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싫었던 아이
매년 긴 겨울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많은 학생들은 새로운 친구와 선생님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차 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개학 첫날에 마지막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면 어색함이 약간 사라지면서 삼삼오오 모여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는데, 저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휴대폰 번호를 물어보는 그 시간이 제일 창피하고 싫었습니다.
카센터 직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와 야채가게, 분식집, 양말 공장 등 안 해 본 일이 없는 어머니의 소득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세 남매를 먹이고 입히는 것도 벅찼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 휴대폰은 그야말로 ‘사치’였습니다. 게다가 저는 동생과 쌍둥이고 두 살 터울인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항상 학비 걱정을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휴대폰이 없는 게 너무 부끄러웠던 저는 철부지처럼 부모님께 휴대폰을 사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고, 그때마다 내 귓전에 들려오는 말은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가정형편상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홧김에 부모님 마음에 못을 박는 말도 몇 번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수능이 끝나고 나서야 직접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휴대폰을 살 수 있었습니다.

후회되는 대학 1학년의 삶
한집에 대학생이 셋이나 되다 보니, 한 학기에 등록금만 1천만 원이 나가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돈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지만, 가끔씩 통장 잔고를 보면서 한숨을 푹 쉬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유난히 지쳐 보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원 아르바이트와 서빙 아르바이트, 과외를 병행했습니다. 부모님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정작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돈이 생기면 노는 데 바빴습니다. 결국 학과 99명 중 98등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부모님 짐이나 덜어드려야 겠다는 생각으로 동생과 동반입대를 했습니다.

어느 날 도착한 편지 한 장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던 이등병 생활이 끝나갈 즈음, 저는 신병 휴가를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는데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편지봉투에는 평소에 연락을 잘 안 하던 누나의 이름 세 글자가 적혀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제 기대와는 다른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림아, 아빠 암에 걸리셨대. 이거 보면 바로 전화해.”
두 문장의 짧은 편지였지만 믿겨지지 않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때서야 사태를 알아차린 저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 암에 걸리신 지는 좀 되셨는데, 너희 걱정할까봐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내일 수술 받으니까 휴가 나오면 바로 병원으로 와.”
당신이 암에 걸린 것보다 자식들이 걱정하는 게 더 마음에 걸려 누나와 엄마에게 입단속을 시킨 아버지를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전화기를 붙잡고 펑펑 울었습니다. 신병 휴가를 나오자마자 병원으로 가서 만난 아버지는 6개월 만에 몸이 반쪽이 될 만큼 야위어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울지 말자고 속으로 수십 번 다짐했지만 저는 끝내 눈물을 또 보이고 말았습니다.

두 형제, 조선소로 가다
침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뒤로한 채 부대로 복귀한 후,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앞으로 우리 집은 어떻게 먹고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수입이 있던 어머니도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일을 그만두셨고, 저희 형제가 전역 하면 소득은 없는데 또 다시 대학생이 3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들이 떠올라 쉽게 잠들지 못 했습니다. 휴가를 나갈 때마다 동생과 저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돈을 벌고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도 고기포장 회사에서 8일을 일한 후 전역을 했습니다. 복학하기까지 5개월이 남은 저와 동생은 등록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가방 하나씩을 달랑 메고 거제도로 내려갔습니다. 32평 숙소에서 18명의 남자들이 생활하는 환경과 까마득한 높이의 배 위에서 하는 작업은 정말 고됐습니다. 일이 끝난 후 코를 풀면 검은 쇳가루가 한가득 나오기도 했지만 등록금을 벌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국가장학금의 도움, 그리고 달라진 나
3개월을 일하고 집으로 돌아온 저희 형제는 모든 돈을 부모님께 드렸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회복 중이신 아버지는 일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장시간은 불가능했기에 세 남매의 등록금은 여전히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저희가 벌어온 돈으로는 1학기 등록금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국가장학금은 우리 집에 내리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저는 1학년 때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장학금을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누나와 동생이 받아서 큰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저도 다음 학기에는 꼭 국가장학금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주말마다 하는 아르바이트가 부담되긴 했지만 열심히 한 결과 4.0의 학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1학년 때와 비교하면 학점이 무려 2점이 넘게 올랐고 2학기에는 국가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심 등록금 걱정을 많이 하시던 부모님이 기뻐하셨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2학기에는 국가장학금 I,II 유형뿐만 아니라 복지장학금(다자녀 가구)도 받아 기존 등록금의 반 이상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먹고 공부하니까 성적이 확 오르는 것을 보면서 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2학기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4.24라는 높은 학점을 얻었고 모든 전공에서 A와 A+를 기록했습니다. 저의 달라진 모습으로 인해 성적 장학금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 좋게도 교외 재단에서 전액 장학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국가장학금 덕분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겨울방학 때부터는 농협에서 인턴을 했고 현재는 제 진로를 놓고 새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전공 공부와 봉사활동,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지만 저는 요즘 이런 생활이 좋습니다. 누나는3,4학년 재학 중 계속 국가장학금을 받기 위해 높은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또한 동생도 국가장학금 덕분에 좋은 성적을 얻으려 노력했고, 이번 연도부터는 교내 연구실에 들어가 박사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만약 국가 장학금이 없었다면 저와 누나, 그리고 동생은 학업에 전념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짐을 계속 안고 지냈을 겁니다. 이 글을 통해 국가장학금과 복지장학을 통해 도움을 주신 한국장학재단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여러 장학금을 받고 나서 정말 감사한 마음에 작년 말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지금도 꾸준히 하는 중입니다. 제가 국가에서 혜택을 받은 만큼 저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장학금, 대한민국의 Unsung Hero
스포츠 경기에서 필요한 순간에 골을 터뜨리는 것에 비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선수를 ‘Unsung Hero’ 즉, 소리 없는 영웅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국가장학금을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을 못 느끼는 친구들이 가끔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는 국가장학금 이어서 별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 가족처럼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삼남매가 있거나 갑작스런 부모님의 병환으로 인해 생계가 곤란한 가정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국가장학금은 수많은 가정의 어둠을 걷어내 주는 환한 등대가 돼 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경기장을 여기저기 누비며 어떤 때는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골을 넣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조용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국가장학금을 이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나의,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학생들, 나아가 대한민국의 Unsung Hero’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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