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헝가리 사랑은 끝이 없다. 자원해서 간 해외봉사도 그곳이었고, 유학생활과 직장생활까지 20대의 많은 시간을 헝가리에서 보냈다. 그가 그곳에서 배우고 겪은 소중한 경험들과 에피소드를 독자들과 공유한다.

헝가리로 해외봉사를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현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합니다.

2009년 2월, 저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친 시점에 헝가리로 떠났습니다. 전공이 헝가리어라서, 신입생 시절부터 수없이 헝가리라는 나라를 마음에 그려보았었지요. 막상 도착해서 보니 그렇게 오래 기대했던 것과 달리 헝가리의 첫인상은 회색도시였어요. 유난히 추웠고, 사회주의의 영향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사람들의 얼굴도 모두 차갑게 굳어 있었으니까요. 당시엔 다소 실망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봄이 오면서 도시는 생기가 도는 듯했고 그때 만났던 헝가리 사람들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한번은 굿뉴스코 헝가리 지부장님 소개로 현지 대학생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들 눈에 저는 언어가 서툰 작은 소녀였을 텐데, 둥글게 모여 앉은 헝가리 대학생들은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제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해주었어요. ‘나는 한국 대학생이고, 이곳에 해외봉사를 왔다’는 간단한 내용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그 친구들은 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토의(?)까지 하더라고요. 저는 그 친구들이 말도 못하는 저를 다시 초청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모임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한 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이 와 있더라고요. ‘곧 나의 생일 파티가 있으니 꼭 우리집에 와 달라’고요.

데브레첸에서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마음이야기 나누던 시간.
데브레첸에서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마음이야기 나누던 시간.

원래 저는 이기적이고, 상대방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속으로 무시하고 말 건네는 것도 아꼈습니다. 그런데 헝가리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키도 크고 금발에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그들이 저같이 보잘것없는 동양인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을 보면서 전에 제가 가졌던 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를 아무 편견 없이 받아 주었던 그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리고 그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어서 그때부터 더 열심히 언어공부를 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집에서나 밖에서나, 길을 걸으면서도, 버스에서도,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그날 들은 헝가리어를 중얼거렸어요. 그래서 제 룸메이트는 저를 좀 이상한 사람으로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많은 행사와 활동들을 했지만 아직도 제 마음에 남는 것은 이렇게 제가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나중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까요.

 

굿뉴스코 홍보를 나갔던 데브레첸대학교 전경.
굿뉴스코 홍보를 나갔던 데브레첸대학교 전경.

해외봉사와 유학생활을 헝가리에서 동시에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좀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사실 해외봉사를 간 계기가 한국에서 헝가리 정부 장학생에 지원했다가 실패해서였습니다. 헝가리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제가 지부장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올해 다시 지원해보라’고 하셨어요. 봉사를 하러 왔는데 이런 기회를 얻어도 되나 싶었지만, 지부장님 의견을 따라 재도전했습니다. 마침내 저는 헝가리 정부에서 소수의 외국인 학생을 선발하여 헝가리 전문 인력으로 양성하는 2009년 장학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합격했습니다. 그래서 해외봉사 기간 중 상반기는 순수하게 봉사활동을, 그리고 하반기에는 1학기(유럽은 9월부터 1학기)가 시작하여 봉사와 학업을 병행하였고, 봉사단원으로서의 1년이 지나고 2학기(2010년 3월)가 되어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업에 전념하였습니다.

제 경우에는 지부장님의 배려로 봉사활동과 학업을 병행한 것이 크게 장점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사실 아시아 학생들은 필기시험에 강해 합격을 할지라도 정작 회화가 되지 않아 인터뷰에서는 낮은 점수를 받아 하급 프로그램으로 배정이 되곤 하는데, 저는 수개월 간 수많은 헝가리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한 터라, 인터뷰 점수가 매우 높게 나와 바로 상급과정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국립피취대학교University of P.cs에서의 첫 수업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첫 강의시간에 그 날의 신문기사를 읽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였는데, 저는 신문의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문학, 정치, 경제, 역사 등 모든 강의 내용이 제게 버거웠습니다. 고민 끝에 교수님을 찾아가 내가 왜 이 상급수업에 참여할 수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 드렸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제 얘기를 끝까지 들으신 후 오히려 ‘네가 이렇게 헝가리어를 잘하니, 하급과정으로 내려갈 이유가 전혀 없구나!’라며 격려해주셨지요.

실제로 저는 헝가리어를 현지인처럼 자연스럽게 잘한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는데요. 그건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해외봉사 활동을 하면서 많은 헝가리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덕분이었지요. 저는 1학기를 마칠 때에는 신문을 편하게 읽을 수 있었고, 2학기를 마칠 즈음에는 뉴스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헝가리어 공인인증 시험에도 합격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해외봉사 하반기에 다른 유럽 단원들과 연합으로 진행된 굿뉴스코 행사에 많이 참석하지 못했던 것인데, 비록 봉사단원이 아닌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그후에도 일 년을 더 헝가리와 영국에서 머물면서 함께할 수 있었기에 개인적으로는 더 유용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대학생들을 만나 월드캠프를 홍보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빨리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대학생들을 만나 월드캠프를 홍보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빨리 능숙하게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잊지 못할 외국인 친구가 있었다면 말씀해주세요.

헝가리에서 회사를 다닐 때 집을 얻어서 지냈던 적이 있었어요. 같은 건물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지인 중에 한국 문화를 너무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며 제게 소개해주었는데, 만나보니 어린 손자까지 있으신 할머니시더라고요. 그런데도 어찌나 젊게 사시는지 한국 연예인 팬클럽 회장에, 헝가리에 있는 웬만한 한류 관련 동호회는 다 알고 계신 분이셨어요.

하지만 활달한 성격과는 다르게 큰 슬픔을 지니고 있었지요. 맏아들은 아내가 시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어머니와의 연을 완전히 끊고 영국으로 가버린 상태였고,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이송되었다가 의료사고로 목숨을 잃었어요. 아주머니는 아들의 기일 전날, 제게 이런 사연을 털어놓으셨어요. 아직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있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도 부담스러웠지만, 다음 날 아주머니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지금 마음이 어떠신지 물어 보았어요. 아주머니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잠시 후에 이야기했어요. ‘아들 3이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아들의 기일이 다가오면 늘 견딜 수 없이 힘이 들었는데, 그럴 때면 모두 자기에게 말 걸기를 부담스러워하고 혼자 두었다. 남편조차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항상 혼자 괴로웠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 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나를 찾아와줘서 너무 고맙다’라고요.

그후로 아주머니는 저를 딸처럼 대해주었어요.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또 마음을 닫고 살던 남편 분과 마음의 대화도 시도하면서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올 때 정말 많이 서운해 하셨는데, 작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우리는 만나서 긴 회포를 풀었습니다. 올 봄에도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연락을 며칠 전 받았습니다. 피부색과 나이에 상관없이 지구 반대편에 저를 그리워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늘 따뜻합니다.

친구의 주말농장에서 와인 만들기를 도왔다.
친구의 주말농장에서 와인 만들기를 도왔다.

해외봉사와 유학기간을 통해 자신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제가 얻은 가장 귀한 것은, ‘나’와 한국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저는 제 시야와 개념 안에서 안주하는 편협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헝가리와 영국에서 공부하며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알았고 내가 알던 세계가 얼마나 좁았었는지,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그래서 내가 배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십 대 초반에 처음 한국을 떠나 2년의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니 친구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직장을 다녀야 하고, 저런 경력과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결혼은 이때 해야 하고, 꼭 저런 집에 살아야 하고… 그리고 그 기준에 충족하면 행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공식에 잡혀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는 별로 행복하지 않지만, 이 사회 또는 스스로가 세워놓은 행복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제가 청년의 시기에 해외에서 정말 빛나고 귀한 경험을 하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무척 감사하고, 그때가 자주 생각이 납니다.

 

헝가리에서 해외봉사와 유학은 물론 취업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해외에서의 직장생활은 어땠습니까?

2011년에는 삼성SDI(당시 제일모직)의 헝가리 법인에 입사했습니다. 처음에는 헝가리어 통역이 제 업무였어요. 그러다가 큰 프로젝트가 생기면서 제가 재무와 원가 파트 인력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제가 굿뉴스코 해외봉사활동을 하면서 배운 가장 큰 자산은 주인 된 마음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하에 자라서 그런지 헝가리 사람들은 대개 수동적인 자세로 일을 처리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자기 편에서 이 정도면 되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윗사람에게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입니다. 자료의 수준은 떨어지고 스스로 발전도 절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만큼 했으면 잘한 것 아니냐고 혼자 만족하죠.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가 어떤 것을 원해서 내게 이 일을 시키는지, 그럼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보완해야 할지를 머릿속으로 늘 그려보았습니다. 그랬을 때의 결과물에 대해서 상사도 만족하고, 저도 단순 상명하복에 의해서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업무를 하고 싶기에 스스로도 최대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단순히 제가 밤낮으로 노력했다고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가르쳐주고 도와주었던 선배 분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제가 밤낮으로 노력했다고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가르쳐주고 도와주었던 선배 분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통역에서 재무 관련 업무로 전환되면서 어려움도 꽤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저는 재무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이왕에 제게 맡겨진 일이니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프로젝트 팀에 계셨던 분들은 차변借邊, 대변貸邊 같은 기본적인 회계용어도 모르는 저를 보고 정말 황당하셨을 겁니다. 제 스스로도 너무 막막해서 울고 싶을 때가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말 그대로 밤낮으로 노력을 했습니다. 낮에는 원가, 밤에는 재무 업무를 하며 묻고, 다른 부서의 누구라도 찾아가서 또 물었습니다. 새벽에 숙소로 돌아오면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고, 주말에는 회계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6개월간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좋은 결과가 나와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단순히 제가 밤낮으로 노력했다고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가르쳐주고 도와주었던 선배 분들과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요?

헝가리에서의 3년 직장생활 후, 퇴사를 하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국제대학원에서 재무를 전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전기 지원시기를 놓쳐버리게 되었죠. 후기 접수를 기다리며 그 기간에 통번역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중 제가 해외봉사를 다녀온 국제청소년연합의 국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라니, 한층 더 궁금해집니다.

국제청소년연합은 비영리기관인데 이런 단체들은 공통적으로 회계와 전산 시스템이 다소 취약합니다. 대개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므로 해당 분야의 전문시스템 투자가 어렵고 전문인력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회계전산 시스템이 구축되면 청소년 사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기에, 저는 이 단체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가 굿뉴스코 봉사를 통해 배우고 얻은 게 너무 많았으니까요.

사실 4년차 경력으로 조직의 회계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쉽진 않은데, ‘도전, 변화, 연합’이 모토인 국제청소년연합에서라면 뭐든 시도해볼 수 있어 일할 맛이 납니다.

 

어떤 업무를 하고 있으며 그 부분에서 보람을 느끼시나요?

대부분 수익사업을 하지 않는 비영리법인의 경우, 실질적으로 후원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고유목적사업의 운영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관리해야 하는 전산 시스템이 취약하면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영리 회원관리에 특화된 시스템을 새로 도입하기로 했고, 전 직장에서 ERP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던 제 경험이 매우 큰 도움이 되어, 원활하게 해당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니세프와 같이 국제적 규모의 비영리단체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국제청소년연합의 회원들도 동일하게 영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원 분들이 무척 편리해하시는 것을 보며, 제가 배운 지식과 경험이 이렇게 활용될 수 있음에 보람과 감사를 느낍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