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군인 출신답게 좀처럼 속내를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섭섭했던 적이 많았다는 대학생 홍바울 씨. 고교 졸업과 동시에 도망치듯 아버지 곁을 떠났지만, 이제는 그 무뚝뚝함 뒤에 숨은 사랑을 깨달았기에 지구 반대편에 계신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워졌다고 한다.

선교사 아버지를 따라 처음 미국에 간 게 언제였습니까?
1997년, 한국 나이로 네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선교학교를 졸업하시고 처음 발령받은 곳은 미니애폴리스라는 도시였는데요. 교회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인도 한두명 밖에 없고 재정도 넉넉하지 않아 밥과 김치를 주로 먹으며 생활했어요. 어머니랑 유치원에서 내 준 만들기 숙제를 하는데 풀이 없어 밥풀을 대신 썼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댈러스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멕시코나 파키스탄 등 이민자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였습니다.

영어말하기 대회에서 초등학교 때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을 발표했습니다. 이민자 자녀들이 같은 이민자 자녀인 바울 씨를 괴롭힌게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전에는 제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모여 점심 도시락을 먹는데 전 김치나 김밥을 싸 갈 때가 많았어요. 도시락을 풀어 놓는데 다들 ‘이게 무슨 냄새냐?’며 얼굴을 찌푸리더군요. ‘양파 냄새, 마늘 냄새 난다. 눈은 또 왜 이리 작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되게 부끄러웠죠. 그때부터 ‘아, 나는 얘들과 뭔가 다르구나. 나는 한국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때 부모님과 두 달 정도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어릴 때는 언어를 쉽게 배우지만 또 그만큼 쉽게 잊어버리잖아요? 두 달 간 한국에 있다 보니 그새 영어를 다 잊어버린 거예요.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입에서 영어가 나오지 않아 학교에서는 영어 못하는 학생들만 따로 가르치는 특별반으로 저를 보냈습니다. 전보다 더 무시받을 상황이 된 거죠.
미국 초등학교에는 ‘리세스recess’라고 해서 30분씩 운동장에 나가서 노는 시간이 있어요. 한번은 멕시코 아이 둘과 파키스탄 아이가 다가오더니 저를 차서 넘어뜨리며 욕을 했어요.

그렇게 괴롭히던 아이들과 어떻게 친한 친구가 되었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어요. 아버지께 그 일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 얼굴에 화난 기색이 보였어요. 하루 동안 깊이 생각을 하시더니 절 불러 말씀하셨어요. ‘내가 걔들을 찾아가 직접 혼내줄 수도 있고, 선생님께 조치를 취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이 문제를 혼자서 이겨낼 마음의 힘을 키우길 바란다’라고요. 섭섭했지만, 그렇게 괴롭힘과 놀림을 당하며 지내던 어느 날 멕시코 아이들 중 카를로스라는 친구가 ‘나는 너랑 같이 놀고 이야기도 하고 싶어’라며 말을 걸어왔어요. 그때부터 절 괴롭히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어요. 밥도 같이 먹고 운동도하고 서로 집에 놀러가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어요. 외동아들이라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보니 늘 내 것만 먼저 챙기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친구들과 부딪히고 무시도 당하면서 마음도 강해지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도 배웠습니다.

고1이던 2010년, 13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남아공으로 갔습니다. 여건이나 음식, 기후, 사람들의 성격 등이 많이 달라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보다 잘 삽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이 파송된 교회는 재정적으로 그다지 풍족하지 않아 하루 두 끼를 먹는 날이 많았어요. 특히 옥수수가루를 끓는 물에 풀어 떡처럼 반죽해 만든 ‘빱’이라는 음식은 도저히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녁에는 한국 음식을 먹었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재료로 한국 음식을 만들다 보니 양배추로 김치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배추는 비싸거든요.

남아공에서 강도들에게 바지를 뺏겨 속옷 바람으로 집에 돌아왔다고요? 치안이 그토록 취약합니까?
교회 바로 옆에 빈민촌이 있었는데, 무법지대로 불릴 만큼 치안이 나빴어요. 특히 외국인은 해가 지면 차를 타지 않는 이상 집 밖에 나오면 안 됩니다. 강도의 표적이 되니까요. 강도가 잦아서 집집마다 담에 전기철조망을 설치합니다. 교회도 부지가 7천 평쯤 되니까 개들을 풀어놓고 주기적으로 순찰을 돕니다. 그런데도 한번은 권총 강도가 들어와 아버지 머리에 총을 들이대며 스피커 등 교회 물건을 훔쳐간 적이 있어요. 저는 공원에서 축구를 하고 돌아오다 강도를 만났어요. 2,30대 청년들이었는데 한 사람은 뾰족한 유리조각을 손에 쥐고 있었고, 한 사람은 품에 권총을 갖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했던 것 같아요(웃음). 같이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신발, 휴대폰, 디지털 카메라 등을 뺏겼는데, 저는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만 유일하게 비싼 브랜드라 그걸 내놓으라더군요.

지난 여름 아버지가 계시는 남아공에 가 마인드 강연을 하시는 아버지를 통역했다. 마음이 통했기 때문일까. 마이크 잡은 자세와 제스처가 꼭 닮았다.
지난 여름 아버지가 계시는 남아공에 가 마인드 강연을 하시는 아버지를 통역했다. 마음이 통했기 때문일까. 마이크 잡은 자세와 제스처가 꼭 닮았다.

아버지를 남다른 분이라고 표현했는데, 여느 부모들과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들을 독립시킨 걸 보면 교육법이 독특한분 같습니다.
평소 아버지께 불만이 많았어요. 선교사가 되기 전 아버지는 사관학교를 나온 직업군인이셨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어요. 한국에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는데, 선교사가 되어 남의 나라에서 사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아버지가 무뚝뚝한분이라 아들인 저한테도 마음의 표현을 잘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다 보니 마음의 골이 점점 깊어졌죠. 밤만 되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즐길거리도 없고 답답한 아프리카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탈출구는 유학밖에 없다’는 생각에 아침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공부에만 매달려 전교 1등을 했습니다. 영국의 킹스칼리지에 합격했지만 2만5천 파운드(약 3천7백만 원)나 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진학을 포기했어요. ‘아프리카를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한국으로 보내기로 결심하신 거죠.

외국 생활만 하다가 한국에 와서 지내기가 힘들었을 텐데요.
겉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은 외국인이니까요. 평생 ABC로 된 간판만 보고 살다가 거리에 한글 간판이 많은 게 신기했고, 적응이 되지 않았어요. 해외에 살면서도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니까 웬만한 소통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도, 뉴스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국 사람들은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이 빠른지….
친척집에서 살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영어 통역, 카페, 편의점, 심지어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막노동까지 했어요. 막노동꾼들 중 대다수는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경험한 분들이었어요. 사업을 하다 망한 분, 유학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분…. 물론 저도 그 중 하나였어요. 전에는 제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 가서 보니 몸뚱아리 하나로 겨우 먹고사는 사람에 불과했어요. 부모님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연락은 못했죠.

아버지가 한국에 오셨을 때 할 이야기가 많았겠어요.
고생하면서 저절로 아버지의 마음을 더듬게 되더군요. ‘난 부모님이라도 계시지만, 아버지는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고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 ‘한국에서의 삶을 접고 아프리카까지 오신 이유가 뭘까? 그만큼 아프리카 사람들을 돕는 삶이 보람 있어서였을 거야.’ 원고는 분량이 짧아 아버지와 기차 안에서 화해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아버지를 뵙기 전부터 섭섭한 마음은 80% 이상 풀린 상태였어요.
 2015년 여름에 알바를 그만두고 대학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고려대 재외국민 전형에 지원하려고 자소서, 졸업장, 토플 성적표 등을 준비하는데 하나하나 따져보니 그 모든 게 아버지가 준비해주신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 덕분에 해외에서 살며 자연스럽게 미국 영어와 아프리카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게 되었거든요. 아프리카에서도 아버지를 따라 남아공 외에 10여 개국을 다니는 동안 견문도 넓어지고 글로벌 감각도 익혔습니다. 특히 재외국민 전형에는 외교관이나대기업 주재원 자녀들이 많이 지원해요. 다들 미국이나 유럽, 호주, 중국 등 선진국에서 공부했고 스펙도 화려합니다. 그런데 내세울 것 없는 제가 합격했어요. 선배들은 ‘네가 아프리카에서 살다 온 점이 높이 평가받은 것 같다’고들 해요. 그토록 싫어하던 아프리카였지만, 오히려 그 아프리카 덕을 본 거죠. 전에는 ‘아버지는 영어도 서툴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하며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았어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이 아버지 덕분에 얻은 건데, 그걸로 아버지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아버지 덕분에 영어를 잘하게 된 것도, 명문대에 입학한 것도 감사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마음으로 소통하고 또 어려움을 이길 강한 마음을 갖게 되어 기쁩니다. 늘 고생하시면서도 ‘나는 참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를 이제는 이해하고, 또 존경합니다. ‘네가 나처럼 살기를 바란다’시던 아버지, 이제 저도 아버지처럼 살고 싶습니다.

홍바울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2학년이다. 앞으로 군입대나 취직,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관문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가 길러주신 강한 마음의 힘을 바탕으로 뛰어넘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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