이 더 있었고, 아저씨와 엄마는 시장에서 하루하루 장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분명 엄마도 가정경제의 한몫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엄마는 항상 가족들 앞에서 저 때문에 눈치를 보셨습니다. 그 속에서 그냥 제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갈 정도의 실력도 아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을 포기하고 돈이나 실컷 벌어보자 하며 엄마의 집을 벗어나 독립하였습니다. 그 당시 엄마의 눈물이 제 앞길을 가로막고 섰습니다. ‘꼭 너하고 똑같은 자식 낳아 길러봐라. 그러면 엄마 마음이 어떨지 알 거다’ 하며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자고 애원하는 엄마의 팔을 뿌리치고 도망을 칠적에는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엄마 때문에 제가 휠씬 더 불행하다고 생각했고, 엄마가 미웠고, 재혼한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으니까요.
점점 어두워지는 딸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책 백 권만 들고 시집오라고 하는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엄마는 나의 결혼을 반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엄마 보란 듯이 역심을 품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딸아이를 낳았습니다. 엄마의 예언대로 나랑 똑 닮은 딸아이를 낳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아이의 마음도 몰라주는 엄마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엄마 잃은 아이의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나였으므로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아이만은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혹독한 IMF를 겪어내고 맞벌이를 시작했습니다. 딸 일곱 살, 아들 네 살이 되던 해부터 일을 시작했고, 빚을 갚느라 10여 년 정도는 일과 돈만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점점 얼굴표정이 어두워지고, 사소한 감정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일년 내내 소매가 긴 셔츠를 교복 위에 덧입고 다녔는데 저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또래 아이들보다 통통한 아이가 자신의 외모가 불만스러워 셔츠를 덧입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3학년이 되면서 학교를 가지 않으려는 날들이 잦아졌습니다. 무턱대고 아프다고 하거나 짜증을 냈고 가끔은 학교에 간다고 저를 안심시킨 후 제가 출근하고 나면 다시 교복을 벗어 버리는 등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일이 저에겐 아주 큰일이 되었습니다.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 딸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회의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는데 아이 담임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시각까지 아이는 등교하지 않은 상태였고, 이제 더 이상 무단결석 일수가 더해지면 졸업을 제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선생님 말씀이 저의 심장을 쿵 떨어트렸습니다.
그날 오후 처음으로 딸의 학교를 찾아갔고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학교 내에서 왕따를 당했고, 문구용 칼 등을 이용해 이미 수차례 손목에 자해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자해한 사실을 숨기려고 아이는 소매가 긴 셔츠를 입고 다녔던 것입니다. 가해자 아이들, 그 부모들과의 집요한 싸움, 아이의 병원 치료 과정을 거치면서 겨우 중학교 3년을 마쳤고 아이는 자퇴를 희망하였습니다. 예전의 저와는 다른 이유이긴 하였지만 딸 또한 공부를 중도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겁이 났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죗값을 아이가 저 대신 치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무서웠습니다.
아이는 컴컴한 방에만 있었습니다. 공부는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조용히 혼자만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가 잠든 시간이면 아이는 조용조용 움직이며 제 삶을 살았고,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이면 아이는 조용히 빛을 외면하였습니다.
따뜻한 손을 잡고 나와 빛을 보다
딸이 열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저는 아이를 자꾸 바깥으로 불러냈습니다. 아이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속속들이 인지하지 못했던 죄책감으로 아이에게 미안했는지 조금이라도 더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고자 회사에서 참석해야 하는 교육, 세미나, 바이어 상담회 등 낮 동안 잠시나마 시간 틈이 생기면 아이를 불렀습니다. 부산세관에서 국가별 FTA 대응설명회가 있던 날도 저는 아이를 불러 함께 설명회를 들었습니다. 바깥세상의 환함을 인지시켜 주고 싶었고, 딸의 손을 따뜻하게 마주 잡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아이의 눈을 마주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세관 내 관세 행정관이 입고 있는 멋스런 정복, 무역이라는 분야가 주는 막연한 설레임이 연하게 아이의 가슴을 두드렸던 모양입니다. 살고 싶은 세상을 발견한 아이는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2014년 부산대학교 경제통상대학 무역학부에 합격하였습니다.
우수한 수능성적으로 한국장학재단에서 수여하는 인문100년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고 존재만 해 달라고 빌었던 아이였는데 믿을 수 없는 큰 선물을 우리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딸에게도 인문 100년 장학금은 장학금 그 이상의 의미를 주었고, ‘너에겐 아무 잘못이 없으니 이제 그만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도 좋다’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컴컴한 동굴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아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세상을 걸어 다니고, 책을 사고,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영어 듣기를 따라 하는 등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딸과 함께 어려움을 겪어내면서 제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나 때문에 엄마의 마음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너무 아팠겠구나….
아이는 한국장학재단 인문 100년 장학금을 수여하게 됨으로 대학교 4년 동안 일정 성적을 유지하였습니다. 이제 한 학기만 남겨놓은 4학년이 되었고 토익 970점, 국제무역사 1급, 무역영어 1급, 물류관리사 자격증 준비를 차근차근 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는종합 무역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이루어 나가려 합니다. 한국장학재단의 인문 100년 장학금 수여가 아이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딸의 미래는 밝고 따뜻함이 가득한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