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스냅링크를 걸어라

여러분, ‘스냅링크’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스냅링크는 용수철이 달린 쇠고리로, 암벽등반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안전장치입니다. 독일 산악인 오토 헤르조그Otto Herzog가 1910년에 개발하여 암벽등반의 역사에 혁신을 일으켰습니다. 스냅링크의 보급으로 안전사고가 대폭 줄었으며, 암벽등반가에게는 ‘너와 나를 잇는 생명의 고리’로도 통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고리이지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고립되는 상황이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도 스냅링크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고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어려움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단절되진 않았는지, 마음의 스냅링크를 점검해보세요. 이번호에서는 필자 김기성 씨가 어머니의 마음과 연결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의 어느 작은 섬마을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친구 하나가 ‘부모님께 말 못할 돈이 급히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 친구를 돕기로 했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생각 끝에 마늘을 훔치기로 했다. 당시에는 마늘 값이 비쌌다.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어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던 마늘을 모두 걷어다 리어카에 실어 목포로 가져갔다. 팔았더니 제법 큰 돈이 남아 친구를 도와주고, 남은 돈은 술값으로 써 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 일이 너무 재미있었고, 돈이 떨어지니 한 번 더 일을 저지르고 싶어졌다. 다시 마늘을 훔쳤는데, 친구 하나가 잡히고 말았다. 그동안 마늘을 도둑맞은 마을 사람들은 그 친구를 추궁했고, 우리가 함께 마늘을 훔친 일까지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은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은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다섯 명 중 누군가 죄를 뒤집어쓰면 나머지 넷은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기로 하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경찰이 물으면 ‘모두 기성이가 한 짓’라고 해라. 너희들은 아무 잘못 없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입을 맞추었다. 다른 친구 넷은 금방 풀려났지만, 나는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다. 어머니가 급히 밭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마을 사람들과 합의를 본 뒤에야 나올 수 있었다. 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와 마을 입구까지 왔지만, 도둑질을 해서 유치장까지 갔다 온 게 너무도 부끄러워 들어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가는데 동네 이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엄지손가락을 척 세우며 “자네는 크게 될 사람이야!”라고 하셨다. 친구들을 위해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그 뜻을 알고 이내 기분이 우쭐해졌다.

아홉 번 정학당한 아들도 감싸안은 어머니의 사랑
그때부터 ‘자네는 크게 될 사람이야’라는 한 마디는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왕 크게 될 사람이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해결하는 정의의 사자가 되자’는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선생님께 야단을 듣고 있으면 “왜 친구를 때리십니까? 그러시면 안 되죠” 하고 끼어들어 선생님과 맞섰다. 선생님께 감히 맞설 생각을 못하던 친구들은 좋아했지만, 어떤 선생님은 나를 때리기도 하셨다. ‘어디 두고 보자.’ 나는 그 선생님의 집을 알아두었다가 밤에 술을 마시고 찾아가 야구방망이로 집안살림을 때려부수는 등 행패를 부렸다. 선생님은 벌벌 떨며 나를 붙잡고 “기성아, 그만해라. 내가잘못했다”고 사정하셨다.
나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가장 큰 골칫덩이였다. 학교에서도 여러 번 나를 퇴학시키려 했다.그럴 때면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셨다. 씨암탉을 잡고 술을 받아다 선생님들께 대접하며 매달렸다.
“선생님, 저희 기성이 좀 살려주십시오. 저놈, 고등학교 졸업장도 하나 못 받으면 사회 나가서 뭘 해먹고 살겠습니까? 한번만 도와주십시오.”하도 말썽이 잦아 고교 3년 동안 아홉 번이나 정학을 당했지만, 어머니 덕에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열심히 한 다른 친구들은 타자, 주산 등 여러 가지 자격증을 따서 은행이나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공부를 게을리한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애달픈 외침은 내게도 한이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는 하지만 내 실력은 초등학교 2학년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자네는 크게 될 사람이야’라는 이장님의 한 마디가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작은 섬마을에서는 크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봉제공장, 식당, 술집에서 일했지만 ‘나는 크게 될 사람’이라는 생각이 늘 뇌리에 박혀 있다 보니, 어딜 가도 적응할 수 없었다. 빨리 쉽게 돈을 벌어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남의 물건을 훔쳐 유흥비로 쓰는 등 죄를 짓기 시작했고, 결국 교도소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희생은 내가 옥살이를 한 뒤로도 계속되었다. 섬마을에서 목포까지 배를 타고 나온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교도소까지 자주 면회를 오셨다. 오는 데 하루, 가는 데 하루가 걸리는 먼 길이었다. 연로한 몸을 이끌고 오셨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만나실 수 없었다. 내가 교도소안에서 여러 번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러 왔다가 못 본 채 돌아가고, 왔다가 못 본 채 돌아가고 하는 일이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이번에는 어떻게든 아들을 만나고 와야겠다’고 결심을 하셨다. 아마도 당신이 살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직감하셨던 것 같다. 그날은 교도소에 도착하자마자 면회장 대신 소장실로 향하셨다. 소장님 앞에서 땅을 치고 울면서 소리를 치셨다. “야, 이놈들아! 내 아들 내놔라. 어머니가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내 아 들 대체 어디 갔냐? 살아 있기는 한 것이냐?”
울며불며 통곡하시는 어머니를 안타깝게 여기신 소장님은 특별히 면회를 허락해 주셨다. 시간은 단 10분. 작은 구멍이 뚫린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연신 눈물만 계속 흘리셨다. 나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10분이 금방 지나갔다. 벨이 울리고 교도관들이 나를 데려가기 위해 팔을 붙드는 순간, 어머니가 외치셨다. “못 간다, 이대로는 못 가! 내 아들 손이라도 잡아보자.” 하지만 유리벽 때문에 어머니는 내 손을 잡지 못한 채 집으로 발길을 돌리셔야 했다. 가슴이 찡했다. 방으로 돌아왔지만 “내 아들 손이라도 잡아보자!”는 어머니의 외침은 계속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어떻게든 자식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애달픈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어머니께 몹쓸 짓을 했구나!’후회와 한恨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토록 꿈꾸던 면회, 하지만 깨어진 꿈
얼마 후 교도소장님이 바뀌었다. 새로 오신 소장님은 재소자들에게 한자 공부를 권하시면서 특별제도를 만드셨다. 한자 시험에서 다섯 번 1등을 하면 가족들과 자유면회를 할 수 있도록 하셨다. 자유면회란 교도소 마당 나무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펴놓고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세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나도 1등을 다섯 번 하면 어머니와 맘껏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그때부터 죽어라 한자 공부에 매달렸다. 교도소에는 좋은 대학을 나왔거나 고위공무원 출신 등 머리 좋은 사람이 정말 많다. 평생 공부와는 담을 쌓은 내가 1등을 하려면 남들이 다섯 시간 할 때 열 시간, 열 시간 할 때 밤새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빡빡한 교도소 일과 속에서 공부할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어머니 소원을 풀어드려야겠다는 한이 맺혀 있다 보니 마음에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밤을 새가며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로 줄줄 외운 덕에 다섯 번 1등을 할 수 있었다. 머리털 나고 시험에서 1등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곧바로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한자시험에서 다섯 번 1등을 해서 자유면회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몇 월 며칠 낮 12시까지 교도소로 오시면 어머니와 교도소 마당 나무그늘 아래서 고기도 구워먹고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꼭 오십시오.’
어머니도 그날 꼭 가겠다고 답장을 보내오셨다.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자유면회 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샤워를 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어머니가 오시지 않았다.
‘조금 늦으실 수도 있지. 차를 잘못 타셨거나 길이 막힐 수도 있고….’ 1시가 되어도, 2시가 되어도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다. 마음이 차츰 불안해졌다. ‘어디 편찮으신가?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아닐까?’ 2시 반 정도 되었을까. 교도관이 나를 따로 불렀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왜요? 오늘 저희 어머니 오시기로 했단 말이에요.”
“잠깐이면 되니까 방으로 들어와.”
교도관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교도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 어머니 오늘 못 오신다.”
“아니, 왜요? 저 분명히 한자시험에서 1등 다섯 번 했잖아요?”
“너희 어머니가 널 만날 생각에 하도 기뻐 낮에는 일하시고 밤에는 너 줄 음식 준비하느라 거의 못 주무셨대. 이른 새벽에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셨는데, 기차를 타고 오시다가 대전역을 지날 때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다. 너희 어머니… 이제 못 오신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 어머니! 이 못난 자식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몇 번이나 교도소를 오갔지만, 손 한 번 제대로 못 잡고 간다고 그렇게 슬퍼하셨는데. 뒤늦게나마 그 한을 풀어드리려고 시험에서 1등을 해서 자유면회 허가도 얻었는데. 어머니 손도 잡아드리고 맘껏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그 한을 풀어드리지 못했구나. 내가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한 거야.’ ‘나는 크게 될 사람이야’라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지난날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자존심을 세우고 큰소리를 치며 살았던 삶이 남긴 것은 교도소에서의 생활,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뿐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밖에서 술을 드시고 오신 아버지께 자주 매를 맞곤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불평을 하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묵묵히 남편을 섬기고 우리 자식들을 뒷바라지하셨다.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나서서 그 일들을 무마시켜 주신 분도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때로는 좋은 말로 나를 타이르기도 하셨지만, 나는 그때마다 오히려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께 한 번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어머니께 너무도 죄송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실의와 죄책감에 빠져 지내던 어느 날, 책을 한권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마음을 품고 살아왔는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아울러 반듯하고 성실하게 살다 출소한 주변의 재소자들이 얼마 후 다시 죄를 짓고 교도소에 오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죄악에 빠지지 않고 살 자신이 없었다. 고민 끝에 그 책을 쓴 저자 선생님께 ‘출소하면 가르침을 받으며 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그리고 지금까지 그분과 일하면서 마음의 세계를 전하는 마인드강사로 활동 중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평생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뒷바라지해 주신 어머니의 마음을 진작 알았더라면,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텐데. 재소자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마인드 강연을 할 때면 나는 자주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덧붙인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음이 흘러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그리고 친구 사이에 진실한 사랑과 마음이 흐르면 삶이 행복해지고 마음에 변화가 찾아옵니다’라고. 산악인들이 스냅링크 덕분에 험한 절벽도 손쉽고 안전하게 오를 수 있듯, <투머로우> 독자들도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만 고집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에 링크를 걸어보자. 그리고 서로 마음이 흐르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살기를 바란다.

김기성
전국에서 ‘마인드 변화’에 대해 활발하게 강연하고 있는 그는 마인드 전문 강사다. 범죄에서 정확하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그의 주옥같은 메시지가 청소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담을 받고 싶은 분은 kgs91@hanmail.net으로 문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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