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학자금지원 수기공모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는 다섯 살 때 눈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는 ‘내가 자식을 약하게 낳아서 그렇다’며 계속 자책하셨다. 내가 퇴원하자마자 어머니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나를 간호하셨고 결국 과로로 쓰러져 입원을 하시기도 했다.
식당일을 하셨던 어머니는 일을 하면서도 여러 번 쓰러져 식당 동료에게 업혀 집에 왔는데, 그 와중에도 나와 누나를 위해 밥을 차려 주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난다. 살면서 힘들고 나태해지는 순간이 생기면, 그때의 아픈 기억이 나 자신을 다잡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의 아침을 챙겨주기 위해 직장을 옮기셨다. 중공업 현장에서 용접보조 일을 하시는데, 듣기만 해도 고된 일이지만 어머니는 시간이나 월급을 따져볼 때 우리 남매를 키우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라 하셨다. 한여름에도 땡볕 밑에서 두꺼운 작업복과 마스크를 끼고 용접 불꽃을 맞으며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

어머니를 위해 결정한 직업
대학 진로 결정을 앞두고 전공과 향후 직업을 생각하면서 늘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어머니’였다. 그래서 결정한 학과는 산업보건학과이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작업환경과 건강을 관리하며 직업병을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마련하는 산업위생기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선택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어머니를 위해 앞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나 등록금이었다. 어머니가 아끼고 아끼며 1학년 1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주셨지만 4년제 대학의 남은 학기 등록금을 또 다시 부담하기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입학하기도 전부터 ‘과연 내가 대학을 다녀도 괜찮을까?’ ‘지금이라도 일을 시작해야 자식으로서 도리가 아닐까?’ ‘남들보다 체력도 약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등 고민이 가득했다.
 이런저런 걱정만 하다가 인터넷 검색창에 장학금이라는 단어를 쳤는데, 가장 먼저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가 나왔고, 내용을 살펴보다 국가장학금 제도를 알게 되었다. 높은 수준의 성적을 요구하거나 일부 학생들에게만 특화된 다른 장학금과 달리 소득분위 8분위 이하의 대학생이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는 국가장학금,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신청했다. 그리고 학과장학금과 국가장학금을 합쳐 다음 학기 등록금의 무려 40%나 감면받을 수 있었다. 까다로운 조건 없이 받을 수 있는 장학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지원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4년 동안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을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뻐하시는 어머니에게 앞으로는 더 이상 경제적 부담을 안겨 드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경제관념과 대인관계를 배우다
다음 해에 해군에 입대하여 23개월 복무한 후 복학했다. 다시 국가장학금을 신청하려다, 우연히도 일한 만큼 장학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국가 근로장학금을 알게 되었다. 경제적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신청을 했다. 얼마 뒤 학교 장학지원팀에서 교내 피트니스센터를 연결해주었다. 아침에 운동하는 사람이 많은 피트니스센터의 특성상 근무 시간은 아침 6시부터이고, 적어도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했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았다. 국가근로는 단순히 돈을 버는 데에 그치지않고, 개인 시간표에 맞춰 근로 시간의 자율적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1주일 20시간의 근무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과제나 학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봉사활동도 할 수 있었다. 교내 근무인 만큼 선후배나 친구들, 교수님들과 마주칠 일이 많았는데,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한 학생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이 습관이 되었고, 예전에는 집중력이 떨어졌던 1교시 수업 시간에 맑은 정신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나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어렵게 장학금을 받으면서 돈의 소중함을 다시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경제적 관념과 돈에 대한 가치관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돈을 함부로 쓸 수도 없었고, 만약 써야 한다면 계획적으로 지출했다.
 국가근로를 통해 정신적 수혜도 받았다. 자기관리에 충실한 생활습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폭넓은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원만한 교우관계와 선후배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활동은 당연하게 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 시작을 무척 어려워한다. 시작이 어려운 친구나 선후배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함께하자고 이야기할 수 있기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많은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렇게 학점을 위한,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한 봉사가 아닌, 정말 ‘봉사 그 자체를 위한 봉사’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단지 주위 사람들뿐 아니라,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삶을 살고자 한다.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는 든든한 후견인이 되고자 한다.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은 혜택이 나의 삶에 새로운 목적과 가치관을 부여한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이 긍정적인 목적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산업보건학 전공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 분야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직업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산업보건학을 바탕으로 하여 보건후진국가의 사람들에게 안전한 보건생활을 교육하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금까지 받은 혜택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받아온 경제적 수혜와 정신적 수혜를 다른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경제적, 정신적 후견인으로서의 삶은 내가 평생을 두고 완성해 갈 나의 미래이자 꿈이다.

박진현(대구가톨릭대학교 산업보건학과 3학년)
각종 대내외활동 매니아이자학과 봉사 왕으로, ‘튀는’성격이라고.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제공하는 산업보건 관리자가 되기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