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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가까이] 흙 범벅 바나나와 아버지
이은혜 | 승인 2017.03.28 11:35

내가 어렸을 적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며 전국을 돌았다. 안 가본 박물관이 없을 정도였고, 산과 들로 캠핑도 자주 다녔다. 우리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보다 자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셨다. 토요일이면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어딘가로 가족이 차를 타고 떠났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자동차 뒷좌석을 개조해 침대로 만드는 등 우리 남매가 편안히 여행할 수 있도록 늘 아이디어를 내셨다.

그런 어린 시절이 지나고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 어머니가 진 빚 때문에 서류상으로 이혼하고 얼마 동안 같이 지내셨는데, 잦은 다툼 끝에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어 결국 이혼하셨다. 그때는 부모님의 이혼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이야기를 하셨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푸념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운수업에 뛰어드셨다. 또 밤에는 대리운전도 하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어서야 우리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했는데, 그런 나의 형편이 부끄러웠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가기 싫어서 열여덟 살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늦게 들어갔다. 가능한 한 아버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집안 상황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집은 늘 비어 있었고 삭막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보다 더 늦게 귀가하셨다. 새벽 두세 시쯤 들어오시면 주무시지 않고 장부 정리를 하셨는데, 자주 우셨다. 아버지가 혼자 흐느끼시며 낸 그 울음소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오래 머물며 떠나지 않았다.

 

먹지 않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반항이었다

아버지는 일하러 가시기 전에 나와 동생을 위해 항상 찌개를 끓여두셨다. 그리고 바나나와 사과, 포도 등의 제철 과일을 사서 선반에 올려놓고는 우리와 마주칠 때마다 꼭 먹으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플 때를 제외하고 나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집안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일체 도와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향한 반항의 시위였다. ‘이런 상황을 만든 아버지가 다 해결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은혜야, 너무 힘들다. 바깥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기도 어렵고…. 아빠가 만나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좋은 사람이다. 지금 당장 우리 집에 오는 건 아니고 너희가 원할 때, 다만 가끔 집에 와서 살림해주는 걸 이해해 줄 수 있겠니?” 그날 나는 아버지께 심하게 대들었다.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격한 말을 하고 집을 뛰쳐나왔다. 이런 모든 상황이 싫었다. 생각이 멈춰버린 것 같았고, 아버지가 밉고 또 미웠다.

그날 이후 집에 더욱 더 늦게 들어갔고 자주 외가나 엄마 집에 가서 지냈다. 그러다 가끔씩 집에 가보면 여전히 찌개와 과일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전화하셔서 집에 가서 밥도 먹고 과일도 먹으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먹지 않았다. 미워하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것들이라 싫었다. 찌개는 곰팡이가 필 때까지 두기가 일쑤였고, 바나나는 새까맣게 변해 결국 껍질도 까보지 못한 채 버려졌다. 그러면 아버지가 새로 사다 놓으셨다. 사다 놓고 치우고 사다 놓고 치우고…. 아버지는 늘 그 일을 반복하셨다. 아버지는 내 친구들에게도 참 잘해주셨다. 한번씩 하교할 때쯤 학교에 오셔서 나와 친구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시고 친구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시곤 했다. 이런 아버지에 대해 고마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미움이 더 컸다.

아버지의 근면절약으로 집안 경제사정이 많이 좋아졌고, 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등록금은 당신이 내줄 테니 학자금 대출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아버지가 학비를 내주시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등록금을 다 내주는 아버지가 드물었다. 내가 모든걸 받으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대학에 진학해 친구 둘과 함께 자취하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를 떠나고 싶어서였다. 아버지는 그때도 여전히 내 곁을 맴도셨다. 자주 반찬을 가지고 자취방에 오셨는데, 아버지가 가져온 음식들을 친구들이 안 볼 때 버리거나 상할 때까지 두었다가 버렸다.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잘해주시는 것도 다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우연히 대학생 해외봉사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아버지의 관심에서 벗어날 방법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떠나야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마음에, 해외봉사 활동에 대해 물어보시는 아버지께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무작정 봉사단에 지원했다.

 

흙 범벅이 된 바나나를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단지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해외봉사. 내가 도착한 곳은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필리핀이라는 나라였다. 거기는 너무 더웠다. 총 17명의 봉사단원들이 마닐라에서 함께 지내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한국의 집과 아버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 개발이 덜 된 나라여서 사는 데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수돗물은 비싸서 샤워할 때만 쓸 수 있었고, 빨래에 필요한 물은 펌프로 받아 하루 이상 녹을 가라앉혀 써야 했다. 음식 문화도 우리나라와 너무 달랐다. 나는 여러 반찬을 많이 먹는 편인데,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밥과 다른 반찬 하나로 먹었다. 아주 짠 생선 한 마리와 밥을 비벼먹는 사람들도 있었고 죽으로 때우기도 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한국이 가장 그리웠다. ‘내가 참 풍족한 곳에서 살았구나. 한국은 정말 잘 사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이 점점 그리워져갈 무렵, 우리 단원들은 마닐라를 떠나 필리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시골이어서 환경이 더 열악했다. 쌀이 있으면 가스가 없고, 가스가 있으면 쌀이 없고…. 아침 겸 점심을 먹을 때도 자주 있었다.

한국에서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사먹을 수 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봉사단원으로 지내는 동안 개인적으로 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약속이자 훈련의 과정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먹을 수 없었다. 또 부족한 결핍의 상황 속에서 부딪쳐 살아보기로 나름대로 결심하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리핀에 와서 그 흔한 바나나조차 제대로 못 먹는다고 생각하니 서럽기까지 했다.

하루는 현지인 친구가 문병을 같이 가자고 했다. 자기 친구가 아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현지인을 따라 아픈 친구의 집에 갔는데, 집이 무척어둡고 습했다. 벽은 미장도 안 돼 있었고, 조명이라곤 어둡게 켜져 있는 형광등 하나가 전부였다. 지방에 사는 현지인들의 집은 대부분 그랬다. 장판이 깔린 좋은 집은 본 적이 없고 대개 흙바닥이었고, 그나마 시멘트로 된 바닥은 형편이 나은 집이었다. ‘이렇게 햇빛이 안 들어오는 집에 살면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현지인의 친구는 침대에 누워서 우리를 맞았다. ‘누워 있어서 미안하다’며 인사하기에 괜찮다고 하고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한참 이야기하는데, 내 눈이 자꾸 옆에 있는 테이블로 갔다. 테이블 위에는 큼직한 바나나 송이가 바구니안에 담겨 있었다. ‘아, 저거 하나 먹고 싶다.’ 내가 입으로 말은 하면서 눈은 계속 바나나를 쳐다보자, 친구가 바구니를 내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바나나 먹을래?”

바나나를 먹겠냐고 물어보다니! 순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래도 돼?”

“응, 너 먹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착한 친구가 있다니!’ 외치며 바나나 한 개를 떼내 잽싸게 껍질을 벗겼다. 그런데 ‘엄마야! 이럴수가!’ 껍질을 너무 세게 까는 바람에 흰 속살을 드러낸 바나나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것이다. 너무 놀라 흙으로 범벅이 된 바나나를 집어드는데,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나에게 그렇게도 바나나를 먹으라고 하셨었지….’ 딸이 뭐든 먹기를 바라며 노란 바나나를 늘 사다 놓으신 아버지. 딸이 먹지 않아 까맣게 변한 바나나를 버리고 또 버리셨을 아버지. 그 아버지와 함께 버려진 수많은 바나나가 스쳐지나갔다.

없는 형편에 사다 놓으신 바나나가 사랑 일 줄이야!

한국에는 먹을 게 흔하지만 필리핀에는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배가 고파보니 비로소 보였다. 내가 받은 것들과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당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반항적인 딸이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까. 삶은 또 얼마나 고달프셨을까. 어떻게 그 힘든 시간들을 보내셨을까….’ 없는 형편에 과일을 사다 놓으신 것은 희생이고 사랑이었다.

잠깐이었지만 내가 아버지가 된 듯했다. 흙바닥에서 주운 바나나를 들고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미안해서였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들은 모두 최고였다. 집과 음식, 그리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아버지는 정말 최고셨다.

친구는, 바나나를 들고 우는 나를 보며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바나나를 더 먹으라며 나를 달랬다. 친구가 내 울음의 의미를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나쁜 딸이야. 아버지를 너무 몰랐어. 아버지가 밉기만 했지. 내가 아버지 품 안에 살면서 받은 것들은 모두 감사한 것들이었는데 늘 불평만 했어.”

바나나 덕분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니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다. 필리핀에 간 지 6개월 만에 처음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의 첫마디는 ‘밥 잘 먹어?’였다.

“아니오. 잘 못 먹어요.”라고 대답하고 아버지가 해주신 찌개가 먹고 싶다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와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미워하며 살아온 날들은 내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늘 나에게 마음을 여시고 내 옆에 계셨다. 아버지와 몇 년 만에 웃으며 통화를 하고 나니 마음이 정말 편하고 행복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보니 그제야 그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느껴졌다.

결혼으로 아버지 곁을 ‘공식적으로’ 떠나게 된 나는, 마닐라에 직장을 둔 신랑덕분에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가르쳐준 필리핀에서 살고 있다. 신랑은 과일을 잘 먹지 않는다. 건강하라고 사다가 주는 것인데, 그걸 썩혀 버릴 때 신랑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하고 아깝다. 그러면 그때마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 품 안에서 좋은 것만 받았네. 아버지,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은혜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7기 필리핀 단원으로 활동했다. 결혼 후 필리핀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마닐라에 살면서 청소년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마인드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마약재활센터 등 여러 기관에서도 강사로 활동 중이다.

이은혜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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