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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라고 약한 것은’ 자제력을 배우기 좋은 조건입니다
이자용 (호주 IYF 지부장) | 승인 2017.03.24 11:29

사용 가능한 물량이 정해져 있을 때 사용자 숫자가 많을수록 누릴 수 있는 양은 적어집니다. 따라서 대가족 집안에서 자라다 보면 내 몫이 적어지겠지요. 형제 자매가 여럿인 가정의 자녀가 생활 속에서 검약과 절제를 배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11남매였기에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조금 더 포기할 수 있었다

 

보통 가족을 식구食口라고도 하는데 한자로 먹을 식, 입 구이니 가족 수는 먹는 입의 수가 된다. 우리 식구는 열세 명이었다. 부모님과 열한 명의 자녀. 나는 아홉 번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형제 없이 자라서 자식을 많이 낳고 싶으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어딜 가든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가족이 많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늘 숨겼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가난하고 대가족이 사는 집안에서 자랄수 있었던 것이 큰 복이었다. 그 많은 가족들과 사는 동안 절제와 양보, 우애와 인내를 배우면서 감사하고 행복했다.

 

자전거 한 대에 세 명씩

내가 살았던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내현2리에는 버스가 하루에 딱 세 번만 들어왔다. 비포장도로에 비탈진 길이어서 버스 기사들이 오기를 꺼려했고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아예 운행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집은 마을 꼭대기에 있어서 버스를 타려면 한참을 걸어 나가야 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비가 80원이었는데 버스비를 감당 할 수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오래된 자전거 한 대에 세명이 타고 가다가 비탈길에서 중심을 잃어 논두렁에 굴러떨어지면 더러워진 채로 학교에 가곤 했다. 언니들이 한 번씩 돈을 모아서 1학년이었던 나만 버스에 태워 보내주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라도 탈 수 있는 게 신났고 언니들이 고마웠다.

 

학교 생활

내가 2학년이 되던 해에 다니던 내현분교가 폐교되어 면내의 다른 초등학교로 옮겨야 했다. 전교생이 17명이었던 분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니 학교가 그렇게 커 보일 수 없었다. 학교에서 특별히 우리 동네 아이들을 위해 버스를 운행해 주었다.

친구들이 예쁜 옷을 입고 새 가방, 좋은 학용품을 가지고 다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늘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가방이나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친구들은 도시락 반찬이 자주 바뀌고 옷과 머리 모양이 매일 달랐다. 우유 급식도 우리 남매들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쉬는 시간에 배달돼 오는 우유를 먹기 싫다고 안 가져가거나 친구들에게 줘버리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우유가 남았다고 두 팩을 챙겨주셨는데 정말 기뻤다. 단숨에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집에 있는 동생들이 생각나서 참고 가방에 넣었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챙겨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오시는 부모님들을 볼 때도 부러웠다. 우리 부모님은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시기 때문에 그런 걸 기대할 수 없었는데,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시는지 알기에 언니 오빠들이나 나는 불평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즐거웠던 ‘언니 마중’

공부를 잘했던 넷째 오빠는 대학에 진학했고 둘째 오빠는 아버지와 농사를 지었다. 다른 오빠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구해 집을 떠났다. 첫째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병원에 취직했고 둘째 언니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언니가 수업을 마치고 밴드부에서 연습까지 하고 오면 마지막 버스를 놓쳐 걸어와야 했다. 음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언니는 한 시간이 넘게 걸어서 한밤중에 집에 왔는데, 우리는 그런 언니를 둘씩 셋씩 돌아가며 손전등을 들고 마중 나갔다.

가는 길이 깜깜하고 무서워서 노래를 부르거나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를 들고 셋이서 손을 잡고 갔다. 30분쯤 걷다보면 멀리서 혼자 걸어오는 언니가 보이는데, 그때부터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언니는 우리를 보면 무척 반가워하고 고마워했다. 언니를 마중 나가는 게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언니를 만나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벼이삭과 가방

부모님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셔서 어느새 우리 집에 벼농사를 짓는 땅도 많아지고 소도 많아졌다. 모를 심거나 추수를 할 때가 되면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일했다.

한번은 정말 사고 싶은 작은 가방이 있었는데 용돈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살 방법이 없었다. 마침 추수 때가 다가와 타작하는 날이 되자 둘째 오빠가 언니와 나에게 타작하면서 떨어지는 이삭을 주우라고 했다. 이삭 한 개에 1원을 주겠다고 했는데, 뛸 듯이 기뻤다. 결국 언니와 나는 이삭을 주워 하루에 2천 원씩 모았고 그토록 사고 싶었던 가방을 살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가방을 소중한 보물로 간직하며 메고 다녔다.

"언니는 이틀 전에 잔칫집에서 가져온 찌그러진 케이크 조각과 과자 몇 봉지로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고 잊을 수 없는 잔치를 벌여주었다." 

나의 첫 생일잔치

초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친구가 생일 케이크 앞에서 축하 노래를 부르자 모두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 친구에게 주었는데, 나는 가져간 선물이 없어서 얼굴이 빨개졌었다. 속으로 ‘괜히 왔다’ 생각했었다.

가족이 많다 보니 생일은 그냥 지나갈 때가 많았다. 한번은 내 생일을 이틀 앞둔 어느 날, 엄마가 동네 어른의 환갑잔치에 다녀오시면서 케이크를 조금 얻어오셨다. 나는 케이크를 보는 순간 ‘아, 저걸로 생일잔치를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위 언니가 가지고 있던 천 원으로 과자를 몇 봉지 사주겠다고 하기에 다음 날 친한 친구 네 명에게 생일이라고 말하고 집으로 초대했다. 언니는 이틀 전에 잔칫집에서 가져온 찌그러진 케이크 조각과 과자 몇 봉지로 내 생일상을 차려주었고 잊을 수 없는 잔치를 벌여주었다.

 

보온 도시락

학창 시절에는 뭐니 뭐니 해도 점심시간이 가장 즐겁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문제였다. 난로 위에 도시락을 얹어 놓았다가 따뜻하게 해서 먹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보온도시락에 밥을 싸오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 도시락이 정말 신기했다.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이 되면 늘 도시락이 마음에 걸렸다. 친구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너무 부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천냥 백화점’에서 산 멀쩡한 플라스틱 도시락을 두고 당시 삼만 원이 넘게 했던 보온 도시락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즈음에 둘째 오빠가 간호사인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다. 새언니는 시골로 시집을 와서 힘들게 살면서도 우리를 무척이나 아껴주고 챙겨주었는데, 그 고마운 새언니가 오빠에게 언니와 나를 위해 보온 도시락을 사주자고 한 것이다. 어느 날 오빠가 보온 도시락 두 개를 사왔다. 까만 가방 속에 담긴 스테인리스 보온 도시락. 새언니와 오빠가 너무너무 고마웠다. 매일 먹는 볶음김치를 담아도 맛있을 것 같았다.

 

내 것 아니라 우리 것 챙기기

한번은 엄마를 따라 장에 갔는데,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 나물을 펼쳐두고 앉아서 누군가와서 사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나름 예쁘고 아끼던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장에 간 나는 엄마 옆에 있으려니 창피해서 조금 떨어져서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옆에는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할머니들도 계셨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벌어서 살림에 보태려고 머리에 짐을 이고 손에 들고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고 오신 분들이었다.

다행히 엄마의 나물은 금방 팔렸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장터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셨다. 엄마는 순대와 만두를 참 좋아하셨는데, 꼭 집으로 가져오셔서 우리와 같이 드셨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 때문인지 혼자서는 뭐 하나 드시지 못했다. 우리 남매가 조금씩 먹어도 금세 없어지는 장터 음식. 그래서 늘 아쉬웠고 ‘언젠가 기회가 오면 실컷 먹으리라’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 나 혼자 먹고 배부르기보다 여러 사람들과 나눠 먹는 게 훨씬 좋더라는 것이다.

언니 오빠들도 엄마처럼 살았다. 과자 한 봉지를 먹어도 혼자 몰래 먹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내 것을 챙기기보다 우리 것을 챙기는 데 익숙했고 그게 당연했다. 그날 장터에서 본 엄마의 모습이 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이렇게 우리를 키워 오셨구나.’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내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음 깊이 알게 되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더니 우리 가족에게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좋은 일, 경사스러운 일, 힘든 일, 걱정스러운 일, 큰일 날 뻔한 일…. 그런 일들과 시간들이 있었기에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고민하고, 조금 더 배려하고, 조금 더 포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도 북적북적, 시끌시끌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좋고 재미있다.

이자용 (호주 IYF 지부장)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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