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들은 파견국에서 현지인을 위한 봉사활동은 물론 한국어와 드라마, 영화 등 한국 문화를 알리는 민간외교관으로 활약하고 있다.
​멕시코 굿뉴스코 단원들이 주멕시코 전비호 대사를 만났다. 36년 동안 외교관으로 활약한 그는 내일의 외교관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들려주었을까?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지난해 미국 내 국제관계학 학자 1,615명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설문을 실시했다. ‘지난 50년간 국무장관을 거쳐간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누구였나’ 대선후보였던 힐러리, 흑인 출신의 콜린 파월, ‘철의 여인’ 올브라이트 등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은 1973~77년 재임한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였다.
키신저가 남긴 업적들을 보면 쉽게 수긍할 만한 결과였다. 명칭만 놓고 보면 국무부를 국가내정 전반을 담당하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국무부는 미국의 외교업무를 총괄하는 부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해 온 미국에 있어 외교를 관장하는 국무장관은 중책 중의 중책이다. 키신저가 장관을 맡던 시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 사이에는 차츰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진영은 여전히 서로를 경계하며 불신과 우려 섞인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두 세력 간에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이 키신저였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있던 1971년, 그는 중국을 방문해 최고지도자 모택동의 대리인 주은래를 만났고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 및 모택동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닉슨의 중국 방문은 냉전체제의 종식을 여는 서막과도 같았다. 얼마 후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의 생산과 배치를 제한하는 ‘전략무기 제한 협상’에 서명했으며, 일본 역시 1972년 9월 중국과 수교를 맺기에 이른다. 1973년에는 베트남전 종식을 앞당긴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키신저를 보며 ‘나도 저렇게 세계 평화와 조국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이 있었다. 몇 년 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소년의 꿈은 대학 3학년이던 1980년 외무고시에 합격하며 작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 소년이 바로 지금의 주멕시코 대사 전비호다.

말보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하던 선배 반기문의 가르침
외무고시에 합격해 5급 사무관이 된 전비호가 첫 배치된 부서는 외무부 내 국제연합과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관이라면 모름지기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지를 몸소 가르쳐 준 훌륭한 선배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UN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이었다. 당시 국제연합과 과장으로 있던 반기문은 일에 대한 의욕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외무부 내에는 ‘반의 반만 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반(기문)이 하는 것의 절반만 해도 성공한다’는 의미였다. 전비호 대사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가까이서 본 반기문 과장님은 일을 하면 할수록 엔돌핀이 생겨 에너지가 채워지는 분이었어요. ‘반의 반만 하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막상 제가 사무관으로 일을 해보니 반 과장님이 하시는 것의 절반만 하기도 벅찰 정도였어요.”
열세 살이나 많은 대선배가 20대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열성적으로 일하는 모습은 그에게 훌륭한 자극이 되었다. 그래서 전비호 역시 나름의 업무원칙을 세워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과장님께서 궁금해 하시는 사항이나 지시하신 업무가 있으면 반드시 그날 내로 답을 찾아 결과를 보고하거나 어떻게 진행할지 계획을 말씀드렸어요. 나중에는 과장님께서도 저를 보고 ‘전비호 사무관은 비호飛虎처럼 빠르다’고 칭찬하실 정도가 되었지요.”
전 대사와 반 총장의 인연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2011년 그가 주불가리아 대사로 근무할 때 반 총장이 불가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불가리아 정부의 배려로 전 대사도 반 총장의 일정에 동행하게 되었다. 불가리아의 보리소프 총리가 주최한 만찬에서 반 총장이 보리소프 총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총리님,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한국 대사의 이름이 전비호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전비호全飛虎는 all flying tiger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업무처리가 비호처럼 빨랐습니다.”
반 총장의 말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었던 만찬은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해외를 방문하는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휴식시간이나 이동시간 등 자투리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반기문을 보며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채찍질했다고 한다.
“반 총장님은 차로 이동하는 중에도 이스라엘 총리와 팔레스타인 대표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중동지역 평화협상을 주재하려고 하셨어요. 그 모습을 보며 ‘총장님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저렇게 시간을 아껴가며 일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나는 과연 저만큼 일분일초를 쪼개가며 일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도 했어요.”

외교관 생활의 터닝포인트가 된 유럽 유학시절
전 대사가 외무부에서 근무한 지 9년쯤 지난 1980년대말, 국비로 유학을 다녀올 기회가 주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영미권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유학지로 선호하는 곳이다. 하지만 그가 택한 곳은 스페인의 국립마드리드대학교였다.
“하버드대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다 외교관이 된 키신저처럼, 저도 국제정치를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되기도 전에 먼저 외무고시에 합격하는 바람에 외교관이 된 뒤에야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스페인 유학을 결심한 건 ‘우리나라는 앞으로 10~20년이 지나면 중남미 등 스페인어권 국가들과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중남미에 많이 진출하고, 청년들도 일자리를 찾거나 창업을 하러 가고 말이죠.”
마드리드대에서 공부하며 그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주제는 ‘유럽통합’이었다. 80년대 말의 유럽은 그야말로 격변기였다.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동서독이 통일되었고,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 등 동구권 국가에서는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의 유럽연합EU 가입논의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유학 중 EU 집행위원회에서도 근무하면서 독일이 통일되고 공산국가들이 민주화를 거쳐 EU에 편입되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북한에도 민주화가 일어나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지요.”
전 대사가 유학을 하며 쌓은 경험은 그의 외교관 생활에도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주유럽연합 한국 대표, 유럽통상과 과장, 주프랑스 대사관 참사관, 주불가리아 대사. 그의 약력을 살펴보면 유난히 유럽 관련 부서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점이 눈에 띈다. 유럽 근무 경험을 살려 외교부 내에서 손꼽힐 만한 유럽통, 유럽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한 덕분이다. 또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다른 여러 나라들이 유럽연합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 나가는지를 눈여겨보았다고 한다. 자연히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우리 교민들이 겪는 불이익을 해소하고 각종 행정적 규제를 철폐하는 데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다.
“2004년 주프랑스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할 때 일입니다. 당시 파리에는 한국 식당 수가 유난히 적었어요. 중국인이야 워낙 오래 전에 진출해서 차이나타운을 형성할 정도였고, 일본 식당도 흔했어요. 베트남 등 과거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동남아 식당도 많았지요. 이유를 알아보니 외국인이 와서 사업을 하려면 상업증을 발급받아야 했는데, 유독 한국인에게만 그 상업증을 쉽게 발급해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경제부, 재무부, 내무부, 이민국 등을 찾아다니며 상업증 발급절차를 간소화하거나 상업증 제도 자체를 철폐해 달라고 건의했어요. 투자진흥청 차장을 열 번도 넘게 찾아가며 협상을 벌인 끝에 한국인들에게는 상업증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후 파리에는 한국 식당 수가 급격히 늘어나 지금은 시내 어딜 가나 한국 식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어요. 교민들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 크게 보람을 느꼈습니다.”

언어장벽보다 넘기 힘든 건 ‘차별’이라는 마음의 장벽
우리의 뇌리에 새겨진 외교관의 이미지는 대개 다음과 같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세계를 누비며 국제회의에서 유창한 외국어로 거침없이 연설하고,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를 앞세워 국익을 추구하며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글로벌 인재!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화려한 외교관의 겉모습 뒤로는 말 못할 고충도 많다. 사나흘 일정의 국제회의 하나를 참석해도 몇 주에서 몇 달 동안 철저한 준비를 거쳐야 한다. 외교관은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이기에 사소한 발언도 자칫 확대해석되어 국가 간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서명 하나에 땅덩어리가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기후와 생활환경이 전혀 다른 나라에서 가족들과 함께 적응하는 것 또한 큰 숙제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대해서도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힘들지만 국익에 기여한다는 사명감 없이는 해내기 힘든 직업이 외교관이다. 전 대사는 어땠을까?
“우선 외국어를 배우기가 힘들었습니다. 근무지가 바뀔 때마다 새로 언어를 배워야 했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했습니다. 외교부에서는 첫 해외발령지가 코스타리카여서 스페인어를 익혔지요. 또 벨기에 브뤼셀의 EU 집행위원회에서 일하려면 프랑스어로 회의를 할 정도의 실력이 되어야 했습니다. 한 번에 3시간씩,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 다니며 프랑스어를 공부했어요.
그렇게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제가 회의에 참석해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하자 다들 깜짝 놀라더군요. ‘당신이 이렇게 프랑스어를 잘하는 줄 몰랐다. 앞으로는 당신 앞에서 말조심해야겠다’라고요.”
언어의 장벽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건 ‘차별’이란 마음의 장벽이었다. 어떤 인종, 어느 나라 출신이냐에 따라 그 외교관에 대한 대우도 천차만별이었다. 선진국 외교관들은 개도국 외교관을, 또 미국과 유럽 외교관들은 아시아 외교관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지금이야 대한민국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외교관들이 무시당하는 일도 줄었고 발언권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우리 외교관을 향한 무시나 차별대우는 말도 못할 만큼 심했어요. 속이 상할 때도 많았지만 전혀 표출하지 않고, ‘꿀릴 것 없다. 우리도 저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는 파트너다’라는 마음으로 대하며 당당하게 일했지요.”

오천만 국민 모두가 외교관이다
공직자나 유학생, 기업체 직원 등 특별한 사람만 해외에 갈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해외로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전비호 대사는 ‘이제는 <투머로우> 독자들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젊은이가 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여러분이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남이 시켜서 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가 지금 내 위치에서 할 일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주인의식을 갖길 바랍니다. 저는 노마드(방랑자) 기질이 있어 해외에서 근무할 때면 첫 6개월 동안은 근무지 반경 300~500km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다녔어요. 그렇게 현장을 발로 뛰며 그 나라의 경제, 역사, 문화, 현지인의 생활모습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이 나라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이 해외에 가서 단정한 복장과 공손한 언행으로 그 나라 사람들을 대하면, 그들도 대한민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라는 자세를 갖고, 한글이나 K-팝, 드라마, 영화 등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린다면 한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요즘 전비호 대사는 2008년 이후 논의가 중단된 한-멕시코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추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외교란 무조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상대국의 입장도 배려하며 서로 윈-윈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진정한 외교다. 전 대사가 한-멕 FTA를 추진하는 것도 그래서다. 한국 기업들은 멕시코의 자원과 노동력을 활용해 경쟁력을 갖추고, 멕시코 또한 국민들이 일자리를 얻고 산업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6.25 전쟁 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우리나라가 지금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경제발전을 위해 애쓴 기업인들 못지않게 우리 외교관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간외교관’이라는 그의 말이 새삼 크게 와닿는다.
“얼마 전 한 외교행사에 참석했는데, 멕시코의 유명한 테너가수가 노래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멕시코가 바뀌기를 바란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고요.
여러분도 대한민국이 바뀌길 바란다면, 먼저 대한민국의 일원인 여러분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자세로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 Ralf Roletschek
© Ralf Roletschek

※ 전비호 대사가 말하는 ‘기회의 땅’ 멕시코
“우리 국민들이 처음 멕시코 땅을 밟은 것은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인 1,033명이 ‘애니깽’이라 불리는 선인장 비슷한 열대식물로 밧줄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한 것이 멕시코 이민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지금 멕시코는 한국과의 무역규모만 145억 달러에 이르는, 우리 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멕시코 입장에서도 한국은 세계 6위의 교역대상국에,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멕시코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나라입니다. 지난해 4월 우리 대통령이 브라질, 칠레, 페루, 콜롬비아 등 남미 4개국을 방문했는데, 이 네 나라에 대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을 합치면 약 52억 달러입니다. 반면 멕시코 한 나라에 대한 수출액은 연간 108억 달러나 됩니다. 중남미 10여 개국에 수출한 액수를 합친 것보다 멕시코 한 나라에 수출한 액수가 더 크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또 세계의 공장 노릇을 하던 중국이 최근 글로벌 경기침체와 임금인상으로 생산여건이 나빠지면서 다국적기업들은 멕시코로 생산거점을 옮기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 9월 기아자동차가 멕시코의 누에보 레온주에 공장을 완공했는데, 2018년이면 연간 4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삼성전자도 UHD TV 공장을 설립했는데, 전세계 UHD TV 생산량의 30%가 이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밖에 멕시코에 등록되어 있는 우리 기업들은 1,800개에 이릅니다. 이들 기업들은 스페인어 실력과 전공지식을 갖춘 한국인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생 여러분들도 멕시코로 눈을 돌려 보시는 건 어떨까요? 멕시코는 엄청난 발전가능성을 품은 기회의 땅입니다.”

 

취재 | 최은성 중남미 총괄이사, 장건영, 신보경(멕시코 굿뉴스코 단원)
​글 | 김성훈 기자 사진 | 신창은 객원기자 디자인 | 김진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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