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교회에 다녔지만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로 바빠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던 때였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와있었다. ‘문혜진 언니라고 해. 조별모임에 꼭 나와줘’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장소가 샤브샤브집이라 밥이나 먹고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조모임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교회에서 혜진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다. 사고로 건물에서 떨어져 하반신이 마비되었지만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사는 언니….

우리 조가 식사하기로 예약한 곳은 2층이었다. 혜진 언니는 식당 직원에게 안겨2층으로 올라가고 다른 조원들이 휠체어를 옮겨주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적잖게 당황했고 위험해 보였다. 그러나 직원에게 안겨서 계단을 올라가는 언니의 표정을 보니 해맑게 웃고 있었다. ‘밝은 사람이구나.’

나와 비슷한 또래의 조원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는 고시생의 하루와 생활 중에 겪는 고생스러운 일도 다 이야기했다. 그 이후로 언니가 내게 연락해서 안부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더 가까워졌다.

 

 
 

발 마사지해줄게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경찰공무원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국제마인드교육원에 입사했다. 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이곳에서 마인드 레크리에이션이나 마인드 강연 진행 업무를 하며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돕는 일에 매력을 느꼈다. 2주 후, 혜진 언니도 내가 다니는 회사에 입사했다. 반갑기도 하고 아는 사람과 함께 일하게 되어 신기했다.

처음으로 언니 집에 놀러간 날, 가장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집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엄마의 도움을 받아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쇼파에 앉아 있었고 언니는 휠체어를 탄 채 내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언니의 발이 보였다. 빨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순간 아빠의 발이 생각났다. 내가 스무살 때, 아빠는 암 선고를 받고 4개월 정도 병원생활을 하셨다. 당시 매일같이 침대에 누워 계셔 다리가 많이 부어 있었다. 그 다리를 주무르면 마른 사과를 누른 것처럼 푸석푸석해 주무른 자국이 회복되지 못하고 한동안 남아 있었다. 그때 아빠가 얼마나 아파했는지 떠올랐다. 아무리 다리를 올리고 자도 빠지지 않던 붓기. 언니를 쇼파로 옮겨 앉히고 발마사지를 해주었다. 다행히 언니의 다리는 아빠의 다리보다는 주무른 자국이 금방 돌아오고, 붓기도 빠르게 빠졌다.

누구보다 앉아 있는 시간이 긴 언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매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항상 밝은 언니가 신기했다. 언니가 휠체어에 앉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학창 시절에는 어땠는지 등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는데 하나하나 다 대답해주었다. 아버지는 아픈 이후로 많이 작아지셨고 덤덤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삶을 정리하셨다. 그러나 언니는 달랐다. 아픈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학교도 다니면서 걸을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바쁘고 활기차게 생활했다. 언니의 삶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더 가까워졌다.

 

 
 

언니와 함께하는 학교생활
언니가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가는데 그때 도우미로 따라가 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이 일을 하면 정부에서 시급도 지급하는데, 월세와 교통비 등을 빼고 나면 사실 생활비가 넉넉지 않던 나는 언니의 제안이 고마웠다. 그래서 2015년 11월부터 지금까지 언니와 함께 학교에 다니고 있다.

하루 종일 언니와 같이 있다 보면 이전에는 어떠한지 알아채지 못했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일상이 보인다. 식당에 가기 전에는 그 식당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휠체어로 식당에 갈 수 있는 길도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언니가 갈 수 있는 식당은 한정되어 있다. 주변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나 맛집이 많은데 2층에 있거나 지하에 있어서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러나 나 혼자 다녔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알아갈 때, 내가 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공감대가 하나씩 형성되어 가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감사하다.

 

마인드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태국 학생들. 숫자 순서대로 공을 옮기는 게임을 하며 절제와 협동을 통해 팀원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인드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태국 학생들. 숫자 순서대로 공을 옮기는 게임을 하며 절제와 협동을 통해 팀원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잠깐이라도 놓을 수 없는 긴장
1월 27일 언니와 태국으로 출국하는 날, 탑승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 안에서 운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는 바로 보이는데 도대체 엘리베이터가 보이지 않아 공항경찰에게 물어 겨우 찾았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길 여기저기에 손님들이 놔둔 캐리어들이 있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앞으로 조금만 가주세요.”
언니와 나는 먹는 건 정말 잘 통한다. 우리가 고른 두 음식의 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옆으로 와서 휠체어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예전에 언니가 “다친이후로 사람들이 쳐다보면 너무 싫었어”라고 했는데 그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탑승시간이 되어 게이트로 이동했다. 승무원들이 언니를 휠체어에서 기내용 휠체어로 옮기다가 실수해서 언니가 넘어질 뻔했다. 잠깐이라도 긴장을 놓으면 다칠일이 많았다. 6시간이나 비행을 하기 때문에 중간에 소변 통을 한 번 비워야 했는데,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냄새가 날까봐 조심스럽게 꺼내 검은 봉지에 싸서 버렸다.

태국에 도착 후, 숙소에서는 화장실 문이 너무 좁아서 휠체어가 들어가지 않는데다 문턱은 높았고, 샤워기는 짧아서 씻기 불편했다. 그래서 방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태국으로 출발하는 날 오후4시부터 숙소에 도착한 새벽 6시까지 줄곧 앉아 있었던 우리. 방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침대에 누웠다. 나는 다리를 올리기도 하고 바지를 쉽게 벗을 수도 있었지만, 언니는 신발을 벗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 다리도 이렇게 부었는데 언니 다리는 어떨까 하고 봤더니 신발을 벗으면 다시 발을 넣지 못할 만큼 부어 있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언니는 침대로 옮겨 눕지 못하고, 다리라도 좀 뻗고 있으면 나을 거 같아서 침대 쪽으로 다리를 올려줬다.

 

서로의 팔 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게임. 서로를 믿고의지하여 얻는 성공의 기쁨을 가르쳐준다.
서로의 팔 힘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게임. 서로를 믿고의지하여 얻는 성공의 기쁨을 가르쳐준다.

20분 정도 후에 새로운 방으로 옮기고 짐을 풀고 나니 아침 7시 30분이었다. 행사가 그날 오전부터 시작이라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입고 온 겨울옷을 벗고 여름옷으로 갈아입는 것도, 세수를 하는 것도 한참 걸렸다. 넘어지지 않게 잡아줘야 하고 물을 쓸 수 있게 샤워기를 들어주고 그런 후에 나도 씻었다. 서로 나갈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행사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언니가 4시간마다 한 번씩 소변을 봐야하기 때문에 레크리에이션이 끝나면 행사장에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소변기구들을 소독하고, 소변을 볼 수 있게 준비하고, 다 끝나면 치우는 일을 하루에 세 번씩 했다. 나중에는 소독 솜이 떨어져서 직접 만들기도 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물을 끓일 수 있는지, 침대가 너무 푹신하진 않은지 등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나는 감각하지 못하는 것들도 언니에게는 변수가 되었다. 미세한 차이가 언니에게는 큰 불편함이었다. 자유롭게 화장실에 가는 걸 행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언니 옆에 딱 하루 있어보니 그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언니에게 도움받는 사람
2~3일이 지나니 나도 몸이 많이 피곤했다. 처음에는 언니를 돕는 일이 당연하며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동안 휠체어를 밀면서 다니는 것이 힘들긴 했나보다. 언니가 나에게 부탁하는 것들이 슬슬 귀찮았다. 옷을 거는 일, 휴지를 갖다주는 일 등 사소한 것들을 부탁받을 때는 언니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정도 귀찮다는 생각에 빠져있을 때, 한가지 발견되는 점이 있었다.

‘내가 여기에 왜 왔지?’ 언니가 태국에 갈때 나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해서 왔고, 언니 덕분에 좋은 숙소에서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귀찮게 여기는 일들이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일도 아닌 일을 언니는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했다. 내가 언니 덕분에 해외에도 오고 혼자라면 받지 못할 대접을 받고 있었다. 내가 언니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언니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언니가 나에게 부탁하는 일들이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에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일주일 동안 언니와 함께 생활하지 않았다면 분명 언니를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좁았을 것이고 그래서 갈등도 많았을 것이다. 4일 정도 지난 후, 나도 요령이 생겨 언니의 세수나 샤워를 돕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언니가 마인드 강연을 한 이후로 언니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휠체어에 탄 언니를 쳐다보는 게 싫은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언니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곧 걸을 거라며 힘을 주고,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을 보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웠다. 다음에도, 다다음에도 함께 다니기로 약속했다. 언니와 함께 하는 것이 즐겁다.

최지나
국제마인드교육원에서 마인드 레크리에이션, 마인드 강연 진행 업무를 하며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돕고 있다. 실제 인성교육을 통해 마음의 자세가 올바르게 바뀌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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