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의회 민맹호 부의장

민맹호 부의장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광고의 카피가 떠오른다. 육체의 나이는 올해 일흔하나이지만, 그의 마음 나이는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는 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 14학번 대학생이기도 하다.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젊은 시절 치렀던 고생이야말로 나의 가장 큰 자산’이라는 민 부의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 민맹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구나’
때는 2011년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천의 운수회사인 부일교통 회장이자 상2동 주민자치위원장인 민맹호는 쓰린 가슴을 부여쥔 채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1위와의 표차가 불과 105표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패배였다. 전부터 ‘정치를 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지만 내 길이 아니다 싶어 고사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우연찮은 계기로 시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근소한 차로 낙선한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실의에 빠져 있던 그는 이내 생각을 돌이켰다. 왜 자신이 떨어졌는지 유권자의 눈에서 냉정하게 분석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가 찾은 낙선요인은 모두 3가지였다. 첫째, 나이였다. 당시 그는 예순여섯, 정치경험도 전무한 데다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새 정책을 기획하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둘째, 그는 전과자였다. 젊어서 트럭기사로 일하던 중 실수로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일이 있었다. 과실치사였지만,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그를 비방하는 데 악의적으로 이용했다. 셋째는 초등학교 졸업에 불과한 그의 학력이었다.
 “사람들은 저더러 ‘의지의 한국인’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더군요. 택시기사로 출발해 운수회사 대표에까지 올랐으니까요. 여러 사회단체에서 대표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학력이 워낙 보잘것없어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의원에 출마하면서 재산, 병역사항, 학력, 전과기록 등을 신고하다 보니, 초졸 학력이 그대로 공개되었지요. 창피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했습니다.”
 나이, 전과, 학력… 어떻게 하면 이 3가지를 채울 수 있을지 그는 고민했다. 나이와 전과기록은 절대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부족한 학력은 공부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길로 그는 검정고시 학원을 찾아갔다.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학원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할아버지 수험생의 합격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맹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학원측은 간단한 시험을 치른 뒤 그를 받아주었다.
 “2012년 1월, 그러니까 초등학교 나온 지 52년 만에 다시 공부를 한다 생각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아침부터 학원에 나가 공부를 시작했고, 회사경영과 사회활동에 필요한 시간을 빼고는 책에 빠져 지냈어요. 허벅지를 꼬집고 찬물 세수를 하고 커피를 마셔가는 등 잠을 쫓아가며 밤 1~2시까지 공부했습니다. 부족한 잠은 틈틈이 사무실에서 쪽잠으로 보충했지요.”

그렇게 공부한 지 7개월 만에 그는 중졸 검정고시 합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제는 고졸 검정고시에 도전할 차례였다. 고등학교 과정은 중학교 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수면시간과 식사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한 끝에 2013년 5월 합격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그는 부천의 가톨릭대에 만학도 전형으로 응시했고, 이듬해 3월 손주뻘 젊은이들과 함께 14학번 새내기 대학생이 되었다.
 “그해 선거 후보자 홍보물에는 학력란에 ‘가톨릭대 경영학부 1학년 재학 중’이라고 당당히 써냈지요. 3년 전만 해도 초졸이던 제가 검정고시에 대학까지 합격했으니, 유권자들에게도 ‘아, 민맹호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지지에 힘입어 선거에서 당선되었지요.”

택시 운전수라는 내 직업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다
스무 살에 해병대에 입대한 민맹호는 2년 뒤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다. 소위 돈 있고 ‘백’ 있는 집 아들들은 어떻게든 파병을면해보려 안간힘을 쓰던 시절, 그는 파병을 자청했다. 지리산 자락에 있던 고향 산청을 짓밟은 공산주의 세력(빨치산)과 어떻게든 싸우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전투 도중 허벅지에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귀국 후에는 몇 년 더 복무하다 제대하고 부천에 정착해 1982년부터 택시기사 일을 시작했다. 당시 부천은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던 터라 택시 승객이 많았기에 아내와 두 아이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승객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연구했다.
 “당시 택시업계는 무분별한 합승과 승차 거부, 불친절한 서비스로 승객들의 불만이 속출하던 때였습니다. 88년에 경기도 개인택시 운송사업조합 부천 지부장이 되면서 그런 잘못된 택시문화를 바꿔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의 MK택시를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일본에서도 MK는 남다른 서비스로 유명한 기업이다. MK의 기사들은 승객의 승하차 시 손수 문을 열어주고 짐도 짐칸에 실어준다. 심야에 여성승객이 내릴 때는 어두운 골목 안까지 조명을 비춰준다. 무엇보다 민맹호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였다. 일반인과 장애인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면 MK택시는 장애인을 먼저 태웠고 요금도 10% 할인해 주었다.
 귀국한 그는 동료 기사들에게 ‘장애인 무임승차 캠페인’을 제안했다. 동료들도 ‘거동이 불편한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자’는 그의 뜻에 공감하고 흔쾌히 캠페인에 동참해 주었다. 개인택시조합 부천 지부는 이 캠페인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자서전 <민맹호의 인생3모작>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장애인의 또 다른 발이 되어 활동했던 그 때의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보람이었고, 그런 보람과 긍지 가득한 내 직업 택시 운전수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

갖은 난관과 근거 없는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한다면 한다’는 민맹호 특유의 뚝심과 결단력은 이후 그의 삶에서 계속 나타난다. 1994년, 그는 택시를 처분한 돈으로 미니버스 세 대를 구입해 마을버스 회사를 차렸다. 버스 하면 으레 큼지막한 45인용 버스나 시내버스를 떠올리던 시절, 사람들은 이름도 생소하고 크기도 작은 마을버스를 선뜻 타려 들지 않았다. 회사가 수익을 내지 못하자 어지간한 그도초조해졌다. 하지만 택시에 비해 요금이 훨씬 저렴하고 시내버스가 다니지 못하는 골목골목을 다니는 등 마을버스의 장점이 알려지면서 차츰 승객이 늘어갔다. 민맹호 대표도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며 마을버스 운행이 꼭 필요한 지역을 체크하고 새 노선을 개발하는 등 시민의 편의를 도모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버스 3대로 시작한 회사는 10여 년 만에 버스 25대, 기사 55명, 직원 60명의 규모로 성장했다. 2005년에는 다른 마을버스 회사와의 합병을 거쳐 ‘부일교통’을 설립, 시내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2016년 현재 부일교통은 11개 노선에 109대의 버스를 운영하는 어엿한 중견 운송회사가 됐다. 하지만 그런 결실을 거두기까지 그는 온갖 난관과 주변의 질시를 이겨내야 했다.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부당한 조건을 제시하며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4년 넘게 소송을 치른 적도 있어요. 시내버스 사업을 하려고 부천시에서 허가를 받았지만, 정작 버스 운송사업조합은 부일교통의 가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버스 크기가 작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도청에 상황을 설명하고 부천시의 지시를 받아 사업을 강행하겠다’고 담판을 벌여 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지요.”
 특히 제6대 시의회가 출범하던 2010년 7월 1일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어느 시의원이 시정질문 때 ‘부일교통이 무단으로 차고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었다. 6개월에 걸친 수사와 조사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 일은 민 대표의 가슴에 큰 배신감과 상처를 남겼다.
 “그 전까지 정치인은 시민의 고충을 경청하고 해결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일을 겪으면서 ‘내가 정치인이 되어 우리 지역주민들을 위해 일해보자’는 오기가 솟더군요. 시의원에 출마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내 마음 속 열정의 태양은 아직도 끓고 있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도 어느새 2년, 그는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시민 중심의 정책들을 하나하나 실현시켜 나가고 있다. 최근 감소세인 부천 인구를 늘리기 위해 출산장려금을 올리는가 하면, 범죄감시용 CCTV도 확대했다. 주민센터 창고 깊숙이 보관되어 있던 방독면도 유사시에 주민들이 바로 쓸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하게 했다. 지난 7월 임기 2년의 시의회 부의장에 선출된 후로는 자신의 지역구뿐 아니라 부천 시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정책을 찾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매일아침 운동 삼아 시내 곳곳을 산책하며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심 있게 살피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가 시의원이 된 뒤 추진한 정책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들이지요. 시민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생활정치를 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는 환경에도 관심이 많다. 인터뷰 내내 ‘인천의 부평과 계양, 김포, 부천, 서울 강서 등 5개 지자체를 통과하는 하천인 굴포천이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지 못해 오염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았다.
 민 부의장은 ‘나이는 70대, 마음은 50대’라는 말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그의 열정과 의욕은 20대
 청년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택시 한 대로 시작해 일군 버스 사업,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겁 없이 뛰어든 정치무대, 초졸 학력이라는 핸디캡을 불과 1년 5개월 만에 극복하고 대입합격증을 손에 넣기까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그 길이 막혔을 때는 뚫어가면서 달려온 것이 그의 인생이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우리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이 공무원이라고 하더군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고 싶은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북핵 등 안보위협이 고조되는 상황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는 사람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젊은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올 정도의 욕심과 기백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 노년기를 해가 지는 것에 비유해 황혼기黃昏期라 부른다. 하지만 민 부의장의 마음속 열정의 태양은 여전히 이글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꿈의 씨앗을 뿌린다.

민맹호
직업군인을 시작으로 막노동꾼, 트럭기사, 배달부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는 어느덧 100여 대의 버스를 갖춘 운수회사의 대표이사이자 정치인이 되었다. ‘인생에는 단 맛도 쓴 맛도 있지만, 노력으로 거둔 열매의 맛이 가장 달콤하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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