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에서 벗어나

방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장 기능이 멈추는 병에 걸리기까지 지독히 고립되었던 애니메이터가 방을 박차고 나와 사람들에게 다가가며 ‘함께’ 사는 행복을 말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어렸을 때부터 이해력이 부족하고 학습능력이 떨어져서 학교에서 자주 놀림을 받았다. 수업 시간이 제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발표나 읽기를 시키면 부끄러워서 숨고만 싶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 친구들이 놀리지 않으면 나는 항상 그림을 그렸다. 그것밖에 잘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늘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항상 땅을 바라보고 조용히 침묵하며 지냈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초리가 싫어서 어느 날부턴가는 말하지 않고 혼자 지내기로 결심했다. 친구가 없다보니 계속 그림만 그려댔다. 수학시간에도, 영어시간에도, 자습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연습장을 들고 다니며 그림만 그렸다. 그러자 아이들이 나를 ‘그림 천재’라고 불렀다. 그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그림을 그려주면 기뻐하며 받아갔는데 신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로부터 배신감을 느낄 때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고 오로지 그림만 연구하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남들보다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교수님 말씀에만 집중했다. 자연히 친구들, 선배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그러자 그들도 나를 무시했다. 나는 사람들과 말하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속으로 ‘나는 너희보다 위에 있고 내 위에는 교수님이 계셔. 나는 꿈이 있기 때문에 교수님이 사는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 거야. 너희들에겐 그런 비전이 없지?’라고 생각했다.

2학년 때부터는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고 방학 중에 배우고 일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회사에 연락하면서 그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어느 감독님을 알게 됐는데 감독님이 나를 인정해 주셨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며 프리랜서로 일하라고 하셨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집에서 본격적으로 일했는데 정말 행복했다. 감독님이 프로가 아닌 나를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하니 자부심이 생겼고, 꿈이 애니메이터에서 감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 방이 작업실이 되어 그곳에서 하루 종일 먹고 자고 일하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하시면서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라고 하시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가끔 외출을 해도 말을 하지 않고 살아서인지 가게에서 영수증 달라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참 이상했다. 그림만 그리면 만사 OK에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점점 삶이 피폐해져 갔다. TV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불행한 일들이 나에게 닥쳐오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시작해 1년 반쯤 지났을 때부터 몸이 아파왔다. 1주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을 때도 있었다. 심각한 상태라는 걸 느끼며 엄마와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장기능이 멈췄습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방치했습니까?”라며 화를 냈다. 링거를 맞고 조금씩 운동하면서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손목에 건초염 증상이 나타나 너무 아팠다. 마우스를 잡는 것도 젓가락질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열심히 해서 사람들에게 실력으로 인정받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우연히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아 출판사에서 만화책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내 방을 벗어나 움직이기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건강해질 것 같다며 부모님도 출근하는 걸 찬성하셨다. 처음에는 여러 사람들과 일하는 게 적응이 안 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말도 잘 못하고 누구와 친해지지도 못하는데 어쩌지?’하는 생각에 누가 말을 걸어와도 조심조심하며 지냈다. 두 달이 지나도 친해지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말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나대로 살자’ 하며 반쯤 포기하고 있는데 한 팀으로 일하는 직원이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밥을 먹을 때도, 휴식 시간에도 항상 내 옆에 붙어 있으면서 나를 챙겨주려고 애썼다. 솔직히 나는 불편했다. 뭔가 맞춰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누군가와 함께 일하고 이야기하는 게 즐겁지 않을까?’ 나도 달라지고 싶어서 말도 걸어보고 나름대로 노력도 해보았지만 너무 부자연스럽고 어색했다.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에 좌절하지 말고 계속 시도해 봐요. 길을 찾다보면 분명히 길이 보일 거예요.” 팀장님의 이야기가 신기하게 힘과 용기를 주면서 ‘그래,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한번은 ‘안 되겠다, 못하겠다, 내가 이런 사람인 줄 알면 나를 싫어할 거야’ 하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는데 팀장님이 아주 편하게 대해주며 내 고민을 다 들어주셨다. 나도 정말 변화하고 싶었기 때문에 망설이다가도 주위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표현했는데 그때마다 조언도 해주시고 이야기도 많이 나눠주셨다. 방에서 혼자 고립되어 지냈던 ‘유지은’도 있지만 새롭게 꿈꾸는 ‘유지은’ 또한 있다는 생각에 내 속에서 희망이 꿈틀거렸다. 꿈은 이루어지는 과정이 있기에 넘어지고 실수하기도 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과 자유롭게 마음을 주고받고 교류하는 유지은이 될 거라는 기대감도 생겨났다.

나는 내가 고립된 사람이란 걸 전혀 몰랐다. 못나고 능력 없는 내 모습에 갇혀 그 안에서 보고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게 전형적인 고립의 증상이었다. 동료들은, 여전히 더듬거리는 나를 기다려주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동안 내가 먼저 포기하고 좌절했던 게 보였다. 모든 게 서툴고 매끄럽지 않지만 팀장님의 말대로 ‘함께하는 나’를 향해 계속 시도하면서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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