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참전용사인 미 해병 델버트 레이 호레트Delbert Ray Houlette 상사가 지난 7월 한국을 찾았다. 기자는 그의 통역을 맡아 수행하면서 평소 역사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5일 동안 동행 취재하며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를 나눈다.

남북이 통일되어 평화가 찾아온 DMZ를 통과해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평화의 발’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남북이 통일되어 평화가 찾아온 DMZ를 통과해 맨발로 걸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평화의 발’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지난 7월 27일,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영화 ‘테이큰Taken’으로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이 맥아더 장군으로 출연하면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영화 개봉일은 3년 동안 혈전을 벌이던 남.북한이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체결한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다. 수많은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동료들의 죽음과 전쟁의 끔찍한 실상을 목격해야만 했다. 그 중 17살에 한국전쟁을 겪은 델버트 레이 호레트 상사가 66년 만에 처음 내한했다.

5,000분의 1의 확률을 뚫고 성공시킨 인천상륙작전
84세 노장은 수염이 하얗게 세고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오래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언제나 준비된 장수처럼 여전히 허리가 꼿꼿했다. 그의 자세에서 전장에 선두로 참여하던 해군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논밭을 보며 50년대 자신이 봤던 한국을 떠올렸다. 하지만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삼성, LG 등의 대기업 간판을 보며 느껴지는 한국의 경제발전에 적잖이 놀랐다.
 레이 상사는 1950년 6월 27일에 한국으로 파병 명령을 받았다. 7월 12일에 캘리포니아에서 출항한 그는 8월 2일,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미 해병 1사단에 소속되어 부산 교두보 전투, 서울탈환작전, 장진호 전투 등 한국전쟁의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서도 주력부대로 전투를 벌이며 무전병으로 활약했다.
 “저희 부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첫 번째로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서 배를 정박하기가 어려웠죠. 밀물이 들어올 때 해군 첫 번째 팀이 인천에 들어왔는데, 그 다음 밀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다음 팀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희는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었어요. 한밤중에 인천에 도착했을 때 약 3미터 정도 되는 벽이 있었는데, 가져온 사다리를 타고 한 명씩 벽 위로 올라가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람도 있었고,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될 당시 미국합동참모본부와 미 해군은 인천해의 좁은 해로와 큰 조수간만의 차이를 이유로 이 작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뚝심으로 작전을 진행했고, 미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1사단은 5,000분의 1밖에 안 되는 성공 확률을 뚫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17살 소년에게 전쟁이 남기고 간 것
레이 상사는 사실 한국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 어린 시절, 편찮으신 아버지로 인해 일찍이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해군에 지원했다. 그는 17살에 입대해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파견됐다. 먼 타지 한국에서의 경험은 사춘기의 소년이 감당하기에 녹록지 않았다. 군용자동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가 강 한가운데에서 멈추는 바람에 빠져 죽을 뻔 한 적도 있었고 전투 중 총알이 떨어져서 총알을 보충하기 위해 시체 더미를 뒤져야만 했던 적도 있었다. 1950년 11월 겨울에는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계곡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있다가 2주 간에 걸쳐 철수 작전을 전개했다.
 “장진호에서 12만 명의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저희는 고작 200~300명밖에 안됐었죠. 이미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서 다들 끝났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늘에 별 하나가 떠오르더니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반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별빛을 뚫고 보급품을 전달해 줄 수송기가 나타났고, 덕분에 저희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몇 안 되는 생존자만 남긴 이 전투가 바로 미군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다. 영하 20~40도를 오가던 그날의 겨울은 매서웠다. 중공군에 의한 공격보다도 매서운 추위 때문에 심한 동상에 걸려 죽어가는 병사들이 많았다. 레이 상사 역시 그 때의 영향으로 두 다리가 심한 동상에 걸렸다. 바늘로 찔러도 통증을 잘 못 느낄 정도로 마비가 와서 지금도 늘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지난 전쟁을 떠올리던 그는 말할 수 없는 회한으로 목이 잠겼다. 레이 상사는 이야기 도중 목까지 차오른 울음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낙동강 부근에서 전투를 하다가 어느 마을에 간 적이 있어요. 북한군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뒤였죠.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꺼번에 총으로 학살했는지 언덕에 시신이 많았어요. 갓난아기, 여자, 노인, 남자가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데…. 숨이 턱턱 막 혔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무슨 정신으로 그 시신을 치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에게 남겨진 전쟁의 흔적은 잔인했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을 체결한지 64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그는 ‘한국에서 겪은 8개월간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그의 병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였다. 반복되는 악몽, 떠오르는 잔상 등 전쟁이 남긴 후유증이었다.
 이른 새벽, 악몽 때문에 땀에 젖은 몸으로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 수 없었다고 말하는 레이 상사. 눈만 감으면 옛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악몽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사실 레이 상사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스스로 기억하는 것은 없다. 꿈에서 한국전쟁의 잔상들을 보며 어렴풋이 전쟁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는 악몽에 대한 기억을 정확히 하기 위해 잠에서 깨면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꿈에 대해 메모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메모하면서 악몽을 꾸는 수가 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는 안타까워 하는 기자를 보며 ‘괜찮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 고통과 함께 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지키기 위해 젊음을 희생했던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전쟁이 남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선뜻 한국을 방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한국행도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로해 주기 위하여 임진각 평화 콘서트에 초대하고 싶다는 국제청소년연합의 초청에 응하며 어려운 발걸음을 한 것이다.

임진각 평화 콘서트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마음을 위로받다
지난 7월 10일, 남과 북을 잇는 임진강이 흐르는 곳, 바람개비 동산을 타고 통일을 염원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임진각에서 레이 상사는 평화 콘서트에 참석했다. 한 때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던 남북의 경계선에서 그가 평화의 하모니를 듣기 위하여 참전용사로서 참석하는 일은 아주 특별했다. 레이 상사는 감격에 겨워 2만 여 명의 사람들 앞에서 한국을 찾은 감회를 밝혔다.
 “저는 전쟁 이후에 끊임없이 꾸는 악몽과 전쟁에 대한 잔상들, 또 심각한 동상 때문에 한국을 떠올리기가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전쟁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졌던 한국이 제가 하나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멋진 나라로 성장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많은 한국인들이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줘서 고마웠습니다. 이제 한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가 있고,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현대와 기아 같은 자동차 산업도 발전 했습니다. 누가 한국을 이렇게 성공적인 나라로 이끌었을까요? 바로 여러분들의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입니다. 여러분, 그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이 이렇게 성장하는 데에 제가 작은 역할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쁩니다. 제게 이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국제청소년연합과 미 해병의 집에 감사드립니다.”
 솔직하게 전달된 그의 메시지는 임진각에 모인 한국 국민들과 세계 청소년부 장차관 및 총장들의 마음을 울렸다. 단 아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거수경례나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그는 가벼운 목례로 박수에 화답했다. 66년 동안 마음속에 한국을 향해 걸어두었던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오늘날 전쟁을 겪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은 우리네 부모님들이 일구어 놓은 경제 발전을 누리고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교통카드 하나면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스마트폰, 태블릿PC 같은 스마트 기기 덕분에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취미를 즐기거나 업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이 있기까지 무엇이 기반이 되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국군, 유엔군, 향토민 등 많은 분들의 노고와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거 없는 미래는 없다. 그 분들의 헌신을 기억했을 때, 대한민국은 기술뿐만 아니라 의식도 앞서나가는 선진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델버트 레이 호레트(Delbert Ray Houlette)
1931년 10월 28일생. 17살의 나이로 한국으로 파병된 그는 8개월 동안 참전한 뒤 1951년 3월에 미국으로 귀환했다. 현재 미해병한국전참전용사회 라스베가스 지부 회장으로 있다.

임진각 평화콘서트
지난 7월 10일, 세계 유일 분단국가의 군사분계선 DMZ부근에 있는 임진각에서 평화 콘서트가 열렸다. 독일 마르크트오버도르프 국제합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라시아스 합창단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의 세계 음악 거장들이 함께했다. 이번 콘서트는 세계 각국의 청소년부 장차관, 대학총장들과 시민들 등 총 2만 여 명의 사람들이 관람했다. 그라시아스 합창단은 평화의 하모니로 한여름 밤의 임진각을 아름답게 물들였으며, 임진강 너머 우리 민족과의 통일을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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