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서울대를 목표로 할 만큼 뛰어난 성적에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해 학교축제 무대에 오를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이하민. 주말에 어떤 예쁜 옷을 입고 외출할지 고민하고, 친구들과 수다 떨기 좋아하는 모습은 스물한 살 여대생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태양의 후예’를 꿈꾸는 육사 생도라는 점. 극한상황에서 치러지는 군사훈련을 받는 동안 일상의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싫어하던 초코파이가 삶의 낙이 되었다는 그녀. 원고에 미처 담아내지 못한 육사 생활과 군인 정신 이야기를 신나게 쏟아냈다.

원고에 보면 ‘서울대와 육사를 놓고 진로를 결정할 때, 육사에서만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원고에서 발표한 기초군사훈련 과정을 마치고 1학년 때까지는 주로 육사에서만 생활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1학년 때는 학교에 적응해야 해서 6개월 동안 외출을 못하고 주말에만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어요. 동생 말로는 어머니가 월요일만 되면 토요일에 저한테 뭘 싸갈지 고민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갈비탕을 만들어 오신다면, 보온병에 담아오는 동안 얼마나 식을지까지 계산해서 싸오실 정도로 지극정성이셨어요. 제가 일반 대학에 진학했다면 항상 친구들이랑 노느라 바빴을 거예요.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가족들과 더 가까워졌죠.
육사에 와서 배운 또 한 가지 사실은, 저 혼자 할 수 없는 것도 여럿이 하면 가능하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육사에 갓 입학했을 때 체력이 좋은 편이었어요.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1km 뜀걸음에서 다 1등급을 받고 입학했죠. 그런데 단독군장 뛰는 일은 체력 좋은 저한테도 고역이었습니다. 전투조끼와 방독면을 착용하고 소총을 들고 뛰는 훈련인데, 몸에 무언가를 달고 뛴다는 일이 너무 버겁고 힘들었어요.
어느 날 겨울에 그 훈련을 하는데, 다른 남생도들에 비해 뒤처지면서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도 안 쉬어졌어요. 혼자 뒤처지면 힘들었을 텐데, 앞서가던 동기들이 다시 뒤로 뛰어와서 저를 손으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같이 데리고 가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동기애를 배웠습니다. 기초군사훈련 때 교관님들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옆의 동기를 끌고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걸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든 마음 깊이 새겨야 된다고 생각되는 교훈이었죠.

어디에서도 쉽게 배울 수 없는 마음가짐을 배우고 있네요. 육사시절이 앞으로 인생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배부른 상태에서 먹은 초콜릿은 맛이 없지만, 훈련을 받다 지쳐 단것이 정말 당길 때, 그때 초콜릿 한 조각을 먹으면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저는 대학에 입학해서 무질서 속에 사는 것이 싫었어요. 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육사에서는 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생도들끼리 줄을 맞춰 이동하고, 숙소에서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책상이나 옷, 신발 등을 깨끗이 정리해놓고 나가야 합니다. 매사에 절제된 삶을 살다 보니 평소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살던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를 알게 되죠. 친구도 그렇고 가족도 그래요.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땀 흘려 벌지 않은 돈은 오히려 막 쓰잖아요? 그 가치를 모르니까요. 육사에서 훈련을 받으며 지내다보면, 작은 것의 가치를 알게 돼요.

‘절제된 생활 속에서 오는 행복’이라고 하셨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육사는 평일에 일과가 많아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점호 (인원 점검)를 받고 식사하고 청소하고, 7시 30분에는 전교생이 모여서 아침 조회를 하며 보고를 해요. 그 다음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해 저녁 때까지 체육수업을 받고, 뜀걸음도 합니다. 그러고 나면 자유시간이 2시간 주어져요. 그 뒤엔 2시간의 자습이 있고, 취침점호를 합니다. 하루 일과가 정말 바쁘게 흘러가죠.
전 그 바쁜 일과 중 저만을 위한 시간으로 밤에 일기를 씁니다. 그 시간은 오롯이 저를 위한 순간이에요. 사람이 바쁜 일과 속에 빠져 있다 보면 자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일기 쓰는 시간만큼은 저를 돌이켜보면서 온전히 ‘나’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오늘 너무 힘들었으니 술로 풀자’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이건 자신이 힘든 이유를 밖에서 찾는 것 같아요.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는 자기 내면에서 이유를 찾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이곳에서는 상급생에게 혼나는 일도 빈번한데, 그때 자괴감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일기를 쓰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가장 친한 동기와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다 풀려 있어요. 제한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면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고, 짧은 여유 속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육사에서 지내면서 멘토로 삼고 있는 분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나요?
육사에 합격하면 4주간 기초군사훈련(기훈)을 받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입학하기 전이라 가입학假入學 생도라 불렸습니다. 기훈 기간에는 3학년 생도들이 저희 훈육을 담당했는데, 정말 엄하게 훈련을 시켰습니다. 제가 말하기대회발표 때 ‘Scary people were shouting at me all the time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온종일 저를 향해 소리질렀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바로 이 분들이었어요. 항상 정갈한 옷차림에 무표정한 얼굴, 늘 저희보다 먼저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고. 제식도 칼같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마치 로봇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행동이 항상 느려서 어느 선배 여생도에게 매일 지적을 받았습니다. ‘샤워시간, 3분!’이라고 하면 그 시간 내에 샤워를 마쳐야 합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서 ‘10초 준다, 실시!’하면 어떻게든 10초 안에 끝내야 해요. 그런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제가 매번 행동이 느리다보니 자주지적을 받았습니다. ‘3주차가 끝나고 4주차에는 더 힘들고 빡빡한 훈련이 기다리는데, 어떻게 할 거냐? 왜 이리 매번 늦냐?’고 하시는 걸 보며 ‘아, 100% 저 선배에게 찍혔구나’ 생각했죠.
생도들은 생도대生徒隊라고 해서 군인처럼 연대, 대대, 중대, 소대 등에 소속되어 생활합니다. 4주 훈련을 마치고 입학식 날, 분대(보병 부대의 가장 작은 편성단위) 배정을 받았어요. 4학년 선배가 함께 생활하고 싶은 1학년 생도들을 뽑는데, 매번 저를 무섭게 대하던 그 선배가 제 이름을 부르더군요.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선배께서 제가 자신의 1학년 때 모습과 너무 닮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더 지적하고 혼을 낸 거였습니다. 속으로는 그런 과정을 견디고 이겨내길 바라시면서요. 나중에야 그 마음을 알게 된거죠. 그 선배는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부산에서 근무하고 계신데, 제가 휴가 때 찾아갈 정도로 인생의 멘토 같은 분이세요. 제가 가려는 길을 먼저 걷고 있는 분이기 때문에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전화를 드리기도 하고요.

어느덧 3학년 진급을 앞두고 있습니다.육사에서 생활하며 겪은 가장 큰 내면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사실 생도는 학생이라기보다 군인입니다. 군사훈련은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던 셈이죠. 정말 신기한 건 그 4주 동안 사람의 사고가 바뀐다는 사실이에요.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군인의 최고 덕목이잖아요? 훈련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해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근성을 체득했습니다. 전에는 잘못을 해서 지적을 받으면 변명하기에 급급했어요. 예를 들어 약속시간에 늦으면 ‘버스를 놓쳐서 늦었다’고 핑계를 댔죠. 하지만 지금은 ‘내가 왜 버스를 놓쳤을까? 아까 이 일을 조금만 빨리 마쳤더라면, 식사시간을 줄였더라면 제시간에 맞출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자신에게 엄격해지더군요.
그러다보니 자연히 ‘지금 내가 생각하는 실패의 이유가 과연 정당한 사유일까, 아니면 핑계나 변명에 불과한 것일까?’를 스스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제한된 일과시간 내에 공부와 과업을 마쳐야 하다보니 우선순위를 두고 일을 처리하는 요령도 생겼습니다. 단체생활에 자신을 맞추는 법도 배웠고요. 무엇보다 옛날에는 무조건 안된다고 지레짐작하고 포기하던 일들도 ‘일단 해 보자’는 자세로 부딪히고 도전하게 된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하민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할 때면 군가를 부르며 흥을 푸는 꿈 많고 패기 넘치는 육사 생도. 절제된 생활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고 있다는 말에서 어린 나이에 찾아보기 힘든 강단이 느껴진다. 국제관계학과 2학년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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