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염색연구가 남옥선

평범한 상품도 비범한 아이디어 하나만 더해지면 금방 대박이 터지는 게 요즘 뜨는 사업들의 성공공식이다. (사)소백산천연염색의 남옥선 회장이 그렇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 영주의 지역특산품이던 인견人絹에 천연염색 기법이 더해져 탄생한 그녀의 옷들은, 요즘 국내를 넘어 중국에도 수출되는 인기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보이차의 맛과 멋을 닮은 인견의 아름다움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인 경북 영주는 곳곳에 희방폭포, 죽계구곡, 소수서원 등의 아름다운 절경과 문화유산들이 즐비한 명소다. 남옥선 회장이 운영하는 소백산천연염색의 갤러리는 영주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풍기읍의 한적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바람이 적당히 불면서도 햇볕 또한 잘 들어 염색한 옷감을 말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처럼 보였다.

“멀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 한 잔 하세요.”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남 회장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보이차를 권했다. 천연염색 인견과 딱 어울리는 음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우리가 마시는 보이차는 대개 3년 이상의 숙성과정을 거친다. 전통적인 수작업으로 인견을 염색하는 데도 몇 년까지는 아니지만,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잘 우러난 보이차의 황갈색 빛깔은 천연염료의 대표주자인 감물 빛깔을 꼭 닮았다. 또 보이차는 마시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효능을 발휘한다. 인견 역시 옷이나 스카프를 만들어 착용하면 체온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는 장점이 있다.

기자들이 찾은 소백산 천연염색의 웰빙 갤러리. 100여 평 규모의 이 매장에는 약 3천여 벌의 풍기인견 의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기자들이 찾은 소백산 천연염색의 웰빙 갤러리. 100여 평 규모의 이 매장에는 약 3천여 벌의 풍기인견 의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차를 마시며 갤러리 내부를 둘러보았다. 남 회장을 중심으로 16명의 ‘꾼’들이 직접 수작업으로 염색하고 마름질하고 바느질까지 해서 만든 의상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형형색색形形色色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닐까. 은은한 황토색, 파릇파릇한 풀색, 화려하고 고급스런 자주색, 그리고 수수한 느낌의 쑥색까지…, 마치 의상실보다는 회화작품을 전시해 놓은 화랑畵廊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인견으로 만든 의상 외에 모자와 핸드백, 코르사주 등 장신구도 있었다. 이래서 옛 사람들이 ‘솜씨 좋은 아낙은 무 하나만 있어도 수십 가지 반찬을 만든다’고 했던가.

물들이는 것은 사람, 완성하는 것은 자연
인견人絹이란 인조견사人造絹絲의 줄임말로, 인공적으로 만든 명주(실크)라는 뜻이다. 나무 부스러기를 화학처리하여 펄프로 만든 뒤, 이를 약품에 녹여 실로 뽑아내 짠 식물성 옷감이다. 명주가 귀하고 값이 비싸던 시절, 이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동물성 옷감인 명주나 양털(울)은 질기고 튼튼하지만, 열을 차단하는 성질이 있어 장시간 착용하면 덥고 벗으면 추운 것이 단점이다. 하지만 인견은 가볍고 바람이 잘 통할 뿐 아니라 땀을 흡수하는 덕에 ‘냉장고 섬유’ ‘에어컨 섬유’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얇아서 겉옷감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세탁하면 수축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최근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같은 단점은 거의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인견도 얼마든지 두껍게 옷감을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실크와 섞어 짜거나 솜을 넣어 누비는 것도 가능해졌어요. 미리 세탁을 해서 수축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등 인견의 단점이 끊임없이 보완되면서 활용도도 계속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견이 정전기를 방지하는 기능성 섬유라는 사“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정작 제값을 못 받는 섬유가 인견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인견을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만들까?’를 놓고 고민하던 중 우리 고유의 천연염색을 인견과 접목시켜 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실행에 옮겨야 의미가 있는 법, 천연염색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 남옥선 회장은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 했다. ‘어디어디에 기법이 뛰어난 명장明匠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들리면 그녀는 어디든 찾아가 기법을 전수받았다.

“염색 기법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없으니, 명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배우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죠. ‘천연염색’이라고 해서 한약재 같은 특별한 재료만 쓰는 것은 아닙니다. 양파껍질, 밤송이, 소나무껍질 같은 평범하고 흔한 재료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색을 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재료와 농도로 염색을 하더라도 건조과정에서 쬐는 햇볕의 양, 바람의 세기, 습도에 따라 매번 전혀 다른 빛깔이 나옵니다. 사람이 물을 들이지만 결국 그 옷감을 완성하는 것은 자연인 셈이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천연염색’ 아니겠어요?”

고집과 노력으로 중국 시장 문을 열다
이 같은 남옥선 회장의 노력에 힘입어 소백산천연 염색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매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 최대규모의 패션박람회인 프레타포르테에도 참가했으며, 세계한류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천연염색 인견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2012년, 소백산천연염색은 영주 농업기술센터와 공동으로 차조기와 마리골드를 활용한 염색 처리기술을 개발했다. 덕분에 마리골드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이를 주변지역 농가에 계약재배를 의뢰함으로써 새로운 소득작물을 발굴해낸 것이다. 2013년 중국 차茶 박람회 참석을 계기로 중국 시장 수출의 길도 열린 상태다.

‘천연염색 과정은 수채화 작업과 비슷하다’는 것이남옥선 회장의 설명이다. 노란 물감에 빨간 물감을 덧칠하면 주홍색이 되듯, 주홍색 옷감을 만들려면 먼저 노란 염료로 염색한 뒤 빨간 염료로 염색해야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견은 스카프, 오자미, 전통복, 가방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탈바꿈한다.
‘천연염색 과정은 수채화 작업과 비슷하다’는 것이남옥선 회장의 설명이다. 노란 물감에 빨간 물감을 덧칠하면 주홍색이 되듯, 주홍색 옷감을 만들려면 먼저 노란 염료로 염색한 뒤 빨간 염료로 염색해야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견은 스카프, 오자미, 전통복, 가방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탈바꿈한다.

실이 알려지고 2008년에는 한국능률협회로부터 ‘특산명품 인증’까지 받으면서 국내 인견 시장은 연1천억 원 규모로 급성장했다. 특히 풍기 지역은 우리나라 인견의 85%가 생산되는 곳이다. 인견의 몸값이 뛴다는 것은 지역주민이나 생산업체 입장에서는 분명 기쁜 소식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고급섬유인 명주의 ‘대체품’이라는, 인견의 태생적 한계였다.

“천연염색 인견으로 만든 의상은 한 벌에 50만 원 정도로 가격이 만만찮습니다. 그래서 국내 소비자들은 한 벌을 놓고도 살까 말까 망설이곤 합니다. 하지만 중국 소비자들은 정말 씀씀이 규모가 크더군요. 판매부스에 나타나 ‘좋은 옷이 있으면 전부 보여 달라’고 한 뒤, 옷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이건 맘에 든다. 사겠다’ ‘이건 내 취향이 아니다’ 식으로 그 자리에서 구매결정을 하더라고요. 한 사람이 평균 500~600만 원어치를 구입하는 거죠.”

대륙의 기질이 엿보이는 ‘싹쓸이’ 쇼핑을 보며 한편으로는 재밌다 싶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땀흘려 만든 옷이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다는 남옥선 회장. 그 후로도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색깔이나 문양은 어떤 것인지를 2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한 끝에 지난 3월 초 7만 달러 상당의 제품을 정식으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중국 소비자들은 점점 더 화려하고 밝은 색을 선호하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밝은 색으로 염색하면 색이 쉽게 빠집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물을 들여야 해요. 무늬로는 건강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중국인답게 십장생十長生 무늬를 선호하더군요.”

최근 풍기 인견이 웰빙 섬유로 각광받으면서 생산업체도 부쩍 늘었다. 현재 풍기인견발전협의회에 소속된 업체 수는 총 31개. 인견 시장의 성장은 남 회장에게 분명 반가운 소식이지만,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자기만의 장점을 계속 살리고 발전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매출의 대부분은 외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주말에 이뤄진다. 그녀가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직원들을 독려하며 매장을 운영하는 이유다.

“인견은 여름철이 끝나는 8월말이 비수기입니다. 그때부터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다음 시즌에 유행할 무늬나 디자인, 색상 등을 연구하지요. 해마다 10월 초에 열리는 풍기인삼아가씨 선발대회 참가자들이 입을 드레스도 이 기간에 만듭니다. 스무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입을 드레스의 무늬, 디자인, 색상 등을 다 다르게 만들기란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모릅니다. 올해로 벌써 6년째인데요. 그 과정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안목과 역량이 크게 성장하는 것을 느낍니다.”

옷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수단이다. 간단해 보이는 옷감의 배색 하나를 결정하더라도 디자이너들은 소비자가 선호하는 색과 ‘장이’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색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고심한다. 하지만 남 회장은 옷은 원래 인간을 추위나 더위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옷의 본질을 잊지 않는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쪽빛은 열을 내리게 하고, 붉은빛은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점까지도 생각하며 손님들에게 옷을 권한다. 그녀의 섬세한 정성이 담긴 옷들, 아니 작품들을 더 자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