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철학자가 동네 산책을 나왔다가 우물가에서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고구마를 씻고 있던 여자에게 그가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씻고 있는 게 무엇인가요?”
“네, 선생님~ 야채튀김 하려구요.”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준 철학자가 고마웠는지 여자는 말꼬리를 올리며 신난 듯이 말했습니다. 철학자는 대답을 듣고 저만치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지금 씻고 있는 게 뭔가요?”
“아, 선생님~ 채 썰어서 야채튀김 하려구요.”
“야채튀김을 하려는 거군요.”
잠시 후 철학자는 다시 와서 똑같은 질문을 했고 여자도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네, 선생님~ 야채튀김 하려구요.”
“야채튀김을 할 거군요.”
그러더니 이번엔 철학자가 그 자리에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입을 열어 ‘야채튀김…’ 하려던 여자는 멈칫했습니다. ‘이게 뭐지? 왜 자꾸 묻지? 이 정도에서 넘어가야 하는데 다시 묻는 이유가 뭘까?’ 아주 짧은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머리에 불이 번쩍 들어왔고, 여자는 재빨리 대답을 바꿔 말했습니다.
“네, 고구마를 씻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이게 고구마군요.”
철학자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우물가를 떠났습니다.

 여자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어린아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고구마를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싱겁게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박학다식한 철학자가 이렇게 사소한 것을 물어볼까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자의 타고난 성품이 상냥하고 오지랖이 넓어서, 묻지도 않은 보너스 정보까지 미리 알려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물가 여자는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자기 하고 싶은 얘기만 하고 사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상대방의 질문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하고 싶은 대답을 우선시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야채튀김이라는 최종목표만 보고 상대방 질문도 그 목표에 맞춰 해석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자가 그랬다면, 철학자는 왜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까요? 만약 네 번째 질문에서도 정답이 안 나왔다면 언제까지 질문을 계속했을까요? 보통 사람이라면 두어 번 물어봐서 답이 안 나오면 ‘내가 지금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냐?’고 핀잔 섞인 설명을 했을 텐데, 철학자는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몇 번 더 물어봐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아마도 조용한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했을 것 같습니다. 고구마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상대가 스스로 깨닫기까지 기다려주고 싶어서였겠지요? 가르쳐서 머리로 터득한 지식엔 한계가 있는 법이고, 명쾌한 지적이나 조언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철학자는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이 아름다운 가을이 대한민국 청춘들에게는 자기소개서로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계절입니다. 얼마 전 수십만 명의 청소년들은 대입 수시전형에 자기소개서를 냈고,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들도 남다른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를 읽을 입학사정관이나 기업의 채용담당관은 철학자처럼 기다려주지 못합니다. ‘고구마’라는 즉답이 나오지 않으면 곧바로 다음 지원자에게 기회를 넘겨야만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완벽한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을까요? 두괄식으로, 자기만의 키워드와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개인 역량과 더불어 협업도 잘할 인성이 돋보이도록 작성하면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여자처럼 질문한 사람의 의도를 알면 답도 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들로 채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쓴 것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서 피드백을 받는 것이 자기소개서 제출 전의 마지막 점검 단계입니다. 원래 내 눈의 들보는 안 보이고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인다고 하지요? 남의 눈을 빌려서 내 눈의 들보를 제거하는 피드백 작업을 신중히 활용해야 합니다. 혼자만의 생각에 심취해 있으면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는 부분이 생기기 쉽고, 남이 나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설명을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소개서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읽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글이므로, 자신을 남에게 잘 소개해야 합니다. 이때 자신은 야채튀김에 관해 쓰고 싶더라도 읽는 사람이 고구마를 원하면 일단 고구마부터 써나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여러 번 고쳐쓰기를 반복하면 분명히 좋은 자기소개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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