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인생에 한두 번 올까말까한 선택의 기로에서 쌀 사업에 온몸을 던져 한길을 걸어온 정병찬 대표. 그가 레드오션 시장인 농업 분야에서 성공과 행복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설렘’으로 도전한, 금쌀만큼 빛나는 마음가짐이 있었다.

보성특수농산은 어떤 회사인가요?

프리미엄급 농산물을 생산·가공·유통하는 회사입니다. 직접 농사짓고 가공해서 판매까지 하는 회사예요. 선친께서 운영하셨는데 중간에 부도가 났어요. 그래서 제가 경매로 낙찰 받아서 운영하게 됐습니다. 당시 저는 24살 대학생이었는데 휴학을 하고 농업 분야로 들어왔죠. 회사를 운영한 지 이제 13년 됐습니다.

 

쌀이 주품목인가요?

우리 회사는 여러 가지 품목을 생산하는데 보성특수농산은 뿌리가 되는 모기업입니다. 처음에는 회사 기반을 잡아야 하는 숙제 때문에 국내 농산물과 쌀에 집중을 많이 했고, 이후에 잡곡류와 수입곡물류 등 파생상품들을 개발해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가공상품으로 넘어가는 단계입니다. 그동안 저희 회사 제품을 판매해온 유통 채널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기 때문에 새로운 제품을, 국내에 소개가 되지 않은 상품까지도 제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종합식품회사’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가족과 함께 보성에서 살고 있는 정 대표는 아들과 같이 강아지 먹이 주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는 소탈한 아버지다.
가족과 함께 보성에서 살고 있는 정 대표는 아들과 같이 강아지 먹이 주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는 소탈한 아버지다.

아버님은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사실 아버님은 건설회사 대표셨어요. 현재 저희 공장 자리가 건설현장 자리였습니다. 공장 바로 앞에 있는 땅에서 간척지 공사를 하셨는데, 30년 정도 걸리는 대규모 공사다보니 원래 광주 분이시지만 보성에서 오랜 세월 농가들과 인연을 맺고 사신 거예요. 아버님은 공사가 끝난 후에도 광주나 서울로 가지 않으셨어요. 보성이 고향이 된 거죠. 건설현장에서 일하셨던 분들과 가족처럼 사시면서 ‘그동안 번 돈으로 이 고장 사람들에게 고소득을 올릴 만한 일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어요. 그러다 간척지에서 쌀농사를 지으니까 ‘30년 건설현장에서 일한 직원들과 계속 인연을 맺고 살자’는 마음으로 쌀공장을 시작하셨죠. 아버님은 ‘이익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신념으로 사신 분이에요. 조금씩 희생하고 주위 사람들을 도우며 살면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위기의 순간에 그분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부자는 아니셨지만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부자 마인드’를 물려주셨어요.

 

학업을 잠시 쉬고 농업에 몰두하는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아버님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이후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제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효도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모시고 사는 게 더 큰 효도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보성으로 갔지요. 물론 대학시절에 나름의 꿈도 있었어요. 국가고시에 합격해서 해보고 싶은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농업을 하겠다고 하자 친구들이 ‘열심히 공부해놓고 왜 시골로 내려가냐’며 모두 반대했어요. 그렇게 말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저를 부러워합니다.

보성특수농산의 ‘생미’ 브랜드는 두 가지 품종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먹는 멥쌀 종류와 반찹쌀 종류인데, 생미 멥쌀은 알이 깨끗하고 탱글탱글해서 씹는 맛이 탁월하고 반찹쌀은 찹쌀과 멥쌀의 중간 형태 품종으로 찰지고 식감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금쌀은 반찹쌀에 해당하며 계약 재배되어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에서 판매된다.
보성특수농산의 ‘생미’ 브랜드는 두 가지 품종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먹는 멥쌀 종류와 반찹쌀 종류인데, 생미 멥쌀은 알이 깨끗하고 탱글탱글해서 씹는 맛이 탁월하고 반찹쌀은 찹쌀과 멥쌀의 중간 형태 품종으로 찰지고 식감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금쌀은 반찹쌀에 해당하며 계약 재배되어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에서 판매된다.

 

형제들이 함께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네. 같이하고 있는데 분야는 나눠져 있어요. 아버님이 공장을 형님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가 경영을 맡게 됐고 형님들이 저를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형이 공장을 총괄하시고, 둘째 형이 농사를 짓고 셋째 형은 가공, 막내인 제가 경영과 판매·유통을 담당합니다.

 

가족 기업의 장단점이 있겠지요?

무엇보다 일하는 과정에서 피드백이 굉장히 빠릅니다. 각자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기 때문에 고객들로부터 불만사항이 제기되면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다른 직원들보다 강합니다. 안 좋은 점이라면 근무의 연속성이에요. 가족이다 보니 업무가 밤까지 이어지는 경향이 있어요. 또 회사의 방향을 제시할 때 약간의 개인감정이 섞이는 경우가 있는데, 분야는 다르지만 한 회사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정병찬 대표는 현재 가족과 함께 보성에서 살고 있다. 11살, 3살 된 두 자녀가 마음이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서이다. 서울에서 업무를 보는 날이 아니면 보성에 내려가 자녀들과 강아지 밥 주는 일로 아침을 시작한다. 확 트인 공간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야 창의력이 쑥쑥 자란다고 믿기에 ‘맘껏 뛰어놀고, 동물을 사랑하고, 친구들과 어울리고’를 강조한다. 대도시에서와 같은 문화적인 혜택은 누리지 못할른지 모른다. 하지만 자녀들이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들, 친구들과 가족 같이 지내면서 따뜻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쌀 외에 유기농 잡곡과 수입곡물(귀리, 렌틸콩, 치아씨드, 볶은 아마씨 등), 가공식품(곤약쌀, 떠먹는 군고구마, 크랜베리 고구마 등), 견과류 및 기타 수입식품 등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판매해 종합식품 브랜드로 발돋움하고 있다.www.sengmi.kr
쌀 외에 유기농 잡곡과 수입곡물(귀리, 렌틸콩, 치아씨드, 볶은 아마씨 등), 가공식품(곤약쌀, 떠먹는 군고구마, 크랜베리 고구마 등), 견과류 및 기타 수입식품 등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판매해 종합식품 브랜드로 발돋움하고 있다.www.sengmi.kr

특유의 차별화된 농업전략이나 기술을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차별화를 위해서라기보다 ‘생존’을 위해 남과 달라야 했습니다. ‘조기재배’를 했는데요, 말 그대로 빨리 심어서 빨리 수확하는 거예요. 쌀 사업은 그동안 죽 어려웠습니다. 좋았던 적이 없어요.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빨리 수확하든 남들과 다른 상품을 생산하든지 해야 했지요. 그래서 조기재배를 시작했는데 위험부담이 컸어요. 농사에는 ‘최적기’라는 게 있잖아요.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기에 좋은 온도와 시기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걸 깨지 않고는 회사가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험부담을 안고 남들보다 한 달 먼저 심었고 먼저 수확해서 햅쌀이 나오지 않을 때 팔기 시작했죠. 이후 다른 회사들도 조기재배를 하면서 또 다시 차별화할 방법으로 *푸드테크 기술을 들여왔습니다.

나노화시킨 금을 뿌리에서 흡수하도록 해 금 성분이 쌀에 들어가게 한 ‘금쌀’을 생산하기 시작했죠. 금쌀 포장지는 유명 디자이너 이상봉씨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진행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푸드테크: 기존 식품 관련 서비스업에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창출한 신산업을 말하며, 농업의 생산효율을 높이는 첨단기술로 개념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일식당 ‘스시조’에서 보성특수농산의 금쌀을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스시조’에서 저희 쌀을 쓰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가정에서 해 드시는 쌀만 판매해왔는데, 금쌀이 프리미엄 식당의 요리로 나온 거죠. ‘스시조’ 측에서 고품질의 식재료를 손님들에게 제공하고 싶다며 초밥용 쌀을 계약재배 해달라고 제안해 왔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무척 영광스러웠죠. 전문 셰프가 저희 쌀을 요리로 승화시킨 점과 고객들의 의견을 듣고 평가받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스시조
ⓒ스시조

고객들로부터 상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보셨나요?

물론이죠. 식품은 공산품이 아니어서 객관적인 지표가 없기 때문에 백 명 중에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너무 비싸요’ 하면 만족도가 낮다는 얘기예요. 2008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더 좋은 품종이 있다고 해서 재배해 테스트를 거쳤고, 품질이 월등한 것으로 나타나 제품화해서 판매했는데 고객들의 불만이 엄청난 거예요.

저희 쌀을 아는 분들은 그동안 익숙해진 맛이 있는데 그 맛과 달랐던 거죠. 결국 그해 농사는 실패로 돌아갔어요.

더 좋은 상품을 공급하려 했지만 고객들의 요구와 안 맞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내가 회사 브랜드와 상품에 대해 너무 자만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 좋은 제품이라고 자신했는데 고객의 평가는 반대로 나타났죠. 그때 제가 굉장히 겸손해진 것 같아요. 고객과 소비자는 항상 옳거든요.

 

고객을 위해 특별히 힘쓰시는 일이 있다면요?

우리나라에서 저평가되고 있는 농업을 산업화시켜보는 게 제 꿈입니다. 특히 고객들에게 표준화된 상품을 공급해 드리고 싶어요. 어제 먹은 귤과 오늘 먹은 귤 맛이 다를 수 있잖아요. 같은 지역, 같은 나무에서 나더라도 일조량에 따라 맛이 다릅니다. 그래서 농산물은 해마다 품질이 다른데 그게 고객만족도에 영향을 많이 줍니다. 환경적인 요인을 조절하기가 어렵지만 최대한 품질을 표준화시켜서 고객들에게 기대하는 맛의 상품을 제공하는 걸 숙제로 여기고 그 일을 위해 필요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운영하며 보람과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거창한 행복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가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제일 뿌듯합니다. 어머니가 주변 분들께 아들 자랑을 하며 좋아하시면 저도 행복하죠. 회사에서 파트너들과도 가족 같은 마음으로 지내는데, 직원들이 회사에 잘 정착해 비전을 가지고 즐겁게 생활하는 걸 보면 좋습니다.

사실 대단한 꿈을 가지고 농산물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소소하게 시작해 한발 한발 내디뎠는데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종종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해 봅니다. 과거보다 행복하다면 아주 잘살고 있는 거라고 믿고요. 제 자신이나 직원들이 ‘후회 없이 열심히 하자. 이익은 나눌수록 배가 된다’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몸소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서울에서는 마케터로 지내지만 보성에 내려가면 장화 신고 팔을 걷어붙이는 자연인의 모습 그대로다.
서울에서는 마케터로 지내지만 보성에 내려가면 장화 신고 팔을 걷어붙이는 자연인의 모습 그대로다.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저는 20대 때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도전이자 두려움이었죠. 나 개인의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인생이 걸려있는 기업의 일이다 보니 결정하기가 더욱 어려웠는데, 그 두려움을 ‘설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불투명한 나의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마음가짐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생을 거꾸로 그려봤었습니다. 50대의 내 모습, 40대의 내 모습, 30대의 내 모습…. ‘50대 때 이렇게 살려면 40대 때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40대 때 이렇게 살려면 30대 때는 이렇게, 20대 때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거꾸로 그리면서 갔는데, 최대한 구체적이고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산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깊이 사고한 데에서 대표님의 ‘거꾸로 인생계획’이 생겨난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은 어떻게 형성되었나요?

농사일은 새벽 5시에 시작해서 해 뜨고 더워지면 쉽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쉬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갖다가 해가 질 무렵에 다시 일하는데, 그 시간이 제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또 보성에서 서울까지 쌀을 납품하러 다녔는데 조금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남들이 자는 시간에 운전해서 갔습니다. 밤새도록 운전하고 가면 새벽 2시쯤 서울에 도착하는데, 졸지 않으려고 그 시간에 생각을 많이 했어요. 보통 운전할 때 음악이나 라디오를 듣잖아요. 저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거죠. 내가 했던 일들, 반성할 일은 없는지 돌아 보았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계획해 보았습니다.

지난 1월, 정병찬 대표는 대학생 해외봉사단 워크숍에 참석해 단원들을 격려하고 10kg 쌀 100포대를 기부했다. 평소 기업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는 사회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웃들을 돕는 일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특히 독거노인 문제와 다문화가정의 복지 및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다. 지역 주민으로 가깝게 지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갈수록 늘어나는 다문화가정의 이웃들이 가족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 대표는 지역 내 관련 기관을 통해 이들을 후원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다양한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외봉사단 대학생들에게 쌀을 기부하셨는데, 전 세계에서 1년을 봉사한 젊은이들을 보며 어떠셨나요?

매우 감동받았습니다. 저는 20대 때 그런 열정이 없었던 것 같아요. 봉사단 학생들이 활동을 정리하고 보고하는 행사를 준비할 때 그곳에 가보았는데 20대만의 열정, 20대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게 한꺼번에 제게 밀려오는 듯했습니다. 그들이 각 나라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고 왔다는 점이 의미가 큽니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름’을 이해한다는 거거든요.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들을 해보고 싶으신가요?

20대 때 저는 저를 둘러싼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환경을 벗어날 줄은 몰랐죠. ‘일탈’이라고 하잖아요. 젊었을 때 바람직한 일탈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해외에서 봉사하는 친구들처럼 다른 세계, 다른 문화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교류하며 지낸 지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젊었을 때 다양한 경험으로 견문을 넓히고 도전했다면 지금 훨씬 더 열린 사고방식을 갖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겠죠.

 

하시는 사업의 앞으로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희 회사는 현재 푸드테크를 도입해 진행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어요. 젊은 친구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벤처기업 및 제품에 투자해 같이 생산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만 가지고 와도 그것을 함께 연구하여 실현해볼 수 있어요. 미국 ‘임파서블 푸드’ 등의 회사에서는 야채로 만든 고기를 파는데 우리가 먹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 더 맛있어요. 푸드테크가 가미된 기술이죠.

외식이 늘어나는 현 시대에 외식 식재료의 품질을 높이려면 푸드테크 기술을 도입해야 하고 그 분야를 개발하는 것이 앞으로 저희 회사와 농업이 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걸 준비해라’고 조언을 주신다면요?

농업이나 특정 분야에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분야에서 성공할 기회가 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 또한 ‘농업을 해야겠다’는 특별한 의지나 꿈이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죠. 예를 들어 해외에 봉사하러 갔다가 ‘이곳 농민들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해. 한국의 기술을 조금만 도입하면 훨씬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순수한 의도에서 사고하기 시작하면 기회가 온다고 봐요. 젊은이들이 무슨 일이든 부딪쳐 경험해 보았으면 해요. 무엇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고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사람은 어떤 기회도 잡을 수 없거든요.

저는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서 계속 한 분야에서 일해 왔고 현재는 나름 괜찮은 회사의 대표가 되어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지요. 산업화 되어 있지 않은 농업 분야에 들어와서 산업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설레는 마음으로 도전했던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동안 오프라인 시장만 하다가 온라인과 홈쇼핑 시장을 겨냥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래사회는 어떻게 변화할지 모릅니다. 여러분께 어떤 정답을 드릴 수 없지만 ‘저는 이런 환경에서 이런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이렇게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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