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아버지와 가까이 ①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청소년 중 절반 이상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일주일에 1시간도 안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5분 정도 대화를 한다는 말인데, 그 시간 동안 무슨 얘기가 오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마음속 얘기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수박 겉핥기식의 대화가 쳇바퀴 돌듯 이어지면서, 부모와 자녀는 점점 소통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인성과 마인드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는 <투머로우>에서 주 독자인 대학생들을 직간접으로 만나면서 위의 통계가 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외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남남처럼 지내는 아들과 딸들이 곳곳에 많았습니다. 세상 모든 아들에겐 아버지가 있고, 그 아들은 언젠가 또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화목보다 반목이 크고, 사랑보다 갈등이 먼저인 경우가 왜 그리 많을까요?

젊은이들의 미래 행복에 기여하려는 <투머로우>는 올해 ‘아버지와의 관계회복’을 목표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불화의 이유를 불문하고, 그동안 단절되었던, 멀리했던, 무시했던 아버지를 아들이 마음속에서 다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젊은이들이 앞으로의 삶에서 웬만한 대인관계의 어려움을 다 이겨내겠다는 확신이 들어서입니다. 올해말이 되면 <투머로우> 독자 모두가 아버지를 ‘절친’ ‘베프’ ‘멘토’라고 소개하길 바라면서 스타트를 엽니다. - 편집자 주

우리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술을 많이 드셨다. 학교에 다녀오면 아버지가 늘 술에 취해 계셨다. 옛날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러셨던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는 유독 심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항상 잘못하셨다.

우리 집은 신작로 가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담장이 없어서 학생들이 학교로 오고 가는 길에 보면 집 안이 다 보였다. 친구들이 자주 나에게 와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걸 봤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싫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매번 지붕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래서 우리 집 지붕은 늘 시커멓게 타 있었고 비가 오면 빗물이 집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버지 때문에 부끄럽고 창피했다. 나는 아버지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기 싫어서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밖으로 나가고 아버지가 나가시면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원수 같았다.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스물세 살이 되어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내가 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강도 살인죄를 지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는데, 그런 나를 보니 그제야 아버지가 이해가 갔다. 나는 살면서 신조가 하나 있었다. ‘절대로 아버지처럼 살지 말자! 아버지처럼 사느니 죽자!’였다. 그런데 그 아버지보다 더한 사람이 나였다. ‘아버지는 술은 드셨지만 강도질은 안 하셨고 사람은 안 죽였잖아. 교도소 근처에도 가 보신 적이 없고…“

내가 아버지보다 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1심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 조사를 받기 위해 교도소 호송 버스를 타고 검사실로 갔었다. 속된 말로 ‘닭장차’라고 부르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호송 버스에 굴비 엮듯이 다섯 명씩 묶여 실려 가는데, 팔려가는 닭 신세와 똑같았다. 다른 죄수들과 묶인 채로 버스에서 내려 검사실을 향해 갔다. 그런데 검사실 앞 복도에 낯익은 모습의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뒷모습이었지만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나는 그때 굉장히 놀랐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복도에서 검사 서기의 다리를 붙잡고 “선생님, 우리 아들이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은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저한테 있습니다.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고 계셨다. 검사 서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통곡을 하시는 아버지!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조사를 받은 후에 호송 버스를 타고 교도소로 돌아가는데 눈물이 났다. 마음 깊은 곳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술만 드시고 어머니를 때리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그런 아버지였다. 입만 벌리면 욕이 나와서 잠시도 대화할 수 없는 아버지였는데, 그날 검사실 앞에는 전혀 다른 아버지가 계셨다. 180도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보아왔던 그 아버지는 누구였나?’ 술 마시고 지붕에 불 지르는 아버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내 눈으로 본다고 보고 내 귀로 듣는다고 들으며 살았다. 감각 하나로 아버지를 느끼며 그것이 틀림이 없다고 믿었기에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당당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도 눈이 있다.

마음의 눈이 떠질 때 ‘철들었다’고 한다. 그날 검사실 앞에서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고 나니 ‘아, 아버지가 이런 분이셨구나!’ 하며 만감이 교차했다.

집안 어디에도 아버지가 쉴 공간은 없었다

결혼한 남자라면 누구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또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 직장 상사, 동료들에게는 무시를 당할지언정 아내와 자녀들로부터는 존경을 받고 싶어 한다. 가족에게 무시받으며 살고 싶은 아버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어 보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는데, 두 번 부도를 맞은 후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가정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모두 상실한 채 집에만 계셨고, 어머니가 일하러 다니셔야 했다. 어머니는 억울한 마음이 많으셨다. 남편 잘못 만나서 고생하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니 아버지가 미우셨을 테고 그렇기에 남편 대우를 잘해 드렸을 리 없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로 인해 모든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기에 아버지를 좋아할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해 잘해보려고 한 아버지의 마음을 볼 만한 눈이 없었던 우리는 아버지를 원수로, 사라져야 할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집안 어디에도 아버지의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술이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술로 마음을 달래며 살다보니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가족에게마저 무시당하며 외롭고 고통스러웠을 아버지의 심정이 느껴졌다. 내가 강도 살인죄를 짓고 교도소에 갈 때 아버지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아들을 보며 자책감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을 아버지! 나는 그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송 버스를 타고가는데, 지난날들이 떠오르며 “아버지,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그날 이후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아버지는 답장을 보내주셨는데,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굉장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까지 나는 어두움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마음을 볼 수 없어 오해와 갈등이 생겼다

2003년에 출소해서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아버지가 위암에 걸리셔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형님이 바쁘셔서 나와 아내가 아버지를 간호했는데, 아버지의 병이 갈수록 위중해졌다.

하루는 큰누님이 아버지를 뵙는다고 병원에 왔다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기성아, 네가 교도소에 있었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는지 아냐? 아버지는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지 않았어. 전기장판 위에서 주무셨지.” 상이용사에 기초생활 수급자였던 아버지는 조그만 땅 하나를 작은누님 명의로 옮겨 놓은 후 나라에서 보조금을 받아 생활하셨다. 그리고 그 보조금마저 아껴 쓰시며 한 푼 두 푼 모아 나에게 준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한번은 형님이 사업을 하다 형편이 어려워지자 작은누님 이름으로 돼 있는 아버지의 땅을 팔려고 했는데, “그 땅은 절대 손 못 댄다! 기성이 몫이다! 기성이 출소하면 주거라!”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막내아들이 교도소에서 나오면 사글셋방이라도 얻어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큰누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기성아, 아버지가 시골 땅을 네게 주려고 하신 거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네 이름으로 옮겨 놓아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누나가 안 주면 어떻게 할래? 빨리 네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해라.” 귀가 얇은 나는 큰누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그렇겠다’는 마음이 들어 곧바로 작은누님과 매형을 찾아가 땅문서의 명의를 이전해 달라고 했다. 작은누님이 평소 같으면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요구를 들어주는데, 그날은 정색을 하며 그렇게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매형도 같은 의견이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누님과 크게 싸우고 아버지께 달려갔다.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를 꽂고 항암치료를 받고 계셨는데, 이성을 잃고 나는 주무시는 아버지를 흔들어 깨워 땅문서이야기를 꺼냈다. 눈을 감고 힘없이 누워계시는 아버지의 귀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그 땅문서요. 제 건데 작은누님 이름으로 해 놓으셨잖아요. 그거 제 이름으로 옮겨 주세요.” 그러자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시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시다가 고개를 돌리시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그 일이 있고 이틀 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데 작은누님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장례식만 끝나면 보자’는 마음으로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작은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성아, 우리 집에 잠깐 올래?”

“응,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누님을 찾아가 땅문서를 찾아오려는데, 아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다. 나는 누님과 크게 싸울 계획이었기 때문에 아내에게 ‘좋은 꼴 못 볼 테니 따라오지 마’라고 하고 혼자 갔다. 작은누님은 뜻밖에 무척 밝은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커피를 타서 주는데 마시고 싶지 않았다. 땅문서를 안 주려고 수를 쓰는 것으로 보였다. 안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누님이 땅문서와 아버지가 모아놓은 돈을 가져왔다.

“기성아, 이제 이거 가져가라.”

“어? 이거 왜 나한테 주는데?”

누님이 울면서 나에게 말했다.

“기성아, 나는 솔직히 병원에서 이거 너에게 다 주고 싶었다. 내 것도 아니니까. 너를 만나고 나서 아버지께 여쭤봤다. 기성이에게 모두 다 주면 안 되겠냐고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성이 그 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어.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려고 하는데, 아버지 걱정은 안 하고 땅문서를 달라고 해? 기성이가 정신 못 차렸다. 내가 죽거든 주거라’ 하시더라.”

누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땅문서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온 내 인생, 내 모습이 보여서였다. 누님이 땅 문서를 주지 않겠다고 했을 때 나는 누님의 말만 들었지, 누님의 마음은 보지 못했다. 누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지만 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거 내 거 아닌데, 아버지께 여쭤보고 줘야겠다’는 누님의 마음을 볼 수 없었기에 오해했고 거기에서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23년이 지난 뒤에야 깨달은 사랑

자식을 향해 미움을 품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자식을 망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아버지는 없다. “야! 이 미친놈아!”라고 욕을 해도 그 속에 사랑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한국말이 어렵다. 외국 사람들은 ‘미친놈’ 속에 들어 있는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밥을 먹다가 “야, 우리 집안에는 다른 문제가 없으니 너만 공부 잘하면 돼!”라고 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그 말에 기분이 나빠져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화를 냈다. “아버지! 그렇다면 이 집안에서 나만 없어지면 되겠네요. 잘 됐습니다. 아버지가 미워하시니 사라져드리겠습니다!” 아들은 이렇게 말한 뒤 벌떡 일어나더니 창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죽은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아들아! 아들아!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다, 아들아!”라고 소리치며 통곡하지 않았겠는가?

가장 큰 불효는 ‘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시지 않아.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실 거야’라는 생각을 품고 사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 나를 향한 사랑이 있었다. 23년이 지난 어느 날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그 사랑을 보았고 내가 아버지보다 못난 인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김기성
출소와 함께 젊은 날의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마인드교육 전문 강사로서 국내는 물론 해외 대학과 교도소에서 생명존중 교육을 주로 하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몽골기술대학교에서 교육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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