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학자금지원 수기공모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아빠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둘째는 아들이기를 기대하고 기다렸으나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들은 아빠는 몹시 실망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늦게 찾아 온 병원에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뽀오얀 피부에 당신을 닮은 이목구비를 하고 처음 보는 세상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아빠는 멍해지셨다. 그 조그맣고 귀한 아이를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실망한 미안함과 너무나도 예쁜 딸의 모습에 아빠는 울고 웃으셨다. 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 ‘내가 너에게 정情을 더 주겠다.’ 하여 지은 ‘정은’이 내 이름이다. 아빠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완전한 딸 바보로 사셨다. 그 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사랑을 표현하셨기에 나는 자라면서 조금씩 배부른 투정으로 아빠를 밀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아빠는 내 완전한 이상형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아빠 같은 사람과 만날 수 있었을까?’ 하고 엄마를 부러워했다.

부모님의 희망이던 나의 대학 진학
명예퇴직을 당하신 아빠는 퇴직금으로 식당을 차리셨지만 그마저도 잘 안되어 접고 부동산을 시작하셨다. 부동산은 한때나마 반짝 수입을 얻게 해주었지만, 정책이 바뀌면서 부동산 업계도 장기적인 침체기로 들어섰다.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살아오다보니 어느새 40대 중반에 이른 아빠. 이제껏 게으르게 살아오신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들어보니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백지장과 같았다. 다시 일어설 곳을 찾는 것도 마땅치가 않았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남들은 대학입시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울상일 때 내가 가장 고민한 것은 ‘당장에 돈을 벌 것인가, 대학을 준비할 것인가?’였다. 부모님은 완곡히 대학을 권하셨다. 엄마아빠 두 분 다 여의치 않은 가정형편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하셨기에, 첫째 딸도 노력했지만 대학에 가지 못했기에 나만큼은 어떻게든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셨을 것이다. 부담이 될까봐 표현하지 못하셨겠지만 나한테 건 기대도 엄청나셨을 것이다. 나는 우리 집이 가진 한을 풀어줄 희망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희망이다’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뻔뻔스러우리만큼 내 할 일에만 집중했다. 휘몰아친 경제문제 속에서도 봐도 보지 않은 척, 알아도 더 이상 알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학입시준비를 했다. 같은 해 11월, 나는 최고의 생일선물인 ‘단국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부모님이 더 좋아하셨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모처럼 웃으셨다. 딸 자랑하려고 지갑을 탈탈 털어서 한턱 쏘시고 온 아빠의 흥에 겨운 모습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장학금으로 희망다운 희망되다
입학 날이 다가왔고, 아빠는 내게 400만 원을 쥐어주셨다. 대학등록금으로 쓰라고 주신 돈이었다. 웬 돈이셨을까. 나는 빌린 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채무업자의 독촉에도 돈을 갚지 않고 미루었거나 머리 숙여가며 지인에게 빌린 돈이었을 것이다. 다 알면서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가정의 희망인 내가 대학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돈이었으니까. 내가 희망이면 밝아야 하는데 왜 이리 어둡기만 한 건지, 왜이리 무겁고 습한 눈물만 맺히는 건지…. 무거운 나날을 보내던 중, 등록금 고지일이 되어 등록금 고지서를 확인했다. ‘최종 등록금: 128만 5천 원’.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원래의 등록금 428만 5천 원 중 성적장학금 100만 원, 국가장학금 I, II유형 200만 원 가량이 삭감되고 남은 돈이었다. ‘와, 세상에, 감사합니다!’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을 고스란히 아빠에게 돌려드렸다. 저 돈으로 한 번은 덜 숙일 수 있겠지. 너무 다행이었다. 그제야 ‘나’라는 희망이 희망다워 보였다. 부모님께 예쁜 짐이 아니라 예쁜 날개가 되어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이후로도 계속 국가장학금을 받았고, 나는 가볍고도 활기찬 마음으로 도전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부’에서 문학을 분석하여 내 생각과 비평을 쓰고, 시와 소설을 쓰는 문학인이 되었다. 입학사정관제 자문단 ‘은가비’에서는 다양한 학과의 사람들을 만나며 인맥을 넓힘과 동시에 다양한 시선으로 보게 되었고, 고교연계프로그램을 통해 멘토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제학생회 ‘GTN’에서는 외국인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세계인의 시각을 보고 내 꿈이 펼쳐질 공간을 세계로 잡으며 더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강연단 ‘단울림’ 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통하며 강연하는 법을 배웠고, 재학생 홍보대사 ‘날개단대’를 통해 학교를 대표하여 행동하고 세계에 한국을 홍보하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많은 깨달음을 주며 나를 성장시켜 주었고, 계속해서 부모님의 희망으로서 부모님을 미소짓게 하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에 오지 않았다면, 국가장학금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면 절대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
아빠는 그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애쓰셨다.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수입이 별로 없는 부동산 중계를 다시 시작하셨고 밤마다 대리운전을 하셨다.
대리운전으로 먼 곳에 가서 차가 끊기는 날에는 교통비를 아끼려고 2시간을 걸어 새벽에야 집에 오셨다. 그런 생활 때문에 아빠는 점점 살이 빠지셨다. 그러던 2014년 2월, 자꾸 체해서 찾아간 병원에서 아빠는 췌장암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병원에서는 수술로도 안 된다고 했다. 집안사정은 갈수록 나빠지는데 아빠가 암 판정을 받으시면서 엄마도 일을 그만두시고 간병에만 전념하셨다. 형편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내가 계속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국가장학금 덕분이었다. 계속 학교에 다니며 멋진 딸로 자리를 빛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 학기가 지난 여름방학,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내 평생에 가장 많이 울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그 슬픔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히 떠오르는 아빠 생각에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생활을 반복했다. 겉은 멀쩡해 보였으나 속은 문드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다시 국가장학금을 받았다. 덕분에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끝을 붙잡고 조금씩 위로 올라올 힘이 생겼다. 등록금을 마련하려는 아빠의 짐을 국가장학금이 덜어주었다. 감사하다. 덕분에 나는 아빠의 등골을 덜 휘게 하면서 아빠의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국가장학금은 내게 아빠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여러 상황 속에서 힘이 들어 지쳐 있어도 내가 잘하건 못하건 늘 나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기회 속에서 나는 망설임 없이 도전하며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내게 국가장학금이라는 또 하나의 아빠가 있어서 나는 오늘 하루도 든든하다.

김정은
그녀가 스스로 지은 본인의 별명은 에너다이아ENERDIA다. 에너자이저처럼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넘치며, 다이아몬드처럼 강하고 눈부신 빛을 발하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그 별명에 걸맞게 오늘도 도전하는 하루를 살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