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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 8천만 원 벌던 그녀가 찾으려 했던 행복응답하라, 친구야! 우리가 행복한 이유_김보민 Story
배효지 기자 | 승인 2016.04.04 16:23

스물두 살의 나이에 연봉 8천만 원을 번 김보민 씨. 등록금 2백만 원만 벌어보자고 생각했던 아르바이트에서 3백만 원, 5백만 원... 그런데 돈을 벌면 벌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욕심과 경쟁심이 생겼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렸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는데 왜 행복하지 못했던 걸까?

영등포에서 소문난, 150평이 넘는 양주집의 매니저로 일했던 김보민 씨. 3년 전 연봉 8천만 원인 그녀는 어느 날 바지 주머니가 찢어질 만큼 돈을 구겨 넣다가 문득 기쁘지만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등록금 200만 원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다시 아르바이트했는데... 200만 원 벌다가 500만 원 벌고, 천만 원을 버니 행복해야 했는데, 억대를 버는 사람들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그만큼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생겼어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목표를 정했던 그녀는 돈을 벌수록 욕구가 커졌고,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학업과 일을 병행하면서 그녀가 특별히 성공하고 싶었던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보민 씨 부모님은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이혼했다. 엄청난 빚을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다른 여자가 생겨 떠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보민 씨는 ‘낮에 미용실을 운영하고 밤에는 식당일을 하며 고생이 심했던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빚을 갚느라 10년간 매일 두 시간 정도만 잠을 잔 어머니가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짐을 덜어야겠다고 굳은 각오를 했던 그녀는 중학생 때 이미 해보지 않은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 당신은 괜찮다며 보민 씨를 타일렀지만 보민 씨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길거리에서 전병을 팔기도 했다.

“하루는 서울 시청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주먹밥 100개를 가져다가 팔았습니다. 숯불아르바이트, 전단 아르바이트 등 시간이 지날수록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매일 버스를 타다가 택시를 타니까 편했어요. 저는 제가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지 스스로 물었습니다.”

바쁜 일과 속에서 여유가 찾아오면 그녀는 남들처럼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배 한 척을 빌려 친구들과 낚시를 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검고 고요하고 잔잔한 물을 바라보자니 그녀의 마음도 고요해지는 듯했다. 왠지 모를 허전함을 달랠 겸 시작한 낚시였다. 낚싯바늘 끝에 톡톡 입질이 시작되면 그렇게 신기했다. 가끔 여유가 생기면 수상스키도 즐겼다. 돈을 번 만큼 쓸 수 있어서 즐거웠다. 하지만 정말 바쁘게 하루 일정을 보내다 보면 쳇바퀴 돌 듯 여유가 사라졌다. 돈을 벌면 번 만큼 새어나갔지만, 또 벌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만나자고 연락이 오는 선배가 있었다. 그가 조금씩 그녀의 삶에 비집고 들어왔다. 말이 통했고 답답한 그녀의 가슴에 유쾌한 웃음을 주었다. 만날수록 편안한 감정이 쌓여 괜찮은 사람이라는 신뢰가 생겼다. 그녀는 보랏빛 향기가 퍼지는 것처럼 잔잔한 행복이 찾아온 것만 같았다.

독일 무전여행을 할 때 ‘닥마’라는 여성의 집에 일주일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배를 타보고 싶다고 말하자 이웃집 배를 빌려 탔던 경험이 있다. 냉정할 것 같다는 독일인에 대한 편견은 정말 편견일 뿐이다.

정말 아빠같은 사람 만나고 싶지 않았다

보민 씨는 배신이란 단어는 아버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실하게 일했고 사람들과도 의리있게 지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다른 여성과 함께 있는 남자친구를 목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빠가 저를 버리고 떠난 후에 사람을 잘 믿지 못했는데 처음으로 속마음을 이야기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웠습니다.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홀로 남겨진 방안에서 칼로 손목을 그었다. 돈도, 사랑도 모두 부질없는 듯했고, 모두 그녀를 비웃을 것처럼만 느꼈다.
좌절감과 배신감으로 보민 씨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졌다.

“성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 정말 저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민 씨는 자살을 시도했다. 그 밤에 보민 씨의 어머니는 딸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가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가 울부짖으셨어요. ‘보민아, 안 된다. 왜 죽으려고 하니! 보민아! 내 딸 보민아. 미안하다. 보민아! 네가 이 정도로 힘든 줄 몰랐다. 병원으로 빨리 가자. 보민아.’ 그렇게 목놓아 우시는 엄마를 봤어요. 제가 엄마를 엄청나게 위한다고 생각했는데, 제 시간을 포기하고 희생한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성공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겠다던 결심은 사라진 채 처참한 모습만 보여드렸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죄송했어요.”

다행히 보민 씨는 생명을 건졌지만 모든 의욕이 사라진 채 방안에서 한 달간이나 꼼짝하지 않았다.

독일 함부르크 무전여행 때, 3조로 나뉘어서 여행했다. 베를린에서 로스톡까지 가는 여정 중에 히치하이킹을 하고있는데, 독일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젊은이답게 도전하는 너희 모습이 너무 멋지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20유로 (약 26,000원)를 후원해주신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자기 생각만 믿고 살면 실패한다

“전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너무 불안했어요. 그때 친구 아영이가 생각났어요. 아영이는 터키로 봉사를 다녀오기 전에 자주 술을 마셨던 과 동기예요. 아영이가 봉사하면서 술을 끊고 터키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런 아영이가 행복해 보였어요.”

보민 씨는 하루아침에 달라진 아영이를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너무 힘들었던 보민 씨는 터키에 있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제가 용기를 내서 이야기했어요. ‘아영아, 나 보민이. 나 정말 불행하다. 나 좀 도와줘라. 나 정말 행복해지고 싶다.’ 그렇게 말했는데, 아영이가 저에게 터키로 오라고 했어요. 터키로 오면 행복을 알려준다고 했어요.”

누구에게 단 한 번도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는 게 보민 씨의 고백이었다.

“저는 철저히 나를 믿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제가 자존심 다 내려놓고 아영이에게 연락했고 터키로 떠났어요.”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프 중 관광 체험 코너에서 한국의 호떡을 시식 중인 독일 친구 파울과 서울의 야경,거리,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인생의 해답을 얻은 터키에서

2013년 스물셋의 보민 씨는 터키에서 친구 정아영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소개해준 굿뉴스코 지부장은 첫 대면에서 보민 씨에게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저에게 ‘잘했다. 너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성공할 거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처음 본 그분은 저에게 그렇게 살면 실패한다고 말하니까 오히려 위로가 되었습니다. 항상 달려가던 저였는데, 터키에서 계속 상담을 받으며 사고가 깊어졌습니다.”

터키에서 두달간 보민 씨는 왜,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지 인생의 방향을 수정했다.

“터키로 해외봉사를 다시 가고 싶었지만, 지부장님은 ‘더 넓은 나라로 가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고 권유해주셨습니다. 그래서 2015년에 독일로 해외봉사를 갔습니다.”

독일 여름 캠프 워터 올림픽에서 친구들이 찍어준사진. 이 순간도 사진 찍기 싫다고 하는 지희와 씨름을 하다가자연스럽게 찰칵~

독일에서 만난 친구 지희의 변화

2015년 스물다섯의 보민 씨는 독일에서 ‘꿈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제가 그렇게 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줄 몰랐어요. 또래 단원들과 부딪히면서 제 모습을 알아갔습니다. 지부장님은 인생에 돈이 부족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보민 씨는 무전여행에서 독일 사람들의 속 깊은 마음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코리안 탁(한국 문화 교류)이나 캠프를 홍보하면서 무전여행을 하는데 저희 팀들은 정말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독일분이 갑자기 저희에게 오더니 봉투를 건네주었어요. 열어보니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국 음식이 가득 들어있었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사람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나 돌아보게 됐고, 독일 사람들만의 민족성도 느껴지고, 편안했어요. 지금도 독일로 돌아가서 살고 싶어요.”

보민 씨는 코리아 캠프를 준비하면서 연지희 씨와 만났다. 그녀는 20년간 말을 하지 않았던 세 살 아래 동생이었다.

“지희는 말하는 법을 모르고, 말을 할 때 왜 사람의 눈을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늦은 밤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지희를 발견하고 얼마나 섬뜩했는지 몰라요. 그런 지희를 다들 부담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지희 모습은 터키로 떠나올 무렵 절망하던 제 모습과 같았습니다.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그래서 지희에게 말하라며 계속 관심을 가졌습니다.”

독일 단원인 연지희 씨는 작은 소리를 내는 데에도 힘겨워했다.

“지희와 얼마나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저에게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보민 씨는 어느덧 지희가 웃으면 함께 웃었다. 부족해 보이는 지희 씨였지만 보민 씨는 지희 덕에 달라졌다. 지희 이야기를 하는 내내 보민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독일에서 더 큰 꿈꾸며

해외봉사를 다녀온 보민 씨는 몸과 마음이 성장한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독일에서 사업을 제안받고 구상 중인 일도 생겼고, 과거 그녀처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멘토가 되는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고 싶단다. 2016년은 그녀에게 더욱 설렘이 가득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지난 2월 27일 굿뉴스코 귀국발표회에서 김보민 씨가 주인공인 연극 공연이 있었다. 그때 보민 씨는 연지희 씨가 말을 하도록 계속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연지희 씨가 부모님에게 인사하는 장면과 거리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수천 명의 관객이 전율을 느꼈다.
그날 행사장에서 공연을 본 보민 씨의 외할머니는 ‘정말 우리 보민이가 극 중에서처럼 그런 고통이 있는 줄 몰랐다’며 ‘해외에서 한층 성숙해져서 고맙다’라고 전했다. 지희의 부모님 또한 연극에 삽입된 영상을 보면서 기쁨으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배효지 기자  dkfjsdkf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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