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은 인생의 독
박수정은 다섯 살 때부터 음악을 배웠다. 딸을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려 했던 어머니의 바람으로 한글을 익히기도 전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매우 예민한 감성을 지니게됐지만, 그는 매번 다른 아이들에 비해 재능없음을 괴로워했다. 초등학생때에는 이미 음악에 질려버리고 성격이 무척 의기소침해졌다. 그는 자기 안에서 점점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친구를 어떻게 사귀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그러다 보니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저만 생각했어요.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이 어떻든지 제게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박수정은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으며 TV 에 빠져들었다. 공중파는 물론 같은 시간대의 웬만한 케이블 프로그램까지 주요 장면과 대사를 줄줄 꿰고 다녔다. 반면 TV 속 세상이 아닌 일상에서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그는 이러한 가운데 자신을 위로하며 합리화했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 ‘사람들은 내 맘을 몰라’ 가끔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작은 키와 까무잡잡한 외모에 열등감을 느끼며 이를 부담스러워했다. 설사 가까워진 친구가 생겨도 물과 기름을 넣은 병을 흔들면 잠시 섞이다가 다시 나뉘듯 얼마 안 돼서 사이가 멀어졌다. 그는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싶었지만, 또다시 상처를 받게 될까 봐. ‘애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를 잘해만 해!’ 모든 친구를 동료가 아닌 경쟁상대로 여겼다.
“대학생 때에는 마음이 너무 지치더라고요. 외로움 속에서 독하게 지내다 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굿뉴스코를 만난 거예요. 처음에 1차 워크숍에 참석했을 때에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마인드 강연에서 ‘노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노력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는 말이 얼마나 뼈저리게 와 닿던지요!”
박수정은 13기 단원이 되어 미국 동부로 떠났다. 세계 최대의 다민족, 다인종 국가인 미국. 그는 다채롭고 자유로운 미국 문화가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생활양식을 흡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지부장님은 수시로 ‘이곳에서 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밝아지길 빈다’며 격려해주셨다. 현지 센터를 오가는 친구들도 그를 많이 배려해주었다. 피부색이 다른 흑인, 백인 학생도 영어에 서툰 그를 위해 천천히 말하거나, 쉬운 단어만 골라 이야기했다. 그를 위해서 일부러 한국말을 배워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작은 봉지에 포장된 물을 사 왔다. 그리고 우‘ 리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부터 물을 드리자!’며 그에게 내밀었다. 박수정은 몇 모금 정도 되는 물 봉지를 받고 눈물을 가득 머금었다. 가난하지만 순수한 학생들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며 온 정성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아이티에서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대했다. 2013 북미 그라시아스 크리스마스 칸타타 홍보를 할때는 도보로 한 집 한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매일 600여 장의 초청장을 돌렸다. 하루는 피자 배달부였던 동생이 영문도 모르고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람을 만났다. 슬픔을 나눌 친구가 간절했지만,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기에, 낯선 동양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박수정은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또 마약을 복용 중인 그를 위해 행복을 빌었다.
박수정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미국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지만, 많은 사람이 극심한 빈부 격차와 잦은 총기사고로 저마다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곳. 실제로 뉴욕은 다른 지역보다 월세가 무척 비싼 탓에 맨해튼에는 거리로 쫓겨난 노숙자들이 많다. “아이티를 떠나는 날이었어요. 아이들이 자기를 기억해달라며 머리핀을 빼서 줬어요. 사진을 몹시 찍고 싶었지만, 당시 제게 카메라가 없었거든요. 지금도 ‘아이티에서 사진을 찍었다면 그 장면을 보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텐데….’하며 아쉬워해요.”