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진의 'In 아프리카, 아프리카人'

케냐의 한 방송국에서 PD로 일하고 있는 송태진 씨가 아프리카에 대해 매달 <투머로우>에 소개한다. 이번에는 커피의 나라로 알려진 케냐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음료 케냐 티를 자세히 알려준다. 케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디서든 케냐 티를 함께 마시는 것이다.

커피의 나라 케냐?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 케냐는 최고의 커피가 생산되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해발 1,500~2,100m에서 재배되는 케냐 AA 커피는 강렬한 향과 묵직한 바디감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뛰어난 품질의 커피를 재배하는 국민이라면 왠지 특급 바리스타처럼 섬세한 커피 감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되지만, 의외로 케냐 사람들은 그다지 커피와 가깝지 않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대형 쇼핑몰 같은 곳이 아니면 커피 전문점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다.케냐인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음료는 따로 있다. 삼시 세끼를 넘어 하루 다섯 잔, 열 잔도 마다하지 않고 들이키는 케냐의 국민 음료, 그것은 바로 ‘케냐 티’라고 불리는 밀크 티다.

호텔에서 만나는 케냐의 차 문화
케냐의 차 문화는 식민지 시절 시작되었다. 익히 알려진 영국의 티타임이 케냐에 자리 잡은 것. 차를 홀짝이지 않고는 하루도 못 견디는 차 중독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차나무를 들여와 케냐의 고원에 심었다. 재배는 성공적이어서 케냐 중부 케리초 지방에는 광대한 초록빛 다원이 들어섰다. 영국인들의 차 마시는 습관은 자연히 케냐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차는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후에도 꾸준히 사랑받으며 국민 음료의 자리를 오늘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영국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케냐의 차마시는 시간은 영국식 티타임과 비슷하다. 먼저 아침에 일어나 차를 한 잔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10시경, 아직 아침에 마신 차의 온기가 남아있을 무렵이지만 한 잔 또 마신다. 점심 식사를 하며 한 잔, 오후에 나른할 때 한 잔,저녁 식사 시간에 또 한 잔. 잠들기 전 출출할 때 한 잔 더.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한 잔 또 한 잔으로 목을 적신다. 쉽게 말해 시간만 나면 차를 홀짝이는 것이다. 특히 오전 10시의 티타임은 꽤나 중요해서 회사나 학교에서는 일과와 수업을 잠시 멈추고 일제히 차를 마신다.
 차와 함께 빵이나 간식, 과일 등을 함께 하며 요기를 하기도 한다. 차를 마실 때 케냐 사람들은 주로 거리의 허름한 식당에 모여 앉는다. 함석판이나 나무널판, 혹은 천막으로 얼기 설기 세워 쓰러져가는 거리 식당을 현지인들은 역설적이게도 ‘호텔’이라고 부른다. 호텔의 메뉴판에는 녹차, 홍차, 우롱차, 얼그레이 따위의 우리가 기대하는 익숙한 차의 이름은 없다. 대신 ‘케냐 티’ 혹은 ‘차이’라고 하는 한 종류의 차만 달랑 적혀 있다. 케냐 티는 밀크 티의 일종으로 물을 섞지 않은 우유에 홍차를 우려내고 기호에 따라 설탕으로 단맛을 조절한다. 부드러운 우유에 홍차의 향이 은근히 섞인 달달한 케냐 티. 고급스럽지도 않고 오묘하거나 까다롭지도 않은 단순한 맛이다.

티타임은 평등한 대화의 시간
케냐 티는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된장이나 두리안처럼 익숙해져야 맛을 느낄 수 있는 어려운 음식이 아니다. 케냐 티를 마시는 케냐 사람들 역시 그렇다.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누구와도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허름한 호텔에는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들은 낡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같은 맛의 케냐 티를 주문한다. 호텔 밖에서는 서로 다른 모습이었던 그들은 케냐 티를 통해 나로 연결된다. 차를 마시는 동안 케냐인들은 자신들이 똑같이 창조된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케냐 사람들의 티타임은 평등한 대화의 시간이다. 지위가 높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주눅 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같은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똑같은 사람이지 않은가. 상사와 부하직원, 선생님과 학생, 할머니와 손녀는 달작한 케냐식 밀크 티를 마시며 대화를 한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 주워들은 이야기, 심각한 정치 이야기 등등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누구하고든 대화를 주고 받는다. 외국인인 필자 역시 마음을 열고 그들과 쉽게 대화를 나눈다. 하루에도 수 차례 틈 날 때마다 챙기는 티타임에서 케냐인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잠시 바쁜 일을 멈추고 ‘호텔’이라고 부르는 식당에 들어가 케냐티를 주문하는 일은 입을 즐겁게 하고 허기를 채우는 수위를 넘어 마음을 순화시키는 중요한 시간이다.
 필자는 누구와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케냐의 티타임이 부러웠다. 한국에서 제일 부유한 사람과 가장 가난한 사람, 혹은 백발노옹과 이팔청춘이 같은 자리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료가 무엇이 있을까?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콜라? 와인? 흑염소 엑기스? 서로의 입맛과 수준을 맞추기 쉽지 않다. 하지만 케냐에서는 아주 쉽다. 그냥 케냐 티를 마시면 된다. 필자는 시골 노파의 누추한 오두막, 왁자지껄한 고등학교의 급식소, 대기업의 으리으리한 집무실에서는 물론 UN의 국제 회의장과 케냐 대통령 궁에서도 케냐 티를 대접받아 보았다. 우유와 찻잎, 설탕으로 구성된 그 단순한 맛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비슷했다. 어린이부터 대통령까지, 부유하든 가난하든 구분 없이 똑같은 맛의 케냐 티를 마신다. 그들은 언제든지 한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케냐 티는 케냐인의 힘
사실 녹차나 홍차가 가진 본래의 순수한 내음을 즐기는 한국인의 시선으로는 우유와 설탕, 간혹 생강까지 넣어 쌀뜨물처럼 탁하게 휘휘 저어 놓은 케냐티가 좀 불편하다. 하지만 케냐에서 밀크 티가 자리잡은 이유가 있다. 대부분 평지로 이뤄진 케냐에는 숲과 골짜기, 강이 드물어 맑은 물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물에서 길어온 진흙 섞인 탁한 물로 끓인 홍차가 맛이 없음은 당연한 일. 자연스레 케냐에는 물 없이 우유에 찻잎을 우려낸 밀크 티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거기에 출출한 배를 금방 채워주는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게 되었다. 한국인들에게는 낯설지만 케냐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케냐 티의 탄생이다.
 차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으며 손님이 집에 찾아 왔을 때 가정에서는 차를 내놓는 게 예의가 되었다. 케냐의 주부들은 매일 아침마다 우유를 데워 보온병에 넣어 놓는다. 만약 손님이 왔을 때 차를 마실 따뜻한 우유가 없으면 집안 망신이라고 여길 만큼 티타임 준비에 공을 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마시는 차는 때론 괴로움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직업상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이 잦다. 회사나 가정을 방문하면 으레 차를 준다. 그 달짝지근한 밀크 티 말이다. 가는 집마다 케냐 티를 대접해 주니 하루에 예닐곱 잔, 밀크 티만 1리터를 넘게 마시기도 한다. 큰 잔에 눌러 담은 케냐 티를 두 잔만 연달아 마셔도 포만감이 찾아온다. 새참이 따로 필요 없다. 더욱이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 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다량의 밀크 티는 종종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하는 심각한 재앙을 불러오기까지 한다.
 호텔에서 만난 경찰 고위 간부 스테판은 나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이것은 자동차의 연료와 같다고. 자동차가 달리기위해 연료가 필요하듯 케냐인에게는 차의 힘이 필요하단다. 힘이 떨어질 때쯤마시는 케냐 티 한잔이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활력을 주기에 하루에도 수시로 티타임을 맞이하며 연료를 채워준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반가운 손님에게 차를 내오는 건 당연한 예의다.
 상황이 그러니 아무리 속이 안 좋다고 해도 차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실례가 된다. 주인 입장에서는 뭐라도 대접해야 하기 때문에 손님이 차를 싫어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값비싼 탄산음료나 과일주스를 사와야 하는 것이다.
 만약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 아무것도 내오지 못하면 주인은 굉장히 미안해한다. 주인의 마음을 얻으려 가정에 방문한 것인데 나 때문에 괜한 부담을 줄 바에는 힘들어도 그냥 밀크 티를 마시는 게 낫다. 부푼 배를 부여잡고 ‘정말 맛있게 잘 끓이셨네요.’라고 넉살 좋게 한마디 해주면 주인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일을 하든 여행을 하든 케냐에서 지내려면 케냐 티 마시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한다.

케냐에서 친구를 사귀려면 케냐 티를 마시자
케냐에서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오전 10시에 커피 전문점이 아닌 거리의 호텔에 들어가라. 그리고 케냐 티를 시켜라.200원밖에 하지 않으니 걱정 말라. 설탕 듬뿍 넣은 케냐 티를 한잔 마시며 눈앞의 아무하고나 대화를 시작하라.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친구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익살꾼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당신의 겉모습이 어떻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케냐 티를 마시는 사람들이기에. 천성이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들이기에. 누구와도 친하게 만들어 주는 케냐 티를 오늘도 마신다.

송태진
2008년 부룬디로 1년간 해외봉사를 다녀온 그는 아프리카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꿈을 품은 맹랑한 공상가다. 지난 12월부터 아프리카 케냐 GBS TV방송국에서 청소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느낀 경험들을 그의 따뜻한 필치로 소개한다.
http://blog.naver.com/impork3 쏭태의 생생한 아프리카 이야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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