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면류관 아래 검게 그을린 얼굴, 실제 크기의 조각상을 짊어지고 맨발로 행진하는 사람들, 이를 지켜보는 1천만 인파… 매년 1월 9일 필리핀 마닐라 시내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예수의 성상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블랙 나자렌(Black Nazarene)’ 축제를 소개한다.

‘블랙 나자렌’은 1606년 멕시코의 조각가가 만든 예수(성경에서 나사렛 예수라고도 불림)상을 필리핀으로 운반하던 도중 배에 화재가 나 얼굴이 검게 변한 데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 이 조각상은 마닐라에 들어온 후로도 수차례의 지진과 화재를 겪었지만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어 ‘기적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국민들에게 이 축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필리핀의 블랙 나자렌 축제 (출처=페이스북)
필리핀의 블랙 나자렌 축제 (출처=페이스북)

검게 그을린 예수상은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고통스러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도 당시 예수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 듯 신을 싣지 않은 채 맨발로 행렬에 참여한다. 또 십자가가 지나가면 자신의 손수건을 십자가에 갖다 대기 위해 조각상 근처로 몰려드는데, 십자가에 닿은 손수건으로 몸을 문지르면 병이 낫고 육체의 죄도 씻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 1월 9일에 열린 이 행사에는 시민과 관광객 등 총 1,500만 명이 참가했다. 출발지인 리잘 공원에서 기도를 마친 후 조각상이 모셔져 있는 퀴아포 성당까지 돌아 오기 위해 평소 15분 소요되는 거리를 20시간 이상을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평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올 한해의 기적을 염원하며 검은 예수상과 함께 걷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평안을 얻는다.

최근 크고 작은 국가 행사 때마다 이슬람 반군세력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폭탄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자 필리핀 정부는 올해 행사의 안전을 위해 경찰과 소방 인력 1만 5천 7백여 명을 현장에 투입하고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했으며, 영국과 미국 대사관은 테러 위험에 대비해 필리핀을 여행하는 자국민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카톨릭과 종교적 신념을 달리하는 두테르테 대통령 역시 올해 행진에 참여한 이들에게 격려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종교를 넘어, 이제는 전 국민의 축제로 자리 잡은 블랙 나자렌 축제가 ‘기적’을 꿈꾸는 필리핀 국민들에게 계속해서 희망과 평화의 상징이 되길 기대해본다.

마닐라(필리핀)=김은선 글로벌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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