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그룹 이기현 회장

‘사람 팔자는 여러 번 바뀐다’고들 한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그때마다 곁에 늘 책이 있어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경영자가 있다. 산하에 인쇄소와 출판사 등 7개 기업을 둔 현문그룹의 이기현 회장이다.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의 종류도 외상장부, 잡지,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와 그 책들 사이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얽혀 있을까?

 

(주)현문의 인쇄소 내부에 자리한 필름 보관소에 선 이기현 회장. 출판제작과정이 컴퓨터 시스템화되면서 필름출력 시대는 옛추억이 된 지금이다. 하지만 그에게 먼지 내린 필름보관소는 보물창고에 방불한다. 1990년 창업한 회사를 연매출 100억 원대의 출판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한국을 문화나라로 탈바꿈시킬 ‘문화건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주)현문의 인쇄소 내부에 자리한 필름 보관소에 선 이기현 회장. 출판제작과정이 컴퓨터 시스템화되면서 필름출력 시대는 옛추억이 된 지금이다. 하지만 그에게 먼지 내린 필름보관소는 보물창고에 방불한다. 1990년 창업한 회사를 연매출 100억 원대의 출판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한국을 문화나라로 탈바꿈시킬 ‘문화건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경기도 고양시 장항동의 출판단지는 어림잡아 1,500여 개의 인쇄소가 몰려 있는 우리나라 출판업계의 메카다. 직원 수와 매출 면에서 웬만한 대기업 못지 않은 대형 인쇄소부터 작은 인쇄기 한 대로 조촐하게 운영하는 인쇄소까지,

규모와 외형은 제각기 다르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 최고의 인쇄물을 만들겠다’는 일념 아래 이곳의 인쇄기들은 오늘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차게 돌아가는 중이다.

이기현 회장이 창업한 현문그룹(이하 현문)도 이곳에 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매년 꾸준히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이다. 하루 최대 10만 부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인쇄능력과, 인쇄 및 출판작업이 한곳에서 가능하다는 점은 현문의 최대 강점이다. 책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문은 현재 약 300여 개의 출판사를 고객으로 두고 있다.

외주제작 외에도 현문은 자체 출판사를 두고 좋은 책을 기획·제작하는 데도 마음을 쏟고 있다. 지난해 미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의 전기傳記 <힐러리의 삶>,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부가 넘게 팔린 <갈매기의 꿈> 한국어판도 현문에서 만든 책이다. 1990년 창업 이래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책을 만들까?’를 놓고 고민해 온 이기현 회장. 그 출발점에는 한 권의 외상장부가 있었다.

 

아직도 마음의 책꽂이에 꽂힌 아버지의 치부책

지난 2월, 이기현 회장은 자서전 <아버지의 치부책>을 냈다. 치부책置簿冊은 돈이나 물건이 드나든 것을 기록하는 책으로, 요샛말로 하면 외상장부다. 출판업체 대표로서 숱한 출판사와 편집자들을 상대해 온 그가 책제목을 감각적으로 붙이면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뚝뚝하게 책 제목을 붙였을까?

‘어린 시절, 시골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시던 아버지의 치부책이 내 마음의 책꽂이에는 그대로 꽂혀 있기에, 그렇게 제목을 달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야기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도 횡성에 터를 잡고 살던 그의 가족은 집과 논밭을 모두 처분해 충북 단양으로 이사를 갔다. 그 돈으로 기와집을 짓고, 남은 돈으로 농사 지을 땅을 알아보던 그의 아버지에게 누군가 방앗간을 인수할 것을 권했다.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물레방앗간이 아니라 증기터빈을 갖춘, 당시로서는 최신식 방앗간이었기에 인근에서 손님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문제는 수금이었다. 손님의 절반이 외상손님이었다. 근근이 농사를 지어 입에 풀칠하기에도 빠듯한 사람들에게 외상값 내놓으라고 닦달할 만큼 그의 아버지는 모진 성품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소년 이기현은 어느 날 아버지에게 당돌한 제안을 했다. 자신이 외상값을 받아오겠다고 말이다. 자식의 성화를 못 이긴 아버지는 그에게 치부책을 건네주었다. 대신 ‘외상값을 안 갚은 지 오래된 집에만 가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나 외상값 수금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특유의 오기를 발동해 치부책에 적힌 집들을 돌아다니기를 한 달 여, 그는 목표의 3분의 1 가량을 수금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아버지는 그에게 수금사원 역할을 맡겼다.

“돌이켜보니 그때 고객들을 만난 경험이 지금 제가 사업을 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는 ‘일단 일을 맡으면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하라’고 늘 강조하셨거든요.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면서 고객들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돈이나 쌀 등 수입이 들어오면 아버지는 맨 먼저 일꾼들 봉급으로 줄 몫을 따로 챙겨두었다. 아무리 급하게 낼 돈이 있어도 그 돈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주인이라면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경영원칙이었다. 이 회장 역시 회사에 수입이 생기면 직원들 봉급부터 먼저 챙긴다. 자신보다 아랫사람을 먼저 생각하던 선친이 남긴 가르침이었다.

 

잡지 한 권이 심어준 최고의 꿈

1969년, 10대 후반의 소년 이기현은 달랑 옷가방 하나만을 들고 상경했다. 그가 갈 곳도, 오라는 이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온 계기도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그가 중학교 2학년이던 해 가을, 극심한 가뭄이 전국을 덮쳤다. 방앗간 손님이 눈에 띄게 확 줄어들자, 그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졸랐다. ‘학교를 그만두고 도시로 가서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방앗간 수금사원을 하며 쌓은 경험이나, 먼저 취직해서 돈을 벌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들이 들려주던 이야기도 크게 한몫했다. 아버지는 호되게 야단을 쳤지만 자식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나중에 일이 잘못돼도 부모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가 일하게 된 곳은 어느 소도시의 작은 금은방이었다. 그의 인생은 여기서 또 한 번 방향을 튼다. 서울에서 내려온 금은세공업체 직원이 ‘최신시계 광고가 실려 있으니 주문할 때 참고하라’며 외국잡지 한 권을 두고 간 것이다.

 

“인쇄물이라고 해 봐야 흑백 교과서나 조잡한 ‘쥐 잡기’

‘간첩신고’ 포스터가 고작이었어요. 반질반질한 종이에 화려한 컬러 사진이 잔뜩 실린 그 잡지가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나도 저런 멋진 책을 만들 인쇄기술을 배워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은 망우리의 한 인쇄소였다. 기름과 잉크로 범벅이 된 공장에 딸린 쪽방에서 지내며, 상사들의 양말을 빨고 난롯불을 피우는 등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최고의 인쇄기술자가 되겠다는 꿈이 분명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런 기현을 기특하게 여긴 인쇄공들은 자신이 터득한 기술을 하나씩 전수해 주었다.

“지금이야 출판의 거의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원고에 맞춰 활자를 일일이 골라 판을 만들어 책이나 신문을 찍었어요. 덕분에 손에는 새카만 잉크가 마를 새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최고의 인쇄기술자가 될 수 있다는 꿈 때문에 마냥 행복했습니다.”

열심히 배운 덕에 20대 초반에는 <충청일보>와 <조선일보> 등 대형신문사에서 앞다퉈 데려가려 할 만큼 훌륭한 인쇄기술자가 되었다. 벌써 40년 전 얘기지만, 그는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그 ‘총천연색’ 잡지를 여태 잊지 못한다.

 

고양시 장항동 출판단지에 자리잡은 (주)현문의 본사 전경.
고양시 장항동 출판단지에 자리잡은 (주)현문의 본사 전경.

위기의 돌파구, 고전에서 찾다

1990년, 이기현 회장은 서울 용산에 현문인쇄소를 세워 독립했다. 현문現文이란 ‘글로 표현한다’는 의미다. 그는 인쇄업의 본질을 ‘역사 디자이너’로 정의한다. 인간의 삶이나 생각 등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런 한계를 극복하고 삶과 생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글자요, 책이다. ‘현문’이란 이름에는 이런 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창업은 20대 중반부터 그가 품어온 꿈이었다. 물론 그가 ‘맨땅에 헤딩’ 식으로 창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쇄기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영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이에 영업사원으로 변신, 직접 현장을 뛰며 1년 만에 150군데의 거래처를 개척했다. 인쇄소에서 일하던 동생과 처남에게는 각각 인쇄기 수리기술과 제판기술을 익히게 한 뒤 창업멤버로 합류시켰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시작한 인쇄소였지만, 미처 생각도 못한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새로운 생각의 물꼬를 터주고 돌파구를 마련해 준 것은 역시 책이었다.

“1997년 불어닥친 IMF 금융사태는 정말 큰 위기였습니다. 환율이 폭등해 종이값이 두 배로 뛰었고, 경기가 나빠지면서 일감이 들어오지 않았거든요. 그 전 해에 10억 원이나 하는 최신 인쇄기까지 할부로 구입한 터라 적자가 계속되어 회사 문을 닫기로 했어요. 그때 위기를 넘게 해 준 것이 <사기史記>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이란 고사성어였습니다.”

‘기사회생’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중국 춘추시대에 편작이라는 명의가 있었다. 천하를 돌며 병자를 치료하던 그는 어느 날 괵나라 왕으로부터 갑자기 숨이 끊어진 태자를 살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편작이 가서 보니 태자는 죽은 게 아니라 잠시 혈이 막혀 숨을 쉬지 못할 뿐이었다. 편작이 침을 놓자 태자는 금방 숨을 쉬며 살아났다고 한다.

결국 그는 폐업을 철회하고 직원들과 함께 위기를 넘길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일본 진출을 제안했다. 그는 무릎을 쳤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인쇄비가 두세 배 정도 비쌌다. 마침 환율도 높아 거래가 성사되면 악재가 오히려 호재로 작용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비를 들여 제작한 샘플 40여 종을 갖고 일본으로 갔어요. 제작비는 절반이지만 종이의 품질이나 인쇄 완성도는 오히려 뛰어나다는 점을 앞세워 상대를 집요하게 설득했습니다. 그 결과 거래가 성사되었고, 매출이 전보다 두 배로 뛰면서 오히려 성장할 수 있었지요.”

현문의 도서보관실에 가득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이기현 회장의 인생을 되새겨보니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격언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누군가 만든 잡지 한 권이 그에게 전해진 덕에 그는 출판기업의 CEO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책들은 다시 또 누군가에게 읽히며 그 인생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세 유럽의 필사본 성경은 독일의 일반 근로자가 2~3년을 꼬박 일해야 살 수 있을 만큼 고가였다고 한다. 인쇄술의 발달로 우리 곁에 책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건 큰 축복이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이제는 책이 너무 흔한 나머지, 그 가치를 간과하고 사는 건 아닌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인생의 굴곡을 넘을 때마다 책에서 지혜와 영감을 얻었고, 그 책을 만들며 사는 이 회장이 행복해 보였다.

 

이기현 회장의 자서전 <아버지의 치부책> 에는 ‘출판은 흥행사업이 아닌 문화사업’이라는 신조 아래 좋은 책 만들기에만 몰두해 온 그의 인생과 경영마인드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이 CEO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5월호 리뷰를 보내주신 분들 중 5명을 선정해 이기현 회장의 책 <아버지의 치부책>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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