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도 전쟁중이다③_6.25 참전용사 찰스 와일리

지난 5월 3일, 미 해병 한국전 참전용사회 박용주 회장과 세 명의 해병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자신과 전우들이 숱한 땀과 피, 눈물을 뿌려가며 지킨 한국을 8박 9일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지도상에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던 낯선 나라 한국이 이제는 제2의 조국이 되었다는 ‘찰스 와일리Charles Wiley’를 강원도 양구에서 만났다.

잿더미에서 아름다운 땅으로 바뀐 양구, 그리고 대한민국
“이 푸른 산과 들판, 잘 포장된 도로에 아름다운 건축물들까지…. 한국은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몇 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참전용사회 오렌지카운티 지부장 찰스 와일리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52년, 당시 유엔군과 인민군 사이에는 6.25 휴전협정을 위한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협정이 체결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국군과 인민군은 각지에서 그야말로 피가 튀는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한반도의 한복판에 위치한 양구는 중부전선 최전방에 자리잡고 있어 국군과 인민군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다. 기자가 양구를 찾은 5월 6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강원도의 산과 들판은 푸른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찰스 와일리 씨의 기억 속 양구의 빛깔은 여전히 잿빛이란다.

“6.25전쟁 초기, 인민군의 공세에 밀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힘입어 반격을 시작해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애써 찾은 땅을 다시 빼앗겼지요. 그렇게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양구는 온통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아름다운 시골마을로 바뀌었습니다.”

6.25 참전 이후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코스는 매번 비슷하다. 미해병 1,689명이 전사한 경기도 연천이나 6.25의 격전지로 유명한 양구는 꼭 들르는 곳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올 때마다 느낌 이 새롭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6.25가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포즈를 취한 와일리 씨.
6.25가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포즈를 취한 와일리 씨.

공포와 슬픔조차 우리에게는 사치였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표어이지만, 미 해병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했다. 6.25 때 한국에서 싸운 미 육해공군 장병들은 전시 징병제를 통해 모집되었다가 명령을 받고 참전한 군인들이었다. 반면 해병대는 전쟁터에서 싸우기를 자원한 군인들이었다. 6.25에 임하는 이들의 각오와 전투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와일리 씨와 전우들이 처음 적을 상대한 곳은 경기도 연천의 매향리 일대였다.

“우리가 수비해야 할 지역에는 고지高地가 여섯 개 있었어요. 그 고지에 베가스, 레노, 카슨시티 등 네바다 주州의 도시이름을 붙였지요. 각 고지마다 저희 해병대 한 개 소대 병력(20~55명)이 주둔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민군이 한 개 연대 병력(1,000~3,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오더군요. 우리로서는 속수무책이었지요.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제 전쟁은 영화나 다큐멘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섭고 처참했다’는 것이 와일리 씨의 기억이다. 옆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가 적이 쏜 포탄에 맞아 몸뚱이가 산산조각나고 팔다리만 남는 일은 예사였다. 그러나 공포나 슬픔 같은 감정조차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적군을 향해 쉴 새 없이 총을 쏴대야 했다.

“전쟁이 다 끝나가던 1953년 7월 무렵이었을 겁니다. 진지 안에 포탄이 떨어져 두 사람이 크게 다치고 한 사람은 두 발을 모두 잃고 말았어요.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그 사람들을 고지 아래로 옮겨 야전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그 일을 잊고 지냈는데, 지난 2000년에 우리 전우회 명단을 보던 중 우연히 그때 두 발을 잃은 친구의 이름을 보게 되었어요. 전우회 모임 때 아내와 아들 셋, 손주 넷을 데리고 나온 그 친구를 만났지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미국 100대 영웅으로까지 선정된 경주마
6.25전쟁사에서 미 해병대를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레클리스 하사Sgt.Reckless! 하사 계급을 달긴 했지만, 레클리스는 사람이 아니라 말의 이름이다. 본명은 여명黎明(아침해)으로, 김혁문이라는 소년이 애지중지하며 경주마로 키우던 암말이었다. 그런데 혁문의 누나가 전쟁통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고 말았다. 누나가 쓸 의족義足을 마련할 돈이 필요했던 혁문은 고심 끝에 미 해병대의 페터슨 중위에게 여명을 팔기로 했다.

1952년 10월 26일부로 미 해병대 소속이 된 여명은 6.25전쟁에서 탄약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아 맹활약을 펼쳤다. 몸무게는 400kg 정도로 다른 군마에 비하면 체구가 작은 여명이었지만, 탄약을 옮기는 도중 부상을 당해도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는 끈질긴 면모를 보였다. 또 작전 중에 적이 사격을 가해오면 스스로 자세를 낮춰 몸을 숨기고, 아무리 복잡한 길도 한두 번만다녀오면 외워버릴 만큼 영리하기도 했다.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무모할 정도로 과감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여명에게 해병들은 ‘레클리스Reckless(무모하다)’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자랑스럽게 여겼다.

“레클리스는 혼자서 하루에만 4t이 넘는 탄약을 아군진지로 나르기도 했습니다. 닷새 동안 탄약고에서 고지정상까지 386회를 오가며 아군에게 탄약을 보급한 적도 있습니다. 이동거리는 무려 56km나 되었지요. 적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던 해병들도 레클리스의 고군분투에 자극받아 중공군에게 1,400명의 사상자를 안겼습니다. 말 한 마리가 전세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멋진 이야기이지요.”

5월 3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회 회원들은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온정으로 환대해 준 한국인들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5월 3일부터 12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참전용사회 회원들은 ‘우리가 머무는 동안 온정으로 환대해 준 한국인들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6.25가 끝난 뒤 레클리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죽음을 무릅쓰고 훌륭히 임무를 수행한 레클리스의 무용담이 알려지면서 미 해병대는 레클리스에게 하사계급을 수여하기도 했다. 유명잡지 <라이프Life>는 1997년 발간한 특별판에서 레클리스를 워싱턴, 링컨 등과 함께 ‘미국 100대 영웅’에 선정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와일리 씨는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투머로우> 6월호를 꼭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더 이상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자신이 들려준 6.25 이야기를 책으로 꼭 간직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는 올해로 벌써 우리 나이 여든다섯이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6.25가 발발하면 바로 철모를 쓰고 전쟁터로 달려가고픈 심정이란다.

6.25 발발 70주년이 되는 2020년, 75주년이 되는 2025년에도 지금처럼 건강한 몸으로 다시 한국을 찾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지만 와일리 씨 주변의 참전용사들은 여전히 한국 방문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한국, 자신에게 부상이라는 멍에를 지운 한국에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그들을 꼭 한국으로 데려와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싶은게 그의 소원이다.

“어떤 한국인들은 제게 ‘저희 나라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전 한국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국인 여러분들이 홀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드린 것뿐입니다. 오늘의 이 찬란한 한국을 건설한 것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자부심과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한국음식이 그리워 이따금씩 LA의 코리아타운을 찾는다는 와일리 씨.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한국은 그에게 또 하나의 조국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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