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교육근로장학금 수기공모

다섯 살, 나의 첫 근로의 시작

내가 기억하는 나의 인생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께서 우리 남매와 함께 집을 떠나셨던 어느 겨울 새벽부터 시작한다. 집이 없어 여기저기 떠돌았고, 빚쟁이가 집뿐 아니라 학교까지 찾아오곤 했다. 때문에 오빠와 나는 어머니와 떨어져 자주 친척 집에 맡겨졌다.
나이가 어렸지만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서 한글보다 먼저 깨우친 것은 ‘눈치’였다. 당시에 이모님은 장사를 하셨는데, 여덟 살이 된 나는 조금이라도 제 밥벌이를 하고자 동네를 돌며 전단지를 붙이고, 손이 트도록 박스 접는 일을 하며 이모님을 도왔다. 당시에 아파트 게시판이 왜 그리 높게만 느껴지던지, 까치발을 들고 전단지에 겨우 스테이플러를 찍었다. 한철 장사가 끝나갈 때쯤 이모님은 감사하게도 수고비를 주셨다. ‘근로’를 한 대가로 받은 생애 첫 봉급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 속에서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배웠다. 보람, 성실, 눈치, 추위, 그리고 가난을 말이다.


아버지의 부재

나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자랐다. 어머니와 우리 남을 매는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다. 일말의 따스함도 없고 너무나도 원망스러운 그런 존재로 남아 있다. 친구들의 자상하신 아버지, 또 친척집에 있을 때 친척 동생을 대하던 따뜻한 이모부님의 모습을 보며 ‘나에겐 왜 저런 아버지가 없을까?’ 생각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께 용돈 좀 달라고 조르는 애교 많은 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었기에 커가면서 나는 내 자신을 다독였다.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우리 남매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어머니와 어머니를 대신해 우리 남매를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함께한다고. 그러나 아주 가끔 아버지의 듬직한 존재를 느껴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저 상상으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존재를 말이다.


‘근로’에 대한 새로운 배움

‘국가근로’를 알기 전까지 나에게 ‘근로’란 궁핍을 겨우 면하기 위해 내가 해야만 하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복적이고, 육체적으로 힘들며, 마치 내가 한낱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게 했다. 일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기란 어려웠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번은 직원들을 함부로 욕하고 하대하는 사장을 만나 인간적인 수치심을 느꼈고, 임금조차 제때 받기가 힘들어 분쟁까지 겪어야 했다. 점점 일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졌다.
그러나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국가근로’를 하게 되면서, 그 전에 근로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이 바뀌었고, 좋은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먼저, 직무 경험이다. 사무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가장 뜻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고시 준비생인 나로서는 사기업에 대해 아는 것이 없기에 더욱 새로웠다. 정식직원이 아닌 내가 사수라고 부르는 선배가 생겨 업무에 대한 지침을 배웠고, 맡은 일에 책임과 열정을 갖고 노력했다.
두 번째로, 임금에 대한 투명성이다. 국가근로는 장학금의 개념으로 재단과 학교가 연계하여 지급되기 때문에 그 체계가 매우 공정하고 투명성 있게 진행된다. 과거에 임금 문제로 속상했던 때를 생각하면, 정말 꿈의 근로가 아닐까 싶다. 또 장학금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보다 ‘내가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뿌듯함이나 보람이 남달랐다. 더 이상의 가난과 궁핍에 대한 압박감보다는 내가 현재 ‘학생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더욱 학업에 정진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사회 경험이다. 분명한 직급에 대한 조직구조가 확실한 기업 내에서 실질적으로 기업 예절과 또 상사를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선배들은 나에게 ‘회사 들어오면 회사생활 잘하겠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어릴 적 한글보다 눈치를 먼저 터득한 것이 이럴 때 빛을 발하나 싶었다.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나의 아버지, 한국장학재단

내가 투입되었던 부서는 매우 바쁘고 정신없었다. 오죽하면, 휴가를 쓰고도 회사에 나와 일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자기 딸과 또래라는 이유로 마음이 쓰이셨는지, 부서를 총괄하시는 팀장님이 나를 많이 생각하고 아껴주셨다. 짬이라도 나면 회의실로 불러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대인관계, 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등, 팀장님이 살아오시면서 경험하고 느끼신 바를 말씀해주셨다. 팀장님과의 그런 시간이 정말로 행복하고 소중했다. 근로 마지막 날, 팀장님은 준비해두신 선물꾸러미를 건네주셨고, 사무실 직원들에게 ‘그동안 열심히 일해준 장학생에게 수고했다고 손뼉쳐 줍시다.’라며 다독여주셨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연신 인사드리기에 바빴다. 나는 국가근로를 하면서, 따뜻한 아버지스러운 마음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국가근로를 통해, 나는 일에 대한 경험과 더불어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매우 값지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 후에 지급된 국가근로장학금은 나에게 단순히 ‘장학금’이라는 의미에 더해서, ‘아버지의 용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딸 열심히 잘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주는 용돈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용돈치고는 너무나 큰 액수이지만 말이다. 그만큼 한국장학재단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안식이 되어주었고, 내 마음속에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존재로 자리했다. 그리고 어릴 적 가졌던 일에 대한 처절함과 가난, 궁핍과 연관지었던 부정적인 생각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었고,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며, 사회를 배우는 넓은 시야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아버지, 한국장학재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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