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꽃과 나무, 멋진 건축물, 이국적인 거리…. 여행을 하다 보면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하지만 거기에 눈을 돌릴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바로 옆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도 무의미할 것이다.
어려서부터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본질을 고민하던 김진희 씨. 현재 그녀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국제협력원에서 프로그램 전문가로 일하며 오늘도 새로운 꿈을 찾아 전진하는 삶을 산다.

아프리카로 떠난 ‘호기심 소녀’
어린 시절, 김진희 씨는 유난히 호기심이 강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선생님께 자주 질문을 했다. 얼마나 질문을 좋아했던지 선생님께 질문을 할 수 없는 방학이 싫을 정도였다. 리더십과 추진력이 뛰어나 주위에 늘 친구들을 몰고 다니던 그녀는 중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독특한 아이’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물론 원인은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진도를 나가기에 바쁜 선생님들의 눈에 늘 질문을 쏟아내는 진희 씨는 그야말로 발목을 잡는 존재였다. 창의력을 발휘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은 채 단편적인 지식의 암기만을 강조하는 교육과정 탓에 진희 씨는 학교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영어와 세계지도를 유독 좋아했던 진희 씨는 다른 나라에도 관심이 많았다. ‘나한테 어울리는 학습환경을 갖춘 나라는 없을까?’ 하고 해외로 눈을 돌리던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한국에서 온 해외봉사자들과 굿뉴스코 남아공 지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무료아카데미 운영, 한국에서 온 의료봉사단 통역, 청소년캠프 통역 등 학교 안에서는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교도소를 방문했다. 가난에 막혀 삶의 목표 없이 방황하다 범죄를 저질렀던 청소년들이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수감되어 있었다. 석방된 뒤에도 남학생들은 마약거래에 가담하고, 여학생들은 사창가를 전전하는 등 여전히 어두운 삶을 살았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그때부터 빈곤, 교육, 여성인권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교수님의 조언 ‘성적이 네 공부의 목적이 되지 않길 바란다’
개발도상국의 교육발전을 돕는 학문(개발학)을 계속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그녀는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 명문 옥스퍼드대와 런던대에 합격했지만 그녀가 선택한 곳은 개발학 부문 랭킹 1위인 서섹스대학이었다. 서섹스대는 비록 인지도는 밀리지만 교수가 학생을 일대일로 지도해주는 전담 멘토링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멈출 줄 모르는 그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멘토링 시스템은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것을 볼 통찰력을 길러준다. 여기에 장학금까지 지급하기로 해 그녀에게는 딱 맞는 대학이었다.
서섹스대에 진학해 열심히 공부하던 어느 날, 같은 과의 최우수 학생이었던 독일인 친구가 학업과 취업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사건 후 진희 씨의 지도교수는 그녀를 교수실로 불러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진희야, 나는 네가 성적을 두고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본질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가 많아. 높은 성적이 네 공부의 목적이 되지 않길 바란다.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공부한다면 당장 높은 성적을 못 받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공부를 하는 근본목적을 생각하면서 논문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길 바래. 네가 그 고민을 충분히 즐겼다면 높은 성적을 받지 않아도 나는 네가 충분히 자랑스러울 거야!”
이후 김진희 씨는 자신에게 버릇처럼 묻곤 했다. ‘내가 지금 왜 이 고민을 하지?’ 공부를 하거나 취직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본질, 즉 근본목적을 잊어버릴 때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자신을 남의 기준에 맞추는 대신 자신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며 그 고민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같이’의 가치를 일깨워 준 굿뉴스코 프로그램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 페루에서 6개월 동안 굿뉴스코 봉사단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진희 씨는 자신의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페루 국회 교육분과에서 청년대표 자격으로 ‘국제사회에서 청소년의 역할과 역량’이란 주제로 프레젠테이션도 했고, 페루 유수의 대학들을 방문하며 대학생을 위한 리더십 강의와 마인드 강연도 진행했다.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청소년 리더십 분야의 패널로 초청받기도 했다.
하지만 진희 씨가 처음 만난 페루는 황당하고 놀라운 나라였다. 우유에 밥을 말아먹는 음식인 아로스 콘 레체, 쥐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인 꾸이cuy, 바나나 주먹밥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음식들은 그녀의 편견을 깨주었다. 32시간 버스를 타고 간 정글지역에서는 각종 벌레와 모기 떼의 습격을 받는가 하면, 해발 5,300m의 산간지역에서는 숨쉬기조차 어려워 산소호흡기를 꽂고 잠을 자기도 했다. 산에서 직접 채취한 과일과 채소로 하루 동안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몸이 온통 땀범벅이 되어도 샤워를 할 수 없고,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지내며 흙바닥에서 잠을 자거나 매트 하나 깔고 지냈던 정글에서의 2주간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시간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나 혼자만이 아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를 생각하는 배려를 배웠다. 지금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지만, 굿뉴스코 단원으로 활동하며 터득한 교훈 덕분에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해외봉사단원 시절, 페루 굿뉴스코 지부장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까미나모스 훈또스Caminamos juntos’, 스페인어로 ‘함께 걷자’는 뜻이에요.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진희야, 나는 네가 나무 같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래.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고, 어떤 사람과도 함께 어울릴 수 있고, 어떤 사람도 오면 편히 쉴 수 있는 사람 말이야. 너의 지식이나 재능이나 연약함,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네 인생이 정말 행복할 것 같아’라고요.”
 지부장님의 말씀은 그녀의 마음에 큰 울림이 되었다고 했다. 한번은 150여 명의 페루 대학생들과 함께 페루의 사회문제를 교육, 인권, 경제, 환경 등 네 분야로 나누어 해결방안을 모색해보는 사회혁신 컨퍼런스를 열기로 했다. 행사를 제안한 건 진희 씨였지만, 실질적으로 행사를 개최하려면 장소섭외, 홍보, 물품 준비 등 여러 부분에 인력이 필요한, 혼자서는 절대 치를 수 없는 행사였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부족한 스페인어 표현을 가르쳐 준 친구, 새벽까지 함께 페루의 사회문제를 조사해 준 친구, 대학 및 관공서를 다니며 홍보를 도왔던 친구 등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준 덕에 무사히 컨퍼런스를 마칠 수 있었다. 손목이 아픈 진희씨가 산간지역, 정글지역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도 다른 단원들이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고 빨래까지 대신해 주었다. 입이 되어주고 손발이 되어준 페루 친구들과 동료단원들 덕에 김진희 씨는 자유롭게 행복하게 페루 전역을 다니며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같이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페루의 한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영어수업을 하는 모습
페루의 한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영어수업을 하는 모습
페루 정글지역에서 만난 미혼모 학생들과 함께
페루 정글지역에서 만난 미혼모 학생들과 함께

페루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페루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면서 보지 못했던 개발도상국 교육의 문제와 한계점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정글지역의 학교로 음악공연과 청소년 리더십 강의를 하러 가던 길에 그녀는 나무 밑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소녀 셋을 만났다.
“안녕, 너희들 동생이니? 동생들을 참 잘 돌봐주는 언니 누나로구나. 그런데 너희들 학교는 안 가도 되니?”
“동생이 아니고 제 아기예요. 아이가 생기면서 학교는 그만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희 씨는 할 말을 잊었다. ‘한창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꿈을 키워야 할 아이들이 왜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미혼모가 되어 종일 나무 아래서 젖을 물리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야 하지?’
 그날 미혼모들과의 만남은 페루의 청소년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외봉사를 마치고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녀는 다시 페루의 정글을 찾았다. 학교를 중퇴한 20여 명의 학생들과 워크숍을 가지며 그들의 고민을 듣고 해결책을 생각하며 논문을 썼다. 단순히 책에 담긴 지식을 요약한 다른 논문들과 달리, 현장을 발로 뛰며 쓴 논문은 페루 사회를 통찰력 있게 바라본 매력적인 논문이었다. 결국 그 논문은 서섹스대에서 최고논문상을 수상했다.
 논문이 완성되기 전 그녀는 유네스코에 지원서를 냈다. 마침 유네스코에서는 중남미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주제 또한 ‘중남미 중고생들이 학교를 중퇴하는 이유’로 그녀의 논문주제와 정확히 일치했다. 논문이 좋은 평가를 받아 유네스코에 들어간 그녀는 인턴을 거쳐 컨설턴트로 일하게 되었다.
 2016년 APEC 정상회담은 페루에서 열렸는데 공교롭게도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APEC 장관회의도 페루에서 열렸다. 그래서 APEC 국제교육협력원에서는 직원을 선발하기로 했는데 ‘스페인어 가능, 국제기구 관련 경험 필수, 교육학 전공자 우대’ 등의 조건이 붙었다. 그녀에게 딱 들어맞는 조건이었다. 더구나 페루는 그녀가 6개월 동안 자원봉사자로 지냈던 곳이 아닌가. APEC이 찾던 인재상과 딱 들어맞는 그녀는 무난히 APEC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교사역량강화 워크숍에서 발표 중
말레이시아 교사역량강화 워크숍에서 발표 중

Connecting the dots. 꿈에서 꿈이 이어지듯
현재 진희 씨는 APEC 국제교육협력원 프로그램 전문가로, APEC 회원국 내 교사와 교육부 관계자들의 역량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 및 운영하고 있다. 각 나라 교육정책의 장점과 문제점들을 다방면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회의장이나 책상에서만 일하는 게 아니라 공원에서 학부모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빈민촌 학교를 방문하는 등 현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녀의 이런 노력은 지난 2016년 8월 페루 교육부 관계자들과 함께한 워크숍에서 빛을 발했다. 페루 교육부에서는 2017년부터 새롭게 도입하는 교육과정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APEC 국제교육협력원에 정책컨설팅을 요청했고,진희 씨는 여러 교육전문가들과 팀을 이뤄 페루 교육부를 방문했다. 페루의 교육 공무원들은 워크숍을 마친 후 그녀에게 ‘당신에게서는 페루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정말 페루를 위해 조언을 해 주는 분 같아요’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글로벌 리더란 세계인의 마음을 갖고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페루에서의 굿뉴스코활동시간은 제게 그런 능력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2016년 상반기 APEC 국제교육협력원에서는 한번에 7가지나 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말레이시아 교육부 출장을 다녀온 지 5시간 만에 페루 교육부로 출장을 갈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 잡혔다. 피곤이 쌓여가는 와중에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됐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진 적도 있었다. ‘너무 힘들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항상 페루에서의 시간을 떠올린다.
 “처음 스페인어를 배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지금은 페루 교육부 공무원과 스페인어로 회의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32시간 버스를 타고 정글에 간 것에 비하면 26시간 비행기를 타고 페루에 출장 가는 것은 아주 편한 일이지요. 해발 5,300m 산악지대를 뛰어다닌 적도 있으니까요. ‘지금 보기에 어려운 것 같아도 도전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 다시 해보자!’고 힘을 냅니다. 절대로 ‘내 한계는 여기까지야’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호기심 많던 소녀 김진희는 남아공, 페루를 거쳐 APEC이란 더 넓은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다. 페루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 꿈은 또 다른 꿈을 낳듯 그녀는 지금도 새로운 꿈을 꾸며 꿈과 꿈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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