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체코 대사 토마쉬 후삭 Tomáš Husák

“대사님과의 인터뷰를 접한 독자들이 체코를 이웃처럼 가깝게 여기길 바랍니다.” 후삭 대사에게 취재를 요청하며 보낸 편지의 첫 구절이다. 그의 답변은 명쾌했다. “우리는 이미 이웃인 걸요.” 두 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내 한국과 체코는 역사적으로 공통점이 많을 뿐 아니라, 오래 전부터 도움을 주고받아 온 파트너라는 사실을 강조한 후삭 대사. 그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기고문 형식으로 소개한다.

제가 체코대사로 임명된 것이 2014년 10월이니 벌써 2년 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한국에서 지낸 날들을 돌아보니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주변의 주한 대사님들을 보면, 한국 근무를 발령받으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미 1990년 한국이 체코와 수교를 맺으면서 무역협정 체결문을 작성하기 위해 한국에 왔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오갔습니다.

한국은 볼 때마다 활기가 매우 넘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 사이에 둘러싸여 있고 대륙과 해양을 잇는 다리가 되어 왔습니다. 체코 역시 유럽 한가운데 자리잡은 내륙국가로서 동·서유럽의 문화와 교역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또 체코 주변에는 독일과 구 소련 등 강대국들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한국을 일본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독일은 체코를 지배하면서 체코를 독일화하려고 했고 소련도 체코를 지배하며 공산화하려고 했습니다.

그 뒤 한국은 6.25 전쟁의 아픔을 겪었지만, 뛰어난 인적자원에 힘입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일으켰습니다. 천연자원이 부족하지만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다른 나라에서 수입한 원료로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 해외에 파는, 수출 경제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 점은 체코도 마찬가지입니다. 체코에는 내놓을 만한 천연자원이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노력과 우수한 두뇌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두 나라 사이에는 경제, 외교, 문화, 과학기술 등의 교류가 활발제공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한국이 잘하는 분야와 체코가 잘하는 분야가 서로 다른데, 두 나라의 전문가들이 만나면 서로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최고의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2015년 한 해 체코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25만 명이나 되며, 2016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30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한국에서 체코까지 가는 데엔 비행기로 10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이미 두 나라는 아주 가까운 이웃입니다.

까를로비바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국왕인 까를 4세가 온천을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사진제공=체코관광청)
까를로비바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국왕인 까를 4세가 온천을 발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사진제공=체코관광청)

인생의 전환점을 만날 때마다 ‘배움’으로 돌파했다

대사로 근무하면서 한국 언론과도 여러 번 인터뷰를 했고, 한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거나 토론을 했던 적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바로 ‘외교관이 되려면 어떤 역량이나 자질이 필요할까요?’입니다. 한국의 대학생들 중에는 외교관이 되거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느 외교관들과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원래 디젤엔진을 설계하고 제작하는 엔지니어였습니다. 공대를 졸업한 후,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하셨던 프라고인베스트Pragoinvest라는 국영 무역투자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설계팀에서 일할 계획이었는데, 막상 입사해 보니 회사에서는 해외무역팀에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역팀에서 수출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무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공학도였던 제가 수출 업무를 처리하려면 무역법, 국제운송, 외국 은행과의 거래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결국 졸업하자마자 다시 프라하경제대학교 국제무역학부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무역팀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회사 제품의 장점을 알리고, 상대와 이익을 조율하며 매끄럽게 협상을 진행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가 훗날 외교관으로서 일하는 데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물론 외교에도 인권, 문화교류, 교육, 안보 등 다양한 영역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기본은 바로 소통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업무도 제품을 판매하는 일에서 수출전략을 세우는 일로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그래서 까를대 국제법학부에 진학했습니다. 어느 분야든 관리자가 되려면 법률에 대해 웬만큼 지식을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부터 민법, 회사법, 지역법, 국제법 등을 두루 공부했습니다. 프라고인베스트 소속으로 있으면서 방콕에 있는 주태국 체코 상무부商務部에서 7년간 근무했습니다. 태국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당연히 태국어를 배워야 했지요. 지금은 한국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모릅니다. 나이가 칠순이 가까워지다 보니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벅차더군요. 아쉬운 대목이지요.

‘외교관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배우려는 자세’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늘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저는 끊임없는 배움으로 그 고비를 넘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여러분의 젊음이 부럽습니다. ‘이만 하면 됐다’고 안주하지 마시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아이디어를 얻기 바랍니다.

프라하의 명물 찰스브리지(까를교)
프라하의 명물 찰스브리지(까를교)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신 두 스승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많은 선생님들이 제게 도움을 베풀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중 두 분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선생님은 9학년 때 수학선생님입니다. 수학이 어렵다고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 선생님은 어려운 수학도 재미있게 가르치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수업시간 내내 맡은 과목만 가르치는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이 선생님은 수업만 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고민도 상담해 주셨지요.

또 저희에게 집에서 쓰는 식기와 포크, 나이프를 가져오게 하셔서는 어떤 순서로 식탁에 놓고 어떻게 쓰는지, 식사예절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가 1960년대였는데, 당시 체코는 공산정권 아래 있었습니다. 그래서 TV나 신문 등 언론에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보도가 넘쳐났습니다. 선생님은 저희에게 ‘이는 잘못된 보도이며, 여러분은 실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그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매년 생신 때에 꽃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장례식에는 반 친구들 거의 모두가 참석해 슬픔을 나누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사람으로 제자들을 키우고 싶어 하셨던 선생님의 가르침은 이후 제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1968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프라하의 봄’ 사태가 벌어진 지 한 달 뒤였습니다. 체코(당시 체코슬로바키아)가 언론과 표현,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로 돌아설 움직임을 보이자 소련이 20만 병력과 탱크 2천 대를 보내 체코를 침공한 것입니다. 저희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지요. 소련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했지만, 시민들은 비폭력시위로 대응했습니다. 대학생들도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 인권과 자유를 주제로 한 연설이나 토론을 하며 저항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런 대학생들 중 한 사람이었고요. 공산정권에 밉보인 저는 결국 수도에서 쫓겨나 북부 지역의 작은 대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좌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오히려 의욕이 솟았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날 핍박해도 난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달려 전과목 A학점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저만의 저항이었던 셈이지요.

두 번째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축구부 감독님입니다. 고교시절, 저희 학교에는 농구, 축구, 배구, 육상 등 운동팀이 많았습니다. 운동을 즐겨 하는 학생들도 많았고요. 틈만 나면 학교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체코에서는 15세만 되면 술과 담배의 구입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술담배에 빠져 사는 청소년들이 많았어요. 저도 친구들과 담배를 피곤 했는데 어느 날 축구부 감독님께 들켰습니다. 감독님은 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담배 피는 사람은 선수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담배와 축구 중 하나만 선택해라. 정 담배를 피우려면 축구부에서 나가거라.”

“알겠습니다, 감독님. 저는 팀에 남고 싶어요.”

축구가 너무 좋았던 저는 그 날 이후 한 번도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꾸중 덕분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지요. 육체의 한계를 넘어야 하는 운동은 유혹을 이기는 데 좋은 수단입니다. 또 운동을 하면 뇌에 산소가 공급되어 집중력이 올라갑니다. 요즘도 일주일에 세 번은 피트니스 클럽에 가서 운동을 합니다. 외교관으로서 아침 9시에 출근해서 9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꾸준한 운동으로 다진 체력 덕분이지요. 그때 저를 꾸짖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체코 현대사를 이해하는 키워드, 프라하의 봄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인 1946년 체코(체코슬로바키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그 전까지 체코는 다른 동구권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생활여건을 갖춘 공업국가였지만, 1960년대 들어 경제가 침체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 또한 커져갔다. 이에 공산당 제 1서기였던 두브체크는 1968년 민주자유화 노선을 제창하면서 의회제도 확립, 언론검열의 폐지, 민주 선거법 창설, 언론·출판·집회·이주의 자유 보장 등을 실시할 것을 발표했다. 이런 체코의 개혁이 다른 동구권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반향을 두려워한 소련은 약 20만 명에 달하는 소련 및 바르샤바(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군사동맹) 군대를 동원하여 체코를 침공했다. 이에 체코 국민들은 비폭력 저항으로 맞섰다. 체코가 민주화를 선언했지만 소련의 침공으로 좌절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켜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른다. 1989년 벨벳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가 붕괴될 때까지 체코는 소련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연중무휴, 24시간 근무하는 자리, 외교관

대사란 자국을 대표해서 상대국에 파견되어 두 나라 사이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는 외교사절입니다. 하지만 자국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대사의 임무는 상대국에 거주하는 자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대사를 가리켜 ‘일 년 365일, 24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자리’라고도 하는 건 이 때문입니다. 언제든 연락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서울과 프라하의 시차가 8시간이니, 한국이 자정일 때 프라하는 아직 오후 4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토요일에도 출근해 혹시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하고 본국의 연락을 받을 준비를 합니다.

외교관은 업무강도도 높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힘든 직업입니다. 그렇다고 외교관 일을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30여 년 전, 저는 태국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때는 저 같은 유럽인들에게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이 전무했습니다. 휴대폰은커녕 제대로 된 국제 직통전화도 없던 시절입니다. 체코에 계신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면 직접 우체국까지 가서 직원에게 국제통화를 신청한 뒤 30분 동안 기다렸다가 3분간 통화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편지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통신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도서관에 가면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소개한 책들이 넘쳐납니다. 굳이 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인터넷만 켜면 나라별 홈페이지에서 웬만한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휴대폰만 터치하면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물론 기후나 음식, 파견국의 안보상황 등 여전히 극복해야 할 점은 있겠지만, 외교관의 근무환경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해졌고 정보 또한 양적·질적으로 급증했습니다. 외교관으로 일하기가 과거처럼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또 외교관은 세계 각국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스웨덴에서 대사로 있을 때 저는 스웨덴 총리의 정치고문과 자주 만나 교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 보니 그분이 주한 스웨덴 대사로 계셨어요. 스위스에서 UN주재 체코 대사로 근무할 때는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알게 됐는데, 그분도 서울서 일하고 있더군요. 참 좁은 세상이지요.

저는 내년이면 정년퇴임입니다. 외교관으로서 마지막 근무지인 한국에서 보낼 올 한 해가 한편으로는 아쉽게 느껴집니다. 만약 제가 20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교환학생이나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꼭 해외에 가보고 싶습니다. 해외에 가면 자기 나라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면서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질 뿐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또 인생의 새 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간접경험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직접 그 나라에 가서 현장을 경험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이제는 어느 나라든 세계와 협력하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입니다.

마지막으로 체코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독자들을 위해 체코문화원을 소개할까 합니다. 젊음의 거리인 홍익대 인근에 위치한 체코문화원에서는 전시회나 영화제, 음악공연, 문화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일 년 내내 진행되고 있으니 꼭 가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작은 관심과 교류가 모여 두 나라 사이의 우호는 더욱 증진될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토마쉬 후삭 대사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투자회사에서 수출입담당자로 일하다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주태국 체코 상무부에서 근무했다. 체코 외교부 대외경제관계국 국장, 주스웨덴 대사, 스위스 UN주재 대사를 역임했으며, 체코의 명문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아침마다 한국의 인삼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할 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깊다.

주한 체코문화원
주 소: 서울 마포구 독막로7길 59 캐슬프라하 내
홈페이지: seoul.czechcentres.cz/cs/ko/
체코문화원은 프라하의 명물인 천문시계탑을 본따 지어진 ‘캐슬프라하’ 빌딩 4층에 자리하고 있다. 2013년 2월 1일 설립되었으며 음악공연·공예품 제작·영화 상영 등 체코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연중 실시한다.
문화원 내 갤러리에서는 체코 작가들의 그림이나 사진들을 감상할 수 있다.


후삭 대사가 체코에서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은 것 Top 3

1. 아름다운 중세도시들
체코는 ‘나라 전체가 정원’이란 말이 있을 만큼 강, 숲, 호수 같은 자연경관과 건축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나라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도시와 마을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습니다. 그 멋진 풍경을 한국인들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2. 민속춤과 노래
전통의상을 입고 추는 체코의 민속춤 폴카Polka는 1830년 무렵 보헤미아 지방에서 시작되어 ‘보헤미안 폴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드보르자크와 스메타나는 많은 폴카 명곡을 남겼습니다.

3. 아이스하키 리그
체코는 캐나다, 러시아, 미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이스하키 강국입니다. 한국은 세계무대에서 변방에 속하지만, 안양 한라 아이스하키단이 아시아리그 정상에 오르는 등 최근 기량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체코의 아이스하키 리그가 한국에도 도입되면 한국팀은 평창올림픽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올릴 것입니다.


후삭 대사가 한국에서 체코로 가져가고 싶은 것 Top 3
1. 한국 학생들 & 학생들의 학구열
한국 학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하며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도 강합니다. 최근 체코 학생들이 학업을 게을리하는 것 같은데, 할 수만 있다면 한국 학생들과 그들의 학구열을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2. 제주도
내륙국가인 체코에는 섬과 바다가 없습니다. 제주도는 날씨도 좋은 데다 멋지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많아 체코 국민들에게 꼭 구경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3. 한국음식
한국은 음식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고, 요리의 가짓수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하지만 유럽에는 그런 한국의 음식문화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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