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의 거리인 대학로에 자리한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의 소통공간 ‘이음센터’에서 신종호 이사장과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0월호 취재원인 최웅렬 화백의 전시회 오픈행사에 참석해 축사해주는 자리였다.“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조금 다른 만큼, 외부에 대한 반응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같은 장애인들이 예술에 대한 마음 속 깊은 열정을 제약 없이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인 이곳에서 큰 빛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정이 엿보인 그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신종호 이사장 역시 신체 조건을 훌훌 털고 지금의 자리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늘 없는 소탈한 성품에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 또한 많은 그는 ‘휠체어 위의 비올리스트’라는 수식어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장애인들의 삶에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며, 장애인의 문화향유를 잇는 ‘다리’가 되어준 신종호 이사장의 진솔한 목소리를 글로 옮겨 본다.

인생을 이끌어 줄, 음악 선생님을 만났다
1956년 태어나 만 일 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열병을 크게 앓았고 그 열병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러니까 세상에 눈을 뜨기도 전에 소아마비 장애우로서의 고단한 삶이 시작됐고,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태어난 시절에는 ‘휠체어’라는 기본적인 이동수단도 없을 때여서 할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의 다리이자,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준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 후 대전에 있는 ‘성세재활학교’라는 특수학교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곳에 가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처음 만났고, 그들과의 집단생활을 하면서 경쟁사회의 치열함을 맛보았다.
머리가 커지면서 내가 겪은 환경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몸이 불편해서 나약한게 아니라, 정신이 나약하기에 몸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대전 성세재활학교 안에서 무미건조했던 내 인생에 자유로움을 던져준 ‘음악’을 만나게 된다. 10명 정도가 모인 합창단에서의 노래를 시작으로 농악도 함께 배우며 음악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을 때, 한 선생님을 만나면서 예술인의 영혼을 느껴보았다.
대전에서 바이올린으로 유명했던 강민재 선생님은 어느날 목욕탕에 다녀오는 길에 우리 학교를 우연히 보았다. 운동장 먼지 속에서 목발을 짚고 뛰거나, 기어서라도 공을 잡으며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그 발걸음으로 선생님과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강민재 선생님은 자원봉사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그 덕에 나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다루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강 선생님이야말로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선녀가 아니었을까?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내 인생에 음악이 있고, 음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기에 말이다.

일본어를 배운 것이 아내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난 후 이제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부딪혀야 했고 나는 내가 살아가야 할COACHING미래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점에 재활학교에서 일본 최대의 사회복지시설과 연계하여 선발하는 교환학생으로 뽑혔다. 나를 포함한 5명의 동료들이 일본 큐슈의 벳푸란 도시에 위치한 ‘태양의 집’으로 1년 동안 직업연수 형식으로 유학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1970년도 당시 소니나 미쓰비시, 혼다 같은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들은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웠고, 나는 그 공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습득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다른 장애인들에게 가르치는 임무를 부여받아 출발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1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내가 확인하게 된 건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이 땅의 냉혹한 현실뿐이었다.
선진기술을 배워왔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이 매우 열악했기에 배운 지식을 풀어낼 방법과 길이 없었다. 일본 유학생활이 나에게 남겨준 건 그저 일본어밖에 없었다. 실망스러운 형편만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배운 일본어는 지금의 영원한 단짝 아내를 만날 수 있게 된 귀중한 자산이 되어 주었다.

1. 신종호 이사장이 8살 때.
1. 신종호 이사장이 8살 때.
2. 30대에 감동을 주는 음악인으로 활동하며.
2. 30대에 감동을 주는 음악인으로 활동하며.
3.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의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 모습.
3.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의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 모습.

좌절, 음악에 빠져들게 하다
일본에서 돌아온 뒤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학 시절에도 나는 바이올린과 함께였고 5명의 연수생 중 3명이 음악을 했던 터라 종종 의기투합이 되었다. 우리 셋은 좌절된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대전 모 대학교의 오케스트라 청강생 모집에 지원했고, 오케스트라 안에 속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강민재 선생님의 대학 후배였던 ‘고영일’ 선생님과의 인연이 펼쳐지게 된다.
그분이 내가 속한 오케스트라의 강사로 오셨는데, 휠체어를 타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우리 3명에게 ‘현악 4중주단을 결성해 보면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하셨다. 내가 악기를 비올라로 바꾸고, 첼리스트 1명을 영입하면서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의 틀이 갖춰졌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은혜를 뜻하는데, 우리의 음악을 듣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은혜를 받길 바란다는 그 뜻이 참 마음에 들었다. 비록, 4명 모두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 음악의 불모지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겪어야 할 서러움도 많았지만 음악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많은 은인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도움의 손길로 설움을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고영일 선생님과 베데스다 멤버 4인은 전셋집을 얻어 합숙을 하면서 본격적인 음악가으로서의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는 정규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니었기에 남들보다 배의 노력을 하면서 하루에 8시간 이상씩 각자 연습을 했고, 그다음엔 같이 맞춰보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꾀를 부리고 하루 연습시간을 못 채우면 굶어야 했고, 심할 때는 선생님께서 제일 말 안듣는 사람을 땅속에 파묻어 소쿠리를 씌워놓고 혼을 내기도 하셨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엔 연습에만 몰두해 몸은 고생스러웠지만 그때가 가장 자유로웠고 마음은 행복했다.

노력이 기회를 만들어주다
베데스다 4중주단이 결성되고 1976년 봄에 대전 가톨릭문화회관에서의 첫 연주회를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가며 5개월쯤 흘렀을 때 대전에서 우리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의 음악과 교수님들이 베데스다의 소식을 접했다. ‘서울대 출신 고영일이라는 선생이 지도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 서울 ‘공간사랑’에서 베데스다의 초청연주회가 이뤄진 것이다. 우리들의 연주를 들은 정립회관 관장님이 후원해주시기로 해서 우리는 서울로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반전의 기회로 인해 우리는 저명한 음악가들에게 레슨을 받았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 중 한 분이 한국에서의 음악공부는 한계가 있으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보라며 자신의 출신 학교로 다리를 놓아주셨고, 미국행을 놓고 우리는 또 다른 도전에 돌입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기에 미국에서 대학공부를하기 위해선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해야만 했다. 초인적인 정신으로 1년 만에 모든 시험을 완결 짓고 1982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대학은 미국 최고의 음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 대학의 문이 베데스다에게 활짝 열렸고, 일단 정식입학이 아닌 1년간의 초청연수로 가게 되었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맞는 대학생활은 놀라움, 감탄 그 자체였다. 동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곳은 장애인에게 천국 같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시스템이 편리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휠체어를 타고 학교생활을 할 때 강의실로 이동하는 길, 화장실 가는 길, 공용도서관에 가는 길까지 장애인의 애환을 아는 양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에 학교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아래와 같은 전설적인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전에 휠체어를 이용하는 한 학생이 학교면접에 합격해 입학을 했지만 그 학생은 불편한 시설로 인하여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학생은 학교를 상대로 고소를 했다고 한다. 재판결과가 참 의미있고 요즘말로 사이다였다! ‘총장이 한 달 동안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면서 그 학생이 느꼈을 고충을 생각해보라!’ 그 얼마나 통쾌한 결과인가, 그 후에 학교가 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우리는 활개치며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고, 우리를 지도하던 교수님으로부터 정식학생으로 공부할 것을 권유받아 1년 예정으로 떠났던 미국 유학은 대학원까지 마치는 6년의 긴 기간으로 이어졌다.

음악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귀로 듣는 것
지금은 장애인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려는 인프라가 사회적으로 구축이 되었다. 시민정신도 높아졌지만 1970~80년대 한국의 환경은 정말 심각했다.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거부되기 일쑤였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 해도 다들 반대하고 오디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음악을 하고 있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게 힘겨운 환경이었다. 거듭 거절을 당하면서 나는 위축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미국 신시내티 음대 유학 시절, 내가 속해 있던 오케스트라가 미주전국 대학교 음악콩쿨에서 1등을 해서 이를 기념하는 연주회를 뉴욕 카네기홀에서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교수님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와 시각적인 통일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있는 저희를 보고 시선이 분산되면서 오히려 오케스트라의 균형을 깨뜨리고, 저희들로 인해 학교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연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지휘교수님은 버럭 화를 내며 “음악이라는 건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다. 왜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모두 무대에 올라가서 전원 똑같이 연주를 해라!”
주변으로부터 받아온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형성된 나의 소극적인 사고방식이 처음 깨진 날이었다. 한번은 장애인이라는 게 한편으로 이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이 음악을 한다. 그런데 굉장히 잘하더라. 일반 사람도 하기 어려운 걸 저 정도 하면 꽤 잘하는 거다’라는 병풍이 둘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이렇게 병풍같은 인생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장애인들만의 음악 또는 오케스트라가 아닌, 기성의 조직에서 활동하고자 노력했다. 편견의 틀을 깨며 탈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음악의 중심에 서기까지, 그 견고한 폐쇄성을 뚫어야했던 힘겨운 과정을 설명한다는 건 책 몇 권이 나올 만큼의 현실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와 동료들은 주어진 현실 안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으려 노력하며 극복해 나갔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고, 어차피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고 장애인들만 사는 세상도 아니며, 결국은 장애 비장애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세상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같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직접체험으로 확인했다. 이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없어서는 안 될 인고의 시간이었다.

나를 항상 이해하고 사랑해준, 인생을 완성체로 만들어준 아내와 함께.(외동딸 돌 때 일본에서 장모님과)
나를 항상 이해하고 사랑해준, 인생을 완성체로 만들어준 아내와 함께.(외동딸 돌 때 일본에서 장모님과)

“제 다리는 단지 감기에 걸렸을 뿐입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그때 우연히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평생 단짝이 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일본인이었지만 우리는 뭐가 그리도 끌렸는지 서로의 마음에 깊이 빠져버렸고, 두 번째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둘만의 약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결혼허락을 받으러 갔다. 장인어른께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반대하는 세 가지 이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첫째, 결혼이라는 것은 특히, 여자에게는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데, 고작 한 번 만나 마음을 정하고 약혼까지 맘대로 해놓고 허락받으러 왔는가?둘째, 곱게 키운 내 딸을 장애인에게는 줄 수 없다.
셋째, 국제결혼을 허락하는 것도 버거운데, 더군다나 한국 사람이라니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장인어른의 말씀을 하나하나 새겨들으며 말씀을 끝내시는 동시에 바로 대답을 해드렸다.
“첫째, 장인어른의 말씀대로 결혼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제 나이 29세, 십대가 철없이 만난 불장난이 결코 아니었고, 1년을 만나서 연애를 하든지, 10년을 만나서 연애를 하든지 아내와 저는 서로를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느 커플들이 거쳐야 하는 기간이라는 공식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물리적 시간으로는 짧아 보이지만 서로를 정확히 판단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저도 입장을 바꿔놓고 장인어른의 마음으로 이 결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딸이 휠체어를 탄 사람을 신랑감으로 데려온다면 아버지로서 반대하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며 산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지금 장인어른이 끼고 있는 안경과 제 휠체어는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고 불편하기에 안경을 착용하듯, 저도 다리가 좋지 않고 불편하기에 휠체어를 타게 되었습니다. 장인어른 감기에 많이 걸려보셨죠? 제 다리는 감기에 걸렸을 뿐입니다. 병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 사람을 비교해보면, 백인, 흑인 나뉘듯이 그렇게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살아온 환경이나 문화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결혼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조목조목 정연하게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장인어른의 표정은 이미 풀려 있었다.우리는 결혼허락을 받을 수 있었고, 1986년에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이 어느덧 30년이 지났다. 축구경기가 있을 때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나라를 응원하며 적과의 동침을 하게 되지만 누구보다도 나를 인간 신종호로 인정해주고, 나다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완성체를 만들어준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 귀한 사람을 얻게 됐으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2015년 11월에 이음센터 이사장 임명장을 받고 어느새 1년의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백지에다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쉬울 수 있지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면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다. 부단히 고생하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았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듯이 나는 오기도 많고 날카롭고 까칠한 성격으로 사실 별것 아닌 사람이다.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많으면 된다’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나에게 주어진 그 순간에는 정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점선으로 이어진 게 선이 되고, 그 선이 이어져서 하나의 그림이 되는 것처럼 지금의 내가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장애인문화예술원이 설립되었고, 문화의 메카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이 건물이 세워졌다는 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예술인들도 ‘아티스트’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삶은 너무나 열악하고 고생스럽다. 그러니 장애인의 예술인 삶은 얼마나 더 어렵겠나!
많은 비장애인들의 관심으로 장애인문화예술원이 장애인들과 서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로 활성화되길 바란다.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들이 구성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 비단 장애인뿐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이 겪게 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 예술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역할을 장애인예술원이 했으면 좋겠다.
요즘은 사고 산재로 인한 장애나 발달장애, 인지장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 그림과 글, 음악에 그것들이 묻어나온다. 그것을 계발해서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장애인들의 예술적 열정과 에너지가 지속적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서로를 이어주고 소통하는 의미와 함께 서로 다른 음을 내지만 서로가 화합하고 앙상블을 이루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이음으로 사랑받기를 기도한다.

신종호
구리시교향악단부터 서울아산교향악단까지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그는 성재원 성세재활자립원의 본부장으로 장애 아동들에게 희망을 전하며, 2015년 11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다채로운 사업을 통해 예술로써 장애와 비장애를 하나로 융합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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