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대란 시대라도 차별화 전략을 깊이 고민하는 이들의 눈엔 기회가 보이기 마련이다. 해외봉사 다녀온 경험을 발판으로 국제행사 기획자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오종진 씨는 10월 한·아프리카 장관급 경제협력회의KOAFEC에서 리에종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보기 드문 친절과 성실은 유학파 출신이 즐비한 학생들 가운데서도 단연코 돋보였다. 사람 사이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맞닥뜨려 풀어온 그가 취업 준비 중인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전한다.

국제협회연합UIA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작년 우리나라의 국제회의 개최 건수는 891건으로 930건의 미국의 뒤를 바싹 따라잡아 세계 2위에 올랐다. 2005년 부산 APEC 정상 회의,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 개최 등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과 동시에 국제교류가 빈번해지고 있는 것이다.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국제회의Convention,전시회Exhibition의 앞글자를 딴 마이스MICE 산업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가운데 국제회의의 전반적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컨벤션 기획이라는 블루오션에 오종진 씨는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제7차 아시아·유럽 문화장관회의ASEM 리에종, 제6회 세계 청소년부 장관포럼 수행원, 2016 한.아프리카 장관급 경제협력회의KOAFEC 리에종, 2016 굿뉴스코 페스티벌 대외협력팀, 대한체육회 후원 한국.케냐.태국 카바디 대표팀 합숙훈련 케냐 팀 담당 통역, 광주통역번역원 의뢰로 8차례 기업 통역…. 2016년 한 해 동안 오종진 씨의 대외활동 리스트이다. 자신이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꼼꼼한 성격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갈고 닦은 영어실력 때문에 그는 주위로부터 ‘능력자’라고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일만 잘하는 게 아니다. 여느 리에종들과 달리 근무시간 종료 후에도 귀빈 곁에 남아 통역하며 그들의 사적인 업무까지 도왔다.

이런 세심함 때문인지 그가 수행했던 귀빈들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스펙.능력.배려 3박자를 고루 갖춘 셈이다.

시골마을로 떠난 무전여행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카메라 앞에선 쑥스러워하지만 여행 내내 먹을 것을 사주며 함께 다녔다.
시골마을로 떠난 무전여행에서 친구를 사귀었다. 카메라 앞에선 쑥스러워하지만 여행 내내 먹을 것을 사주며 함께 다녔다.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필리핀과 아프리카 3개국 장관들, 유명 컨벤션 기획사의 대표들과도 교분을 트게 되었다. 또 하나, 오종진 씨가 참가했던 장관급 회의 리에종의 일당은 15만 원, 기업 통역 아르바이트 역시 일당 10만 원이 넘는다. 그동안 받은 급여만 따져도 한 학기 학비의 절반은 벌었으니, 남들은 학점과 취업준비로 정신없는 학창시절에 그는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

리에종이란?
주로 국제회의에서 활약하는 리에종은 자신이 담당한 귀빈을 회의장 내 지정좌석으로 안내하고, 행사시간과 안내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어를 비롯한 제2외국어 회화 능력을 갖추는 건 물론이고 정중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학부생으로 2년, 군인으로 2년. 20대 초반에는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던 오종진 씨는 24살이 되던 해 떠났던 해외봉사를 기점으로 자신의 삶이 폭발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한다.

“저는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1년간 봉사하며 인종과 국적을 떠나 진심으로 사람을 사귀는 법을 배웠습니다. 리에종으로 활동하며 세계 여러 나라 귀빈들을 만나는데, 어느 나라 출신이든지 상관없이 정상의 자리에 오른 리더들에게는 배울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요. 한국에 돌아와 계속 국제회의 리에종에 지원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제가 해외봉사를 하며 얼마나 많이 바뀌고 배웠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해가 지날수록 ‘내가 이걸 배웠구나. 이것도 배웠었네?’ 하고 느껴요. 현장에 있던 1년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지만,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수도 부줌부라의 한 집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12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내 이야기를 잘 들었다.
수도 부줌부라의 한 집에 여러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12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내 이야기를 잘 들었다.

뻣뻣한 성격에 관절이 생기다

출신국과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귀빈을 대하는 태도로 유독 돋보인 오종진 씨였지만, 그도 한때 인간관계로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바로 군대 시절이었다. 훈련이 고되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공동경비구역에 배치된 그는 누구보다 멋진 군 생활을 보내고 싶었다. 좋은 후임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선임과의 사이는 오히려 점점 틀어지기만 했다.

“너는 일은 잘하는데 도통 남을 배려하지 않아. 단체생활에 대한 개념이 없나 봐?”

오종진 씨는 ‘내가 그동안 인간관계를 전혀 못 배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놓인 기회부터 나의 것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군 생활 틈틈이 휴가를 나와 굿뉴스코 해외봉사 워크숍에 참석했던 그는, 뻣뻣한 자신의 성격이 변화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군 제대 후 몇 개월 뒤 곧바로 부룬디로 해외봉사를 신청했다.

20년 세월 동안 형성된 성격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처음 2개월 동안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일처리가 미숙한 동료 단원들이 못 미더워 사소한 일도 하나하나 직접 체크해야 했다.

“그때는 무의식중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저보다 못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항상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느낌이었죠. 저보다 어린 친구들은 쉽게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저는 자꾸 고립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자존감 따위 빨리 벗어버려야겠더라고요. 없는 형편에도 저와 친해지고 싶어 콜라를 사들고 오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그동안 무시하고 살았던 것 같아 굉장히 부끄러웠어요.”

함께 굿뉴스코 페스티벌을 준비했던 대외협력 팀원들에게는 미운 정, 고운 정, 오만 정이 다 들었다.
함께 굿뉴스코 페스티벌을 준비했던 대외협력 팀원들에게는 미운 정, 고운 정, 오만 정이 다 들었다.

오종진 씨는 그때부터 무엇이든 현지 친구들과 함께했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친구 집에서 하룻밤 묵기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어떻게 살았는지, 부룬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는지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그 역시 그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달라도 주위 사람과 의견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면서 동료 단원들과의 관계도 빠르게 회복했다.

한국 대표하는 회의 만들고자

오종진 씨는 봉사를 마치고 돌아와 400여 명의 봉사단원들과 함께 준비했던 귀국발표회 ‘굿뉴스코 페스티벌’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는 귀빈 초청 및 의전 업무를 담당했던 대외협력 팀에 들어갔는데, 20여 명의 팀원들과 한 달 넘게 합숙하며 끈끈한 동지애를 경험할 수 있었다.

“저는 주위로부터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어요. 사람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저는 극단적이었죠. 일을 하면서 동료들이 어떤 마음을 갖는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달라요. 결국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이기적이면 일은 잘할 수 있겠지만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사이가 아니잖아요. 조금 부족해도 같이할 때 하나둘 제 곁에 남아주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ASEM 문화장관회의에서 수행하며 가까운 사이가 된 펠리페 데 데온 필리핀 문화부장관과. 그의 두 손을 꽉 쥐며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ASEM 문화장관회의에서 수행하며 가까운 사이가 된 펠리페 데 데온 필리핀 문화부장관과. 그의 두 손을 꽉 쥐며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오종진 씨는 학교생활보다는 대외활동에 매진한다. 현재 4학년인 그는 해외봉사를 1년 다녀온 것에 그치지 않고 리에종과 통역사로 활동하며 컨벤션 기획가의 자질을 연마한다.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제회의를 기획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쉬지 않고 도전을 거듭하는 그는 예리한 감각, 전문적인 능력과 더불어 겸손한 마인드를 갖춘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하고 있다. 그가 가슴 속에 품은 꿈이 그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오종진 씨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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