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위에서 행복을 찾은 두 사람

사람들은 장애인이 타고나는 걸로 아는데, 보건복지부 통계자료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나라 장애인은 약 273만 명. 그 중 89%가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다시 말해, 장애인 10명 중 1명을 제외한 9명은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하고 회복될 수 없는 불편한 몸으로 한평생 장애를 달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휠체어 위에서 행복을 발견했다는 장애인이 있다. 열띤 강의로 청춘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문혜진 강사와 구족화가로 유명한 최웅렬 화백이 그들이다.
두 사람도 휠체어 위에 앉기 전엔 몸이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각각의 이유로 거동이 힘들지만 이들에겐 남들에게 없는 공통점이 있다.
튼실한 마음의 다리로 전 세계를 누비며 전시와 강연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리 내어 늘 크게 웃는다. 청량한 소슬바람이 따가운 가을볕 사이로 불어오던 날, 대학로에 자리한 이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문혜진 강사가 묻고 최웅렬 화백이 답한 진솔한 이야기를 싣는다. - 편집자 주

나를 놀리는 사람들을 마음에서 쫓아내다 1968년 2월, 나는 무엇이 그리도 급했는지 어머니 뱃속에서 일곱 달 만에 나와 약골로 견디다가 일곱 달이 지난 즈음에 뇌성마비를 앓아 이렇게 장애인이 되었다. 뇌성마비란 뇌의 손상으로 자세와 운동에 이상이 생기는 질환이다. 나는 양 손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나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는데 통제가 안 되는 내 몸이야 눈으로 보면 알 테니, 내 마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겠다. 어려서 내가 길을 지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병신 간다! 손 병신 간다! 발 병신 간다!” 이런 말을 들으라는 듯이 해댔다.
그 당시에는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없었고, 불구자나 병신이란 표현이 흔했기에 나는 ‘병신’이라고 놀림을 받아야했다.
지금은 허리가 많이 약해져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7~8년 전까지는 나도 걸어 다녔다. 장애로 인해 몸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으니 걸을 때 팔이 흔들리고 머리가 끄덕거리고 엉덩이도 들썩거리며 멋대로 움직이니까 그 모습을 보고 ‘너 디스코 춤 잘 춘다!’며 사람들이 놀려댔다. 그래서 나는 항상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나에게 하는 말은 모두 비아냥대는 놀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를 향해 조롱하는 사람들을 마치 기름에 통닭 튀기듯 마음의 솥에 넣고 끓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할머니 한 분이 나에게 돈을 주었다. 몸빼 안에 입은 속곳 깊은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돈을 꺼내 무르팍으로 놓고 문질러 펴서 내게 주었는데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은 마음에 화가 났다. ‘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보느냐’며 대들었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할머니에게 시비를 걸며 싸워댔다. 한번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내가 다 먹고 나니까 주인이 곁에 와서 ‘오늘은 내가 한 그릇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자존심 강한 내 마음을 또 자극해 나는 기어코 꼬랑내 0나는 발가락으로 지폐를 집어 주인에게 쥐어주고 나왔다.
이렇게 나는, 주변 사람들의 순수한 선의도 그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배려해주고 생각해 주는 상대방의 마음이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장애인 것을 발견하다 내 나이 35세가 되던 14년 전, 나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 이상의미 없는 인생에 살아갈 이유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우리 집 문 앞에는 감자포대에 담긴 빈 술병이 두 포대씩 쌓여 있었다. 나에게 이 세상은 고해苦海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의 바다였고 괴로움이 끝이 없어 하루하루가 고독하고 힘겨웠다. 당시 내가 살던 아파트가 20층이었는데, 21층에는 옥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21층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21층에서 떨어지면 죽겠지’ 싶어서… 그런데 한번은 이런 생각이들었다. ‘만약 옥상까지 가서 떨어졌는데 죽지는 않고 더 병신이 되면 어떡하지?’ 소름이 돋았다.
‘더 확실하고 더 완전한 방법을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어떤 방법으로 죽을 수 있을지 고민만 계속하면서 죽지는 못하고 있을 그때에, 어떤 중년 여자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 분은 이따금 나를 보러 와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 누구의 마음도 믿지 않던 내가 점차 그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의 세상을 향해 앞으로 한 발자국씩 나갔다. 어렸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너무 못나 보였다. 그것을 감추려고 강한 척하며 날선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는데 그러한 마음이 장애임을 발견했다. 나는 누구보다 자격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낸 편견 안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다. 나의 마음이 한 번도 겸손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 시각으로 살 때는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 바라본 나를 마주해보니 그렇게 인정이 안 되었던 장애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내 마음의 반응 메커니즘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번은 길을 가고 있는데 초등학생 다섯 명이 나를 보고 ‘장애인 아저씨 간다’라고 소리쳤다.
예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아이들에게 성질을 부렸을 테지만 마음이 평온했다. 그 아이들의 시각으로 나를 보면 당연히 나는 장애자가 맞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의 행동이 이해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내가 어려서많이 아팠는데 그 뒤로 손을 못 쓰게 되었어.”라고 하면서 내 사연을 얘기했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진지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아이들과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지나치다 만나면 “아저씨, 우리가 뭐 도와줄 것 없어요?”
물으며 먼저 다가온다. 나의 신체장애를 긍정하고 나니까 내 마음이 자유를 찾은 것이다.

발가락에 붓자락을 끼우고 마음의 세계를 그리다 어렸을 적으로 다시 돌아가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얘기를 하고 싶다. 나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농사를 지으시는 아버지께서는 밖으로 일하러 가시면서 ‘혼자서 먹어야 한다.’며 발가락에 숟가락을 끼워주셨다.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을 만큼,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밥도 잘 먹고 혼자 된장국도 잘 끓였다. 발로 거의 모든 일상생활을 다했다. 어머니께서 만화방을 운영하셨는데, 나는 거기서 만화책을 보며 그림을 따라 그리곤 했다. 만화책 표지 앞뒤로 끼워진 하얀 백지를 도화지 삼아 내 딴에 그린다고 그렸는데 어머니는 책에 낙서를 한다며 야단치셨다.
야단을 맞으면서도 나는 그리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선생님이 내 그림에 관심을 가져주시면서 나도 그림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다 한학漢學도 하게 되고, 그림기법 서적들도 열심히 보았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며 그리다보니 전문가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90년도부터 2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강원도 평창에서 춘천을 오가며 그림을 배웠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냥 열심히 그리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12년 정도가 지나니까 왜 그려야 하는지… 그림에 대한 열정도, 의미도 희미해졌다. ‘열심히 하면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마음에 한계가 찾아왔고 제동이 걸렸다. 술과 담배를 곁에 끼고 살았다. 인생의 의미를 잃고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던 중,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내게 없던 마음의 눈이 생겼다. 그 눈으로 보니까 성경 속에 그릴 게 얼마나 많은지 신기했다. 항상 뭔가를 찾아보아도 아무것도 없어 늘 공허했는데 그때 알았다. 이제까지의 내 그림은 모두 껍데기였다는 것을…. 이런 세계가 있다니, 너무 기뻤다. 성경 말씀을 들으면 그림이 저절로 그려졌다. 가장 불행했던 화가가 가장 행복한 화가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교류하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요즘 이것에 매이지 않는다. 많은 화가들이 자기 안에서 보석을 찾아내려 하니까 고독하게도 살아보고 술로 색다른 것을 읽어 내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이 힘겨운 것은 나의 내면에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서 답을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자주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한다. 내 마음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붓다 보면 소통이 되고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마음이 교류되면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얻을 게 많다. 마음을 열고 이 사람에게도 얻고 저 사람에게도 배우면 내가 갖지 못한 귀한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고인 물보다 흐르는 물이 더 깨끗하듯이,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때 행복한 마음이 만들어진다. 이때 나를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몸이 먹고 나면 배설하듯이 마음도 그렇다. 마음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편견과 고정관념을 애써 지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앞으로 내디딜 발걸음 피아노가 좋은 악기로 평가를 받으려면 치밀하고 오랜 공정기간이 필요하고 그에 앞서 최고의 재료를 골라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뵈젠도르퍼 피아노에서는 해발1,000m가 넘는 추운 지역에서 100년 이상 자란 가문비나무 중에 나이테가 1mm 이하인 것만 선별한 뒤 성장이 멈춘 12~1월에 베어낸다고 한다. 이를 다시 5cm 두께로 잘라 야외에서 5년간 건조시킨다. 추운 날씨와 더운 날씨, 습기와 건기를 몇 년 간 거쳐야 비틀림, 갈라짐, 소리의 변화 등을 이길 훌륭한 목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나도 장애의 불편함과 절망으로 뒤덮인 삶을 살았다. 힘겨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그것이 오늘의 ‘나’를 위해 다듬어지는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슬픔이나 어려움을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인생에 그보다 귀한 선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선물로 인해서 사람들의 내면이 깊어지고 인생의 맛이 만들어 진다.
얼마 전, 대만의 타이베이에 있는 딴쟝대학교에 가서 심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살방지에 관한 강연을 했다. 내가 보는 시각으로 인해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던 과거의 삶을 서두로 꺼내면서 마음을 잘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예상과 달리, 학생들의 호응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다. 아프리카에도 가보고 싶고, 유럽, 남미, 미국… 더 넓은 세상에 가서 행복한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은 욕심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순수하고 보석 같은 마음도 만나보고 싶다. 내가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이 생겼다. 그래서 내 삶은 행복하다.

최웅렬
1992년에 구족화가협회에 가입했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다수의 개인전과 초대전을 비롯하여 국내외에서 활발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뇌병변 장애로 인해 바퀴를 다리로 알고 살아가는 그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으로 꽉 찬사람이다. 2010년에 최웅렬갤러리를 강릉에 개관하여 자신이 만난 행복이 담긴 그림들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문혜진
지난 2007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아프리카 가나에 다녀왔다. 그때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를 만나 하반신 마비가 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음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어야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현재 중앙대학교 심리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며, 국내외에서 마인드교육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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