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의 루고 전 대통령은 지금은 상원의원으로 있지만 국민에게는 ‘빈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부정부패를 척결한 그는 국민을 위하여 행동하는 리더였지만 ‘국정 운영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가난한 소년에서 사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온 루고 상원의원. 차기 대선을 준비 하고 있는 그의 삶을 조명해보았다.

2012년 6월 15일 파라과이의 쿠루콰티 지역에서 경찰이 시민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 사건으로 농민 10명과 경찰 7명이 사망했고, 80여 명이 부상당했다. 콜로라도 당은 당시 루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주장했다. 국정운영 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면서 6월 21일 탄핵안이 삽시간에 하원을 통과했고, 다음날 상원을 통과했다. 루고 대통령은 변론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고, 탄핵안은 초고속으로 가결됐다. 루고 대통령이 불복하고 저항할 수 있었지만 위험한 사태가 눈앞에 펼쳐졌다.
 탄핵 소식을 들은 당시 수많은 시민은 의회와 달리 루고 대통령을 지지하며 국회로 모여들었다. 인파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온 나라가 들끓을 만큼 시민들이 흥분해 있었다. 루고 대통령은 탄핵보다 급한 유혈 사태를 막고 싶었다. 무분별한 총기 사용에 정부 경찰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도 있었다. 시민들은 부정부패 정권에서 벗어나 어렵게 얻은 자유를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정치 분위기가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정치란 때로는 위험하고 무자비한 것임을 몸소 경험한 루고 대통령이었기에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제가 바로 정권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기업인이나 정계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농부의 자녀였을 것입니다. 저는 불공정한 결정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임무 불성실’로 탄핵을 받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제가 벌인 정책은 아주 좋은 것이었습니다. 지방에 가더라도 아직까지 사람들이 저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탄핵이 처리되기도 전에 루고 대통령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무런 저항 없이, 아무런 항변 없이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국민은 분노하고 울었지만, 루고 대통령은 무고한 인명이 피해입지 않도록 권좌에서 내려가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듬해 2013년 ‘프렌떼 관수’ 당을 창당한 루고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다섯 의석을 확보하면서 상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정치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그는 현재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파라과이 정부에 불어 닥친 혼란
루고 의원이 태어난 1951년은 반대파 세력을 향해 아량이 없는 군사 독재정치가 이뤄졌다. 대통령 스트로에스네르는 반대자를 탄압하고 추방했다. 부정선거로 일곱 번이나 대통령을 했던 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어떤 이는 가혹한 정치 상황아래서 생사가 오가는 이도 있고,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소년 루고의 아버지는 20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고, 세 형들도 파라과이에서 추방당했다. 외삼촌 에삐파니오 멘데스 플레이타스는 1954년부터 1989년까지 해외로 추방당했다. 소년 루고가 성장하는동안 파라과이 정치는 현실적으로 어지러웠다.
 1980년 로드리게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부정부패는 여전했고, 스트로에스네르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소년 루고
1958년 일곱 살 소년 루고는 어렸지만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응석을 부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도와 우유와 빵을 팔기 위해 가게나 거리에서 일해야만 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소년 가장이 된 루고는 가난 속에서 마음이 깊어 갈 수밖에 없었다. 소년 루고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았다. 가진 게 없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생각하는 책임감이 어릴 때부터 싹텄다.
루고 의원은 지금도 어린 시절 동기동창을 만나곤 한다. 친구들은 그를 신의가 강한 친구로 추억한다. 소년 루고가 어릴 때부터 항상 문제를 책임지고 솔선수범하여 해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물음에도 겨우 답할 정도로 소심하고 말수가 적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열다섯 살까지 내성적이고 소심했지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거나 그러지 못했어요. 고등학생 때 마침 새로 생긴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그때 무대에서 여러 역을 연기하면서 비로소 저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연극 활동을 하면서 리더십을 갖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연극에 빚을 진 사람’입니다.”

소년 루고가 사제가 된 이유
청년 루고는 학업에서 꽤 빼어난 학생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전 학년에서 3등 안에 들 만큼 수재였고, 대학에서는 총학생회장을 맡아 협의회에 학생대표로도 참석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교사가 되어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파라과이의 국교는 카톨릭으로 특히 시골에서는 독일, 폴란드, 일본에서 온 외국인 사제들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국내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지만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과 인디언, 원주민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시골에서 제가 만난 아이들이 공부하러 올 때 맨발로 오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가난에서 그들을 구제하고 싶었습니다.”
에콰도르로 선교 활동을 나간 그는 1982년 파라과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파라과이에는 여전히 군부 독재 아래 사회가 통제되어 나라 전역에 엄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청년 루고가 강론했던 모든 내용은 녹음되었고, 정부에서 모든 녹음 파일을 압수했다. 정부는 그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여겼으며 정부에 맞서는 강론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고발로 인해 청년 루고는 ‘추방당하느냐, 스스로 나라를 떠나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스스로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
사제 루고는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그는 교회 사회 교리와 전문 사회학자자격을 얻기 위해, 사회 과학과 경제 분야를 공부했다. 학위를 딴 이후 그는 1987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교수로 강연했다.

주교 루고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1992년 와스모시 몬띠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경제가 점점 악화됐다. 1994년 파라과이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루고는 가장 가난한 산페드로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먼저 저소득층의 시민들을 위해 구호 활동을 펼쳤고, 인디언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시민들은 그를 ‘빈자의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곤살레스마끼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권력을 남용했고, 뇌물수수 등의 문제로 시민들은 고통받았다. 2003년 니까노르 두아르떼가 당선되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2006년 아순시온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고 빈민층의 폭발적인 관심과 인기를 얻었다. 루고 대선후보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시민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다. 그의 사회적 영향력과 활동은 이미 남미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루고 대선후보는 사람을, 국민을 사랑했다. 그는 정치를 통해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고 주교직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이 신앙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를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경제문제나, 실업 문제, 법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저를 찾아왔습니다.”
2008년에 루고 대선후보가 대통령으로 유력한 인물로 지목받았다. 특히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배척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루고 후보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그가 항상 가난한 시민들의 편에 서 있었고, 그의 겸손함이 사람들을 감동하게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불안한 정세 속에서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보건과 교육 분야가 열악했다. 그는 평소 시민들을 위해 의료 실태를 개선하고자 했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하게 외쳤다. 물론 반대파 세력은 그의 행보를 비난했다. 하지만 루고는 정치를 통해 그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시민들에게 정책과 행동으로 사랑을 펼치기로 마음 먹었다. 만약 대통령이 된다면 ‘사람들이 더 나은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으며, 더 나은 경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할 것이다’라고 결심했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미래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한 루고는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파라과이를 재건하고자 다짐했다.
“저는 ‘국민과 함께’라는 모토를 만들고 행동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국민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를 혼자 두지 마세요! 우리가 함께 이루는 파라과이를 만들어 갑시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파라과이 8개의 야당과 여러 사회단체 연합체인 애국동맹의 대선 후보로 추대되었다. 2008년 4월 20일 대선에서는 41%의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어지러운 시기에 대통령이 되었고, 탄핵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국민은 그를 대통령 궁의 문을 연 지도자라고 기억한다.
“외교단과 기업가뿐만 아니라 예술가, 인디언, 농부, 무지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누구라도 궁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국민 의료 혜택, 장학금 제도 등 약속했던 공약이 제도적으로도 실행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반면 다양한 사회적 인사와 기술자, 당원들의 지지도 얻어 정부를 구성했지만 이세 계층 사이에서 공평하고 정당한 합의점을 이뤄내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저는 정치적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과 합의점에 도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사상을 정치에 이용했고, ‘스스로 자기 풍차에 물을 갖고 갈 수 있다’는 옛 속담처럼 누구나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기 쉬웠습니다. 그 결과 정부의 단합에 금이 가도록 한 점은 저의 경험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파라과이 상원의원인 그는 국민을 위해 차별 없이 기회를 제공하는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한다. 자기를 위해 지위를 탐내기도 하고, 그래서 권력을 가지면 남용하기도 한다.
루고 의원은 대통령 재임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가난한 이들을 끊임없이 생각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다른 면모로, 대통령 재임시 기자회견을 열어 사제 시절에 있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결점을 이야기했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진실함을 느끼고 더욱 따랐다. 이런 관계가 있었기에 탄핵이 진행되었을 때 직위보다 국민들이 먼저였을지도 모르겠다.
루고 의원의 행보를 보면 ‘솔로몬의 재판’이 떠오른다. 두 창기가 한 아이를 두고 각기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했을 때, 솔로몬은 칼로 아이를 반으로 쪼개 두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판결했다. 그때 친모가 자신이 아이의 엄마가 아니니 아이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루고 의원도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았지만 오히려 국민들의 신임을 더 깊이 얻은 듯하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국민을 사랑하는 정치인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름다울 것이다. 높든 낮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각기 자리에 앉아서 사는 이들이 많은 사회가, 나라가 아름다울 것이다.

페르난도 아르민도 루고 멘데스 상원 의원
파라과이 공화국에 54번째 대통령이 된 페르난도 루고 전 대통령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빈자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탄핵으로 국민 앞에 작별 인사하며 유혈 사태를 막았다.
루고 전 대통령은 상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시민을 위해 올바른 법을 제정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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